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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東方朔) 이야기
부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까지 올랐다.
재산을 모두 미녀들에게 탕진했으며, 광인이라고 불렸다. 한때 부국강병책을 상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하여 〈답객난 答客難〉·〈비유선생지론 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한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한대(漢代)부터 그에게 황당한 글들을 가탁(假託)하는 것이 유행하여 지금도 〈신이경 神異經〉·〈십주기
十洲記〉가 그의 저서로 전해지지만 모두 진(晉) 이후의 위작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를 먹어 대단히 오래 살았다고 한다.
저승 사자를 잘 대접했기 때문으로 이야기된다.
대접을 받은 저승사자는 삼십갑자를 살게 되어 있는 동방삭의 수명을 삼천갑자로 고쳐주었다. 그러나 삼천갑자
를 살고난 동방삭이 붙잡히지 않자 저승사자는 동방삭을 잡아가기 위해 냇가에서 숯을 씻었다.
어느날 동방삭이 지나가다 숯을 씻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저승사자가 숯을 씻으면 하얗게 된다 해서 씻는다고
대답하자 동방삭은 자기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처음 듣는 소리라고 말해 결국 자신이 동방삭임을 노출함으
로써 잡혀갔다고 한다.
주인이 아프면 땀 흘리는 나무
태초 2년(기원전 103년) 동방삭은 서나사국(西那邪國)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손가락 굵기와 구척 길이의
‘성풍목(聲風木)’ 열 그루를 가져와 한무제에게 진상하였다. 이 성풍목은 인환(因桓)의 물을 먹고 자라는데 그
물 맛이 달다. 그리고 붉은 제비와 누런 고니가 그 나무위에 집을 짓고 살기를 좋아한다.
성풍목의 열매는 마치 작은 진주와 같아서 바람이 불면 그 열매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와
같아 성풍목(聲風木)이라고 한다. 한무제는 대신들에게 작은 가지 하나씩을 하사하였는데 1백세에 가까운
대신들에게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의 주인이 병이 들면 나뭇가지에서 땀을 흘리고, 만약 그 주인이
죽으려 하면 나무가 스스로 꺾여 죽었다고 한다.
옛날 노자가 주나라에 2천7백 년 동안 세상에 나와 있을 때 이 나무는 땀을 흘린 적이 없었으며,
또한 홍애(洪崖) 선생이 요임금 때, 이미 3천세였는데 이 나무가 말라 죽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동방삭은 한무제에게 “신(臣) 동방삭은 이 나무가 세 번 말라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으나,
이 나무가 땀을 흘리거나 절단되어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나무는 5천년에 한 번 땀을 흘리며 1만년
에 한번 마릅니다.”라고 했다. 한무제는 이 말을 듣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방삭의 지성목(指星木)으로 혜성을 없애다
동방삭이 한번은 ‘지성목(指星木)’이라는 기이한 나무를 구해와 한무제에게 바쳤다. 이때 마침 하늘에는 혜성
(彗星)이 나타났다. 별자리를 관찰하던 관원들과 일반 백성들은 모두 이것이 세상에 괴변이 나타날 징조라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무제는 동방삭이 건내준 ‘지성목(指星木)’으로 혜성을 한 번 가리키자 그 문제의
혜성은 종적은 고사하고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졌다. 관상감의 관원과 백성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기뻐했다고 한다.
누가 나를 아는가?
동방삭은 생전에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에게 “이 한나라 천하에서 나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태왕공(太王公)뿐이며, 기타 그 누구도 나의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동방삭이 세상을 떠난 후 한무제는 이 말을 기억하고 태왕공을 불러서 “너는 동방삭의 근본을 아는가?”
물었다. 태왕공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자 한무제는 다시 묻는다.
“너는 무엇을 가장 잘하는가?” 태왕공이 답하기를 “저는 능히 하늘의 별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한무제 “그럼 지금 하늘에 별들이 모두 다 있더냐?”
태왕공은 “예전에는 하늘의 별자리에 변동이 없었는데 유독 세성(歲星:목성)만 18년 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성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한무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장탄식을 하면서 “동방삭이 내 곁에 십팔년 동안이나 있었는데
그가 세성(歲星:목성)인 것을 몰랐구나!“ 말을 끝내고 하루 종일 슬퍼하였다고 한다.
