|
제 9강 "받았으니"..."받을 것이니"
이미 이루어진 사실
로마서 5장 1절의 다른 국면을 살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과거시제: 이미 이루어진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우리의 영적 성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일을 지금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 것도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은 우리의 상황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는 아마도 파산 신청을 하거나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안고 있는 자녀를 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문제를 겪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좋은 소식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가 여러분이 처한 현실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평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전적으로 관련된 그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더라도 평강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화평이 그들이 노력하여 얻었다거나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어졌다거나 거기에 기여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화평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에게 복음을 맡기신 이유는 종교개혁에 섞인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운동을 일으키신 주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19세기에 진리를 성실하게 추구했던 자들 곧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에게 주셨던 아름다운 기별은 이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과 더불어 이루어 주시는 과정 이 둘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재림운동의 초기 구도자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도록 인도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경의 진리를 주셔서 그 선구자들이 이 특별한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하셨을까요?
19세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신도들은 계속 말씀을 파고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끄셔서 위대한 성소의 진리를 다시 발견하도록 하심으로 완전한 기별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성소 진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온전히 보여 주는 유일한 가르침입니다. 성소의 봉사는 성소 뜰에서 일어나는 일들, 곧 흠 없는 어린양을 희생으로 드렸다는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양의 피는 성소로 옮겨집니다. 매일 제물을 드리고 피를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구절보다 로마서 5장 9, 10절은 이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첫 번째 단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9절의 이하를 주목하십시오.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이미'와 '지금',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9절).
여러분 이제 보입니까? "(이미) 받았으니..(지금) 받을 것이니."
이제 다음 구절을 살펴봅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10절 전반부).
여기에 나타난 병행구조를 보십시오.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9절)“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 화목하게 되었은즉"(10절)
10절의 후반부를 봅시다. "더욱...?
"받았으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 줍니까? 그분의 죽으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았으니"라는 과거 사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받을 것이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곧 그분의 부활하신 생명과 항상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간과하지 않기 바랍니다. "받았으니…받을 것이니."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을 받았으니, ~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요?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았으니"와 "받을 것이니에서 어느 쪽에 신경을 쓰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대부분 "받을 것이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요. 내 인생에서 잘 안 되는 게 있어요.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나는 지금도 실수를 하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그들은 항상 외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이 하는 일에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도 바울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바울은 "받았으니"가 "받을 것이니“ 보다 선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하여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풀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희가 얻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위한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무엇이 이 사실을 감사한 마음으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에게 큰 도전이 있는 까닭은 여전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좋지 않게 여기실텐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유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항상 옳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까닭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 점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이미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 곧 희생하시고 사랑하시고 베푸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사람들 안에 억지로 사셔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구주이자 주인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을 때 예수님의 근본적인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구속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 예수님의 역할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 있는 상태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언제나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그분께로 이끌기 위하여 끊임없이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러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어떤 시점에 이르면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사시도록 그분을 우리 삶에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운이 좋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은혜를 받으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까?
로마서 5장을 훑어보시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몇 가지 성구들을 열거해 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로마서 5장 6절, 강조 첨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장 8절, 강조 첨가).
"연약할 그런데 이처럼 연약하고 경건치 않고 죄인인 사람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셨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보혈을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때에", "경건치 않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다른 성경구절들을 봅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장 10절, 강조 첨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장 12절, 강조 첨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장 18절, 강조 첨가).
"원수", "많은 사람", "사망"
그런데 원수 되었을 때, 사망에 이르도록 정죄된 모든 사람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졌습니까? 생명에 이르게 하는 화목과 칭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주목하십시오. 위에 열거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연약한", "경건치 않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많은 모든 사람", "정죄에 이른" 이로 보건데 우리는 영원한 사망을 당할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면 역시 주의를 기울여 살펴봅시다. 남녀를 막론하고 죄인은 은혜를 쟁취하거나 그럴 만한 자격을 얻거나 자신의 가치를 하나님께 자랑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한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 곧 그분의 완벽한 삶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경건치 않고 아직 죄인이고 원수인 모든 정죄함을 받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헤아리시는 방법에 따라 모든 죄인은 그분이 보시기에 완전히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두를 대신하여 한 사람, 곧 예수님을 받으신 것입니다. "와~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상태가 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은혜 아래 거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평생 매일 십자가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라는 헬라어칭의 justification가 뜻하는 바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요."
