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황골전설
위덕왕의 철수는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백리 앞의 황골(승지골) 전설인데, ‘이백리 앞 고리산성 아래 골짜기를 황골, 승지골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관산성 전투 시 백제군이 신라군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성왕의 태자인 여창이 고리산에 주둔하고 있고, 신라군사가 여창을 공격하려고 기어오르려다 마침 도착한 성왕이 급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주112) 는 전설입니다.
관산성 전투 시 위덕왕과 성왕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설을 틀렸다고 무시하기 보다는 백성의 눈에서 위덕왕의 철수 작전을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되어 위 전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첫째, 백제가 이겼다는 것과 둘째, 두 명의 왕이 있다는 것, 셋째, 황골(승지골)이 이백리 고리산 밑에 있는 황골이 아니라 대전쪽 고리산 북쪽에 있는 항곡리(항골, 황골, 사현성(항곡리산성)이 있는 곳) 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관산성 전투는 백제가 신라에 일방적인 패배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의 승리를 말하는 옥천의 황골전설, 대전 핏골전설, 소태고개 전설, 삼국사기 백제본기 660년 탄현 기록에서 백제의 승리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과 백제가 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식장산에 관한 전설, 관산성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지명 및 전설이 다수 존재합니다.
또 삼국유사의 기이편 진흥왕전에 ‘승성 3년(554년)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기록이 있는데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가 외교력을 총동원한 국가적인 전면전인데, 554년 9월이면 관산성 전투 중 시기로 백제의 승리를 기록했는데,
그 승리 내용이 위덕왕이 따로 신라 땅 진성이라는 곳으로 쳐들어가 사람과 말을 빼앗아 왔다는 기록이 관산성 전투 내용과 맞지 않아 배제는 하였으나 그 시기와 전쟁의 배경이 관산성 전투와 맞아 연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상기의 전설, 지명, 및 삼국사기의 탄현 관한 기록등을 기초로 백제가 관산성 전투에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일방적인 패배는 아니라는 점을 정리해 가겠습니다.
둘째, 전설에 만나지 못한 성왕과 위덕왕이 나오는 것에 대해, 황골 전설은 고리산에 여창의 군대가 주둔하였고 신라군 여창을 공격할 때 성왕의 군대가 신라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설입니다.
이를 일본서기에 근거한 위덕왕의 철수와 왕의 행렬을 파악한 신라군이 추격하고 식장산쪽에서 왕급 규모의 백제군이 신라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 성왕이 죽은지 모르는 일반 백성의 눈에는 위의 전설과 같이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백제 위덕왕은 신라군이 옥천 대골쪽에서 모여 관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화인진쪽이 공격을 받지 않았으나 굳이 위덕왕이 관산성을 경유 철수하여 신라군에게 포위 당하고 쫓기는 철수를 하였습니다.
위덕왕이 위험할 필요가 없는데 위험을 자초한 것은 위덕왕 스스로 신라군이 관산성 밖으로 나와 추격하도록 미끼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은 후로 위덕왕에 대한 호위가 허술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설에 성왕이 신라군을 급습했다는 것은 다른 왕이 있다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철수하는 위덕왕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가짜 위덕왕이 미끼가 되어 관산성을 점령한 신라군을 관산성 밖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진짜 위덕왕은 미리 식장산에 후방에 있은 백제군을 모우면서, 안전하게 화인진에서 뱃길로 마산동산성 앞 내탑에 내려 세천을 경유 식장산 독수리봉산성에 오르고, 옥천 할아비산성까지 가서 관산성 재공격을 지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식장산 독수리봉에서 옥천쪽으로의 능선에 502고지 및 할아비산성 사이에 아래 사진과 같은 석축이 있습니다.
502m 고지 보루
석 축
독수리봉산성에서 할미산성까지 산성은 급히 축성하여 일반 성돌이 아니고 위 사진과 같은 성돌을 대강대강 쌓아서 그런지 502m 고지 보루가 가장 잘 쌓은 성입니다. 그리고 골짜기의 경사가 급해 능선 길의 요철이 심하여 능선의 요철을 줄여 다니는 사람이 편하도록 사진과 같이 석축을 쌓았습니다.
누구를 위해 석축을 쌓았을까요. 급해서 산성조차 대강 대강 쌓는 형편인데, 전쟁 중에 병사나 장수들이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해 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위 석축을 보고 위덕왕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식장산 이름 유래의 전설 중 ‘백제 동성왕이 이곳에다가 군량미를 감추어 두었다고 해서 신라사람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주113) 대전지명지에 의하면 식장산은 ‘백제 때 성을 쌓고 군량미를 많이 저장해 놓고 싸움을 하였다는데서 생긴 이름, [특이사항] 숯고개,숯재,탄현성재라고 부르는 산높이 597m 되는 산.’ 주114) 등 식장산이라는 이름이 전쟁과 관련된 이름으로 식장산은 산세가 옥천쪽으로는 경사 급하나 대전쪽으로는 상대적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골짜기가 깊습니다.