물론 세상에서 동방삭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선계(仙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각주: 홍애(洪崖)선생
청성(靑城)진인으로 상고시대의 도사였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때 ‘악관’이었다가 수도하여 신선이 되었으며
혹자는 요임금 때 이미 3천세였으며, 한나라 때에도 세상에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신선 위숙경과 종남산(終南山)
정상에서 바둑을 두면서 즐겨워하는 모습이 신선도에 나타난다.
팽 조(彭祖) 이야기
800세 장수
팽조(彭祖)는 성이 전(錢)씨이고 이름이 갱(?)이다. 전설상의 제왕인 오제 가운데 전욱 고양씨(高陽氏)의 현손
(玄孫)이며 육종(陸終)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요임금, 순임금과 하(夏)나라, 상(商)나라를 거쳐 은(殷)
나라 말기 주왕(紂王)때 이미 767세였다. 전설에 따르면 팽조는 800여 세를 살았으므로 신선이면서 중국 고대
장수(長壽)의 대명사로 알려진 특색 있는 인물이다.
팽조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어머니마저 죽어서 고아가 되었다. 홀로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면서 살았
는데 어느 때인가 오랑캐 견융(犬戎)이 중원을 침범하여 소란해지자 난리를 피하기 위해 서역으로 건너가 일백
여 년을 보낸 적도 있다.
장수비결은
팽조는 평생을 살면서 49차례나 상처(喪妻)하였고, 54명의 자식들이 먼저 죽었다고 한다. 팔백여 세, 기나긴
삶의 세월에서 불행도 많았다고나 할까? 그러면 팽조는 어떻게 팔백여 세나 살 수 있었을까? 원래 팽조는
양생의 도리(養生之道)를 매우 중요시 여겼으며, 여러 방면의 장수비결을 총괄하여 정리하였다.
그들 저작내용 중에는 현묘한 점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이치도 포함하고 있었다.
팽조는 타고난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恬靜)함을 좋아하였고 어지러운 세상의 잡다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
으며 헛된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마음을 맑게 비워두고 무위를 즐겼고, 오직 심혈을 기울여 삶을 잘 길러
오래 사는 법(養生長壽之道)을 추구하였다. 팽조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스승이 남긴
“구도(九都), 절해(節解), 지교(指敎), 은수(隱修), 사극(四極), 구령(九靈)” 등 여러 경서를 소지하고 오로지
마음을 다 기울여 읽고 연구하여 여러 가지 양생과 장수의 도리와 이치에 정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늘 수정과 운모가루, 사슴뿔(녹용)을 상복하였다고 하며 얼굴은 청춘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걸어 다니며 유람
혼자 외출하여 멀리 유람할 일이 있을 때 수레나 말이 있어도 이를 타지 않았으며 수중에는 돈이나 식량 등
어떠한 것도 휴대하지 않았다 한다.
한번 외출하면 수십일 심지어는 수백일 씩 여행하였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팽조가 어디를 갔다 오는지
종적조차 몰랐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도 의식주(衣食住)와 행동이 보통사람과 똑같아 여행 후의 피곤함이라
든지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팽조는 일상생활 중에 침묵을 지키고 말수가 적었으며 단 한번도 자신이 도술(道術)을 소지하고 있다고
자랑한 적이 없었고 어떠한 신기(神奇)하고 괴이(怪異)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팽조는 늘 가부좌하고 단정히 앉아 정신을 통일하여 숨을 가늘게 하며 기공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앉아서 숨쉬기를 하였으며 그리고 두 눈을 잘 문지르고, 신체 여러
부위를 골고루 안마하였으며, 혀로 입술을 핥고, 입안에 가득 고인 침(玉津)을 삼켰다. 두루 몸을 크게 한 번 쭉
편 후 일어나 움직였으며, 얼굴에는 노여움이 없었고 항상 빙그레 웃는 모습이었다 한다.
기(氣)를 자유자재로
팽조는 때때로 신체가 불편하거나 피로하다고 느끼면 곧 기공(氣功)을 이용하여 그 좋지 않은 부분을 소통
시켰다.
그리고 내기(內氣)를 조용히 돌려 신체 밖으로 드러난 눈, 코, 입 등 아홉 구멍에서부터 오장육부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최후에는 팔, 다리, 등, 사지와 모발까지 통하게 했다. 몸속을 흐르는 기운은 마치 가벼운 구름처럼
신체 안을 두루 돌았다. 그렇게 해서 피로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능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상(商)나라 주왕(紂王)이 찾아와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팽조가 이인(異人)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를 중시하여 대부(大夫)벼슬을 내렸으나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왕은 장수비결을 얻고 싶어서 여러 차례 몸소 팽조를 찾아와 물었다.