내가 하나님 앞에 잘했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선한 것도 없고 칭찬받을 만한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장 15절).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위해 담대하게 일하는 데 제약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이점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동기가 되어 바울은 엄청난 저항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셨는지요? 바울에 의하면 여러분이 은혜 아래 있지 않다면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법 아래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놀랍고 기가 막히는 스스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기준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삶을 살 수 있었는지 하나님께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여러분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법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 양보해서 여러분을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면서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에 꼭 맞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우리 삶에서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크고 유일한 도전은 은혜 아래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요소는 놀랄만큼 간단한 단어, 곧 믿음입니다.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4장 15절).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매일의 삶에서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믿음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르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적그리스도 Antichrist 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하나님의 요구 사항들을 지킬 수 있는 어떤 다른 묘안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는 우리가 기여한 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루신 일은 각양각색의 죄인을 모두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젊은 동성연애자가 내 사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곤란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목사님도 답을 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말해 보세요."
"재림교회 안에 동성연애자를 위한 은혜가 존재합니까?"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자, 지금 신학적인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실제적인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은혜가 풍성합니다만, 실제로는 교인들 사이에서 은혜를 찾아 볼 수 있으리라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좀 어렵겠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자격을 갖춘다면 오늘이라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어떻게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라고 그가 반문했습니다.
"형제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불경건하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면 됩니다."
“뭐라고요?" 그가 나를 가로막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렇다면 형제님은 아주 큰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그 사내가 말했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
"그렇다면 형제님이 하나님의 원수란 말이죠? 지금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정죄를 받았다고 느끼고 있죠?"
“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가 시인하였습니다.
“네, 그렇다면 말씀드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형제님의 것입니다!”
자신은 이런 상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이런 단어들이 자신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같이 거리 어구에 거만하게 서서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지 나타내 보이려고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헌금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
이 사실로 인해 우리 모두의 가슴은 놀랄 만큼 벅차오르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게 할 어떠한 죄도 없습니다. 그렇게 할 만한 죄의 정도나 죄의 종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이미 화목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5장 19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호감을 갖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유일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시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미 확립된 사실, 곧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특권을 주실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분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받아들이고 지금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의 생명을 안으로 모실 때 구원은 시작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묻습니다.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현재에도 구원을 받는 과정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있는 지점입니다."
구원은 이미 확립된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으면 바로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과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
이제 여러분이 의롭게 되는 것과 이와 대조적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의 뚜렷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칭의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내가 아는 '의로워 지는 사람들이란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과 성숙함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장 18~19절, 강조 첨가).
만일 죄인들에게 지금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이 주어지면 그들은 마침내 의로워 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이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이 죄인들을 의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을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보장을 받는다면 날마다의 생애에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죄의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구원을 잃었버렸다든가 은혜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터득한 진리에 이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나는 정말로 실수할 자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순식간에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음을 알고 계시지 않는가! 나는 우둔하여 하루밤 사이에 완전해질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 덕분에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헤아려 보거나 행동을 점검하고 얼마나 발전했는지 걱정하면서 "이만하면 충분히 선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쉬지 않고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 중에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결코 완벽할 만큼 선하지 않아." 실제로 재림교회 여성이 <결코 완벽할 만큼 선하지 않네>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실한 재림교인들 중에도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의로워 지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선한가?"라는 질문은 비록 혼잣말이라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여러분의 구원은 자신의 순종과 선함에 달려 있지 않고 바울이 말한 바 "한 사람의 순종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에 관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굉장히 파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직 한 사람의 순종하심만 우리가 의로워지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하면, 여러분은 지금 이 시점에서 파격적인 이 주장을 나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결코 순종을 소유할 수 없다. 언제나 순종은 오직 예수님의 소유이다." 순종의 일부라도 내게 속하거나 나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종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분의 순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천지개벽天地이라고 할 만큼 놀랍고 대단한 변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너무나 파격적인 주장이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실제로 이것이 파격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나를 의롭다고 여기시고, 의로워 지도록 만드시는 근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막힌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삶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 예수님의 순종하심을 나의 의로 이미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워 지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특권마저도 내가 살아나가야 할 나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삶을 옷 입는 것을 단순히 배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좀 더 잘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께서 사셨던 완전한 순종의 삶을 옷 입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격적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삶을 옷 입는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이미 확립하신 사실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확립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매일 거기로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분명히 성령의 부족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에게 이런 전통은 없습니다만, 손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주여, 채워주소서!"라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삶을 신자들에게 가져다주는 사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믿음 안에 머물고 은혜 아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매일 주시는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다니요. 한 사람의 순종하심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완전하게 예수님을 나를 대신하여 받아주셨군요."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을 위한 문을 열어줍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들어와 그분처럼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절).
그렇습니다. 심오하고 놀랍고 기이하고 파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망의 근본입니다.
"내용 복습
1.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재림운동을 일으키신 주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에게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자 완성되는 과정이라는 아름다운 진리로부터 초점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 일에 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4. 바울이 이 진리를 로마서 5장 9, 10절에서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토론해 봅시다.
5. 예수님께서는 누구 안에 사십니까?
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칭의)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까?
7. 어떻게 하면 매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8. 구원 안에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9.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삶은 여러분이 의롭게 되는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10. 그리스도의 삶을 옷 입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