식장산 산성의 배치를 보았을 때, 대전까지 남진한 고구려를 막기 위해 식량을 모았다면 산성의 배치도 대전쪽이 적 방향이어야 하는데 산성 배치나 식장산의 지세가 옥천쪽을 적방향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대항한 동성왕보다는 관산성 전투 시 위덕왕이 옥천 할아비산성까지 와서 가짜 위덕왕의 철수와 신라군의 추격 과정을 보면서, 추격 신라군를 급습하고, 관산성 재점령을 위한 공격 지휘했을 것으로 보이고, 그 뒤에는 독수리봉산성에서 관산성 공격을 지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황골(승지골)이 이백리쪽 고리산 밑에 있는 황골이 아니라 고리산 북쪽의 항곡리 즉 황골이라는 것입니다.
고리산의 제1보루 높이가 355m, 제2보루 412m로 산이 높고, 급경사라 보루가 있고, 골짜기가 짧아 병력주둔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고리산 북쪽에 위치한 항곡리는 황골이라는 옛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생긴 지명 주115) 으로 전설의 황골(승지골)을 항곡리로 볼 때 삼국사기 탄현이야기를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탄현(침현)에 관하여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도 10를 보면 가짜 위덕왕은 용목리에서 이백리 고리산 밑 황골앞으로 해서 고리산 북쭉의 항곡리(황골)로 못미쳐서 독골재가 있고, 독골째에서 독골로 내려가면 대전 신촌동 그리고 세천쪽으로 철수를 했을 것으로 보이고, 신라군도 이 길로 추격을 했을 것입니다.
독골재 옆에는 490년 만들어진 사현(항곡리)성이 있고, 식장산 할미산성쪽에 있던 백제군이 이백리쪽에서 신라군 후미를 끊고 공격을 하고, 사진 02의 숯고개(탄현)쪽 백제군 일부도 공격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신라군은 사진 02의 좁은 계곡(증약에서 항곡리(항골)로 연결되는 계곡)길로 백제군을 추격을 하다가 후미에서 백제군이 공격해오니 진을 이루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또 백제군은 사현성 병력과 충원된 백제군의 일부가 고리산쪽으로 매복하다가 신라군을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 골짜기에서의 전투 흔적으로 대전 쪽에 백골산 주116) 이라는 지명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는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만큼 여기서의 신라군의 희생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02 숯고개(탄현)에서 본 황골(항곡리) 쪽 사진
옥천 구진벼루 옆에 ‘염쟁이들’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시신를 염한 곳이라해서 염쟁이들이라 합니다. 보통은 전쟁 후라도 시신은 수습을 해주는데, 이곳에서는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만큼의 신라군의 희생이 많았는지 백골산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항곡리(황골)쪽 전투에서 살아남은 신라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탄현 기록, 백골산 지명,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 전설 및 직동의 소태고개 전설를 참고하고 주변의 산성(국사봉보루, 대정리 산성, 사현성, 백골산성, 갈현성, 능성, 질현성, 질현성 1-6보루, 우술성, 개머리산성, 마산동산성) 및 멀리는 금강 넘어 웅장성으로 추정되는 호점산성 및 금강 넘어 가호리, 후곡리쪽의 산성을 감안하여 추정 하겠습니다.
사진 03 질현성3보루에서 본 전경
대전지명지에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은 백제와 신라군이 싸워서 피가 내를 이루었다 하여 피골이라 하였다. 주117) 하였고, 직동의 소태고개은 백제군사들이 노고산성에서 군량을 운반하려 나왔다가 신라군과 마주쳐 싸웠으며, 이 싸움으로 시체들이 사태(沙汰)가 나서 ‘사태고개’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주118)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도 11 핏골
핏골과 소태고개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싸웠다는 전설과 황골에서 살아남은 신라군은 사진03과 지도11를 보면 국사봉 보루, 대정리산성, 사현성, 백골산성, 신선봉 보루, 갈현성, 능성, 질현성, 고봉산성, 질현성 1-6보루, 우술성(계족산성), 개머리산성, 마산동산성등 주변이 성으로 빙 둘러쌓인 신하동 부근(대청댐으로부터 수몰지역)에서 사진 03과 같이 백제군이 항시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는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닭장에 갇힌 닭,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갇힌 신라군은 여러 방향으로 탈출구를 찾았을 것이나 사방이 산성이라 탈출로를 찾지 못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에 554년 10월 고구려군이 공주(웅천)을 공격합니다. 백제 입장에서 고구려의 웅천 공격은 갈수기라 금강의 물은 줄었겠지만 부여, 공주, 화인진으로 연결되는 금강의 백제의 보급로가 차단되는 상황과 전 왕도였던 공주의 전략적인 가치 무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갇힌 신라군은 공주쪽으로의 고구려군 공격 소식을 목숨 걸고 관산성을 오가는 전령에 의해 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금강을 넘어 공주쪽의 고구려와 합류하는 것이 관산성쪽으로 오는 것보다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관산성의 김무력장군의 명령에 의해 금강을 넘어 공주로 가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지도 11에서 보듯이 상대적으로 쉽게 탈출하여 고구려군과의 합류 가능성이 높겠다고 생각되는 개머리산성과 마산동산성 사이 핏골쪽으로 탈출하다가 대전시 동구 직동 핏골에서 전멸을 당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주112) 옥천의 마을 유래, 2008년, 옥천문화원, 165쪽
주113)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03, 옥천군, 충북대학교중원문화연구소, 69쪽
주114)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39, 149쪽
주115) 옥천의 마을 유래, 2008년, 옥천문화원, 172쪽
주116)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237, 250쪽
주117)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348쪽
주118) 대전지명지, 1994,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3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