그는 얼버무리면서 요점을 피한 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왕은 이러한 팽조를 나무라기는커녕 도리어 많은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렸다. 수차례에 걸쳐 내린 상금이
은자 수만 냥이 되었다. 팽조는 이를 모두 받아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였을 뿐 스스로를 위해서 한 푼도 남겨놓지 않았다.
채녀(采女)를 대신 보내
주왕(紂王)은 팽조의 장수비결을 알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 도사인 채녀(采女)를 궁궐로 초빙
하였다. 그녀를 팽조에게 보내어 그 장수비결을 전수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도사 채녀는 수신양성(修身養性, 몸을 수련하고 성품을 잘 닦는 것)에 정통하여 270세나 되었으나 명공
(命功, 신체수련을 통해 수명을 연장)을 잘 닦은 덕분인지 50~60세 정도로 젊어 보였다.
주왕은 이 여도사를 위해 궁전 안에 화려한 건물을 지어주었다. 이 건물에는 정성을 다하여 정교하게 조각한
자주색 누각도 있고 어떤 건물은 금, 은, 구슬 등으로 값비싸게 장식한 것도 있었다. 채녀는 주왕의 부탁을
받고 덮개가 있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팽조가 거처하는 곳으로 갔다. 팽조를 만나자 두 번 공손히 절하였다.
팽조의 장수비결은?
팽조는 채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근기가 좋음을 간파하고 대답하였다. “몸을 가볍게 하여 하늘에 오르고자하면,
이름이 선계(仙界)에 있어야 한다.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하늘 높이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자면 금단(金丹)을 복용해야만 도가의 태일원군(太一元君)처럼 백일승천(白日昇天)할 수 있다.
나는 보고 들은 것이 천박하여 당신 채녀를 가르치기에 부족하다. 대완산(大宛山)에 가면 청정(靑精)선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듣건대 이미 천 여세라 한다. 그러나 얼굴은 어린아이와 같고, 매일 오백리 이상을 걷는다고 한다.
일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아홉 끼니를 먹을 수 있다.
청정선생은 양생법(養生之道)에 정통해 있으므로 지금 바로 가서 물어 보거라.”
이 말을 듣고 채녀가 물었다. "청정선생은 어떠한 선인(仙人)입니까?". 팽조 대답하기를 "신선(仙人)이 아니다.
청정선생은 도를 얻은 사람(得道者)이지, 결코 선인이 아니다".
나는 선인(仙人)이 싫다
팽조는 채녀에게 선인(仙人)에 대해서 한바탕 설명했다.
“소위 선인이란 몸을 우뚝 솟구쳐 구름 속에 들어갈 수 있고, 날개가 없으나 날 수 있다. 때로는 용을 타고 구름
을 탈 수 있으며, 곧바로 하늘(天宮)에 오를 수 있다. 혹은 새나 짐승으로 변해서 푸른 구름 사이에서 노닐 수도
있으며, 강이나 바다 깊이 잠수하여 놀기도 하고 비상하여 명산에 유람하기도 한다. 자연의 원기(元氣)를 먹고
약간의 지초(芝草)를 먹을 뿐이다. 혹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 몸을
은신하므로 사람들이 보아내지 못한다.
얼굴에는 기이한 골상(奇異骨相)이 드러나 있으며, 온몸에는 희한한 털이 자라고 있다.
그들 선인들은 사람이 없는 황량한 벽지에 깊이 숨어 있는 것을 좋아하고, 세속의 물결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인정을 버리고 세상의 명예를 경멸한다. 선인들은 비록 장생불사할 수 있으나 사람으로서 천성은 완전
히 잃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선인이 되기를 원치 않을 뿐이다.”
득도자(得道者)는 귀하다
이어서 팽조는 채녀에게 득도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도를 얻은 득도자(得道者)는 신선과는 다르다. 득도자는
여전히 달고 아름다운 음식을 먹으며, 가볍고 화려한 의복을 입는다. 남녀지간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벼슬의
영예를 즐긴다. 신체와 영혼이 강건하면서 용모가 윤택하고 늙어도 쇠로하지 않으며 오래도록 인간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이다. 추위 더위 바람 습기(寒暑風濕)가 능히 몸을 상할 수 없고, 귀신과 요괴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며, 질병이나 재해가 몸에 가까이 올 수 없다. 성냄과 기쁨, 비방과 칭찬(嗔喜毁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귀한 것이 아닌가?
도(道)를 알면 수명은 길어져
팽조는 채녀에게 득도자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수명에 대해 한바탕 설법을 이어갔다. 인간의 생명은 잘 보양
하기만 한다면 120세까지는 살 수 있다. 120세까지 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상해(傷害)
를 받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의 도(自然之道)를 조금 알면 능히 240세까지 살 수 있다. 도를 다소 많이 알면
능히 480세까지 살 수 있다.
만약 도(道)에 정통하다면 능히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신선이 될 수 없을 뿐이다.
수명을 잘 보양하는 법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곧 성명(性命: 타고난 천성과 수명)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팽조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쉬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겨울철에는 따뜻하게 보호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야 한다. 일년 사계절에 맞추어 조절하면 곧 신체를 편안히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미녀를 접해도 담담히
즐거움을 맛볼 뿐, 욕심에 따라 도를 넘치지 말아야 곧 정신이 원활할 수 있다. 수레와 복장도 능히 존엄을
지켜야 한다. 응당 만족할 줄 알아야 하며 끝없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뜻을 전일(專一)하게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 한도를 초과하면 비단 삶을 잘 영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재난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늘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야기를 듣던 채녀가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팽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몸을 상하고 성품을 해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머리를 과도하게 써도, 근심과 슬픔을 지나치게 해도, 너무 즐거워해도, 분노를 쌓아 놓아도,
무엇을 얻기 위해 조급해 해도, 음양의 균형을 잃어도 모두 사람을 해친다.”
달기의 유혹에 빠진 주왕
채녀는 궁궐로 돌아와 팽조에게 배운 양생법을 주왕(紂王)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주왕도 팽조의 양생법
을 실천하여 100여세 이상 오랜 수명을 누렸으나 나중에 미모의 음탕한 여인, 달기에 빠져 절제를 잃었다.
몸을 망치고 나라도 잃었다. 주왕은 팽조의 양생법이 효과가 있자 팽조의 술법이 세간에 전해지는 것을 금지
하였으며, 팽조를 몰래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팽조는 수도를 떠나 어디론지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갈 현(葛玄) 이야기
명문가 출신 신선
갈현(葛玄)은 위, 촉, 오가 천하를 다투던 삼국시대 사람으로 자(字)가 효선(孝先)이고 낭야(琅?)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했는데 고조할아버지 갈로(葛盧)는 한나라 때 표기대장군이었고 제후인 비후가 되었다.
갈로는 나중에 자기의 봉읍지를 동생인 갈문탁에게 물려주고 남쪽 강좌지역에서 유람했다.
단양지역 구용현(句容縣)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산수가 수려하고 풍속이 아직 순수하면서도 소박한
것을 발견했다. 가히 살 만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
갈현의 할아버지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벼슬을 지냈고, 아버지 갈효유(葛孝儒) 또한 상서(尙書) 벼슬을 했다.
통현(通玄) 진인이 환생하여
갈현(葛玄)은 한 환제(漢 桓帝) 연희(延禧) 7년 (164년) 4월 8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갈효유는 원래부터
도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였다고 한다. 갈현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집 근처의 현정관(玄靜觀)이라는 도관에
사람을 보내 향수(香水)를 구해오게 했다. 이 향수로 갓난아기를 목욕시켜 사악(邪惡)을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심부름하는 사람이 현정관에 가서 향수를 구하러 온 뜻을 이야기하였다. 어디서 왔는지 내력을 알 수 없는
낯선 ‘지도기(支道紀)’라는 도사가 그 근처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통현진인(通玄
眞人)이 대라천(大羅天)에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통현진인이 나에게 말하시기를 ‘너와 내가 이별한 지가 이미 일 겁(一劫)이 지났구나, 너는 설마 나를 잊어버
리지는 않았겠지?’라고 하셨다. 나는 이에 얼른 서둘러 무릎을 꿇고 제자의 예를 취했다.
진인은 계속해서 ‘너는 집에 돌아가거든 나의 이 말을 갈효유에게 전하거라. 그리고 내가 내일 그 집으로 찾아가
태어난 아이를 축하하겠다고 전하여라.’라고 했다. 머리를 조아렸다가 다시 올려보니 진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 또한 꿈속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도사 지도기(支道紀)의 축하 인사
그 다음날 도사 지도기는 아이 탄생을 축하하러 갈효유의 집을 찾았다. 방문하자마자 태어난 아이를 한 번
보자고 했다. 갈효유의 처는 얼굴에 난색을 나타내면서 아이를 보여 주지 않으려 하였으나 갈효유는 방문한
도사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서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아기를 찬찬히 살펴본 도사는 놀라면서도 기쁜 나머지 “이 아이의 몸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덮여있고 주위에는
신광이 두루 감싸면서 빛난다. 과연 대라천(大羅天)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갈효유가 “신선의 가르침은 매우 아득하고 신비하여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다만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장수하기를 바라며, 나의 갈씨 가문을 이어가기만 한다면 그저 만족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도사는 “이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다.
이 아이가 이곳에 태어나자 저 하늘 구천(九天)에서도 경하하고, 칠대 조상까지 함께 기뻐하니 당신 가문 하나만
복을 받은 게 아니다.”고 극찬했다.
이 말을 마친 도사, 지도기는 고개 숙여 작별 인사를 한 후, 대문을 나서는 순간 홀연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생이 무상하여 수련에 뜻을 두다
갈현이 8세 때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능히 자립할 수
있었다. 13세 무렵에는 고금의 경(經), 전(傳), 자(諸子), 사(史) 등 각종 전적을 두루 널리 익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하루, 우연히 그의 부친 갈효유가 남긴 글을 보자 죽은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울부짖는데 그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참 슬픔에 잠겨 있다가 울음을 그치고 스스로 탄식하면서 “산과 물은 옛날 그대로이고 터럭 하나 바뀐 것이
없는데 나의 부친은 다시 볼 수 없다. 세상에는 사람이 장생불로(長生不老)할 수 있는 도와 법이 이미 있는데,
나는 왜 수련하지 않는가?”라고 자문했다.
이때부터 갈현은 이름 있는 신령스런 산(名山靈岳)을 두루 유람하면서 기인이사(奇人異士)를 찾아 도를
물었다. 틈이 있어 한가할 때는 거문고(古琴)를 즐겨 탔으며, ‘노자, 장자‘ 등 도가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심성(心性)은 점점 더 평온하면서도 담백해져갔으며 더는 공명과 부귀를 구하지 않았다.
그가 십오륙세가 되었을 때, 그 명성이 이미 강남 일대에 퍼졌다. 벼슬이 높은 관리 한 분이 그를 찾아와
관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내가 원하는 것은 나물 먹고 갈포를 걸치고, 돌베개를 베고 샘물을 마시며
자유자재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어찌 벼슬살이를 하여 이러한 청정무위한 삶을 버리겠는가?”라고 했다.
좌원방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 갈현은 아예 도사복장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걸어서 멀리 천대(天台)의 우산(虞山)
으로 가서 일심으로 도를 추구하였다. 그곳에서 우연히 진인 *좌원방 (左元放 일명 左慈)을 만났다.
좌원방은 갈현에게 ‘구단금액선경(九丹金液仙經)‘과 기를 단련하고 형체를 보존하는 도술과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쫒는(治病驅鬼) 비법을 전수하였다.
십팔구 세 무렵 갈현의 도는 점점 깊어갔다. 이미 능히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변환과 출몰이 자유자재
였다. 곧 천태산을 떠나 동으로 가서 괄창(括蒼)일대를 유람하다가 숙부인 갈미(葛彌)를 찾아 뵈었다.
숙부 갈미는 자가 효공(孝公)이고 그 당시 괄창에서 서당을 열고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사방에서 영재들이 몰려와 경학을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문하생이 그치지 않았다.
갈현이 숙부에게 절하고 자리에 앉자 숙부 갈미는 먼저 갈현의 근황을 물었다.
그 간의 공부과정을 들은 숙부 갈미는 “너의 지기(志氣)는 고상하다. 어려움과 각종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현들마저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했구나. 매우 기특하고 존귀하다. 그러나 현재 천하정세는 위, 촉, 오
삼국이 솥의 다리처럼 정립하여 경쟁하듯 인재들을 다투어 초빙하고 있다. 보아하니 너는 이렇게 심오한 학문
을 겸비했으니 세상에 나오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너도 벼슬살이에 나아가 너의 포부를 세상에 펼쳐보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 좌원방(左元放): 동한말의 도사이며 이름은 좌자(左慈)이다. 여강(안휘)사람이며 유학 오경에 능통하였고 점성술에
뛰어났다. 조조, 유표 등이 그의 도술을 꺼려하여 여러 번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는 갈현의 스승으로 태청단경
(太淸丹經) 등 단경도서와 도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숙부와 이별하고
숙부 갈미가 조카 갈현에게 벼슬살이를 권하자 갈현은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천성이 우둔합니다.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을 닦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만 산수간에 유랑하며 저녁놀과 안개 가운데 깃들여 살며,
세상을 버린 숨은 선비와 벗하고, 산과 들의 사슴과 짝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숙부님은 오경(시, 서, 역, 예기, 춘추)을 강의하시고 널리 학술을 펴시니 세상에 시와 예술 그리고 교화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저는 단지 숙부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분이 되시고, 후학들에게 세상길에 길잡이가 되시
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숙부 갈미는 조카 갈현의 뜻이 굳어 더 만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너는 이미 평범을 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었으니(超凡入聖), 보통사람과 비할 수 없다. 이미 너의 뜻을 이렇게
굳으니 도(道)와 술(術)을 닦는 데 매진하거라. 너의 자질로 보건대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데(修成神仙)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각조산에서 수련
갈현은 숙부 갈미와 이별한 후 괄창(括蒼), 남악(南岳), 라부(羅浮)산 등 도처를 유람하면서 금단(金丹:신선도)
을 수련하기 적당한 곳을 찾았다. 수련할 만한 장소를 찾으며 옥사산(玉?山)을 지나 강서지방 청강현(淸江縣)
동쪽 각조산(閣?山)에 도착했다.
갈현이 각조산 동쪽 높은 봉우리 위에 올라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마음에 들었던지 기뻐하면서 “이 산의
형세는 다락집(閣)과 같고, 산의 색깔은 검은 듯(?)하다. 땅은 기름지고 물은 맑다.
정히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머물 만한 곳이다, 내가 금단(金丹)을 수련할 곳을 드디어 찾았다.”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신선도를 닦았다.
원혼들을 제도
갈현이 수도하던 그 당시는 위·촉·오 삼국이 천하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가뭄과 장마 등 천재
(天災) 또한 계속되었으며 백성들은 무수히 죽고, 원혼들은 고통에 빠져 윤회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는데
이를 본 수행자 갈현은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도장(道藏) 영보경고(靈寶經誥)를 다시 정리하여 “제련
대법(祭煉大法)”, “생천보록(生天寶菉)”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옥황상제(天帝)에게 아뢰었다.
그리고 법단을 만들고, 상원절(음력 정월대보름), 중원절(백중날 음력 7.15), 하원절(음력 10.15) 등 좋은 절기
가 돌아오면 사방의 원귀들을 법단 앞으로 불러 모아 설법을 들려주고 부록(符菉:부적)을 주어서 원귀들을
제도하였다.
귀왕(鬼王)이 나타나 사례
건안 19년(214) 하원절(음력 10.15) 갈현이 막 원귀들을 불러 모아 제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귀신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귀신의 키는 5장 정도이고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갈현을 보자 절을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나서 “신선이시여, 저는 하계의 원귀(寃鬼)와 굶주린 귀신들을 통솔하는 귀왕(鬼王)입니다. 제가 통솔
하는 원귀와 굶주린 귀신들은 모두 악도에 빠져 곤경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갈 신선께서 법단을 만들어
이들을 널리 제도하고 또 부적을 내려주어 수백만 무리를 구제하셨습니다. 저는 갈 신선의 깊으신 은혜에 감격
하여 이렇게 특별히 나타나 사례 인사를 드립니니다.
하늘의 북방현천상제(北方玄天上帝)께서 갈 신선께 조서를 내리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갈 신선이 원혼들을 여러 해, 제도하여 그 공덕이 깊고 두터우며 이미 이름이 신선들의
기록인 금간(金簡)에 올랐습니다. 5년 후에 조서를 내려 하늘나라 조정에 참여하도록 관작을 내린다고 합니다.”
말을 마친 후 귀왕(鬼王)은 사라졌다.
갈현이 죽은 원귀들을 제도하면서 세상을 살펴보니,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정(情)과 욕심에 끌려 죄업이
날로 깊어짐을 보고는 살아있는 사람을 제도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상청(上淸), 영보(靈寶) 등 많은 진경(眞經)을 총괄하고 그 중, 요점을 정리해 ‘자비도장구유대참법’
(慈悲道場九幽大懺法) 한 부를 저술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이때 갈현은 진인 좌원방(左元放)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하여 몸은 이미 자유자재로 변하고 영감으로 신령과
통하는 법술을 갖추었다.
입에서 불을 토해내 손님을 따뜻하게
일찍이 손님 한 사람이 갈현을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손님이 우연히 밖을 보니 자기를
영접한 갈현이 다른 손님을 맞이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실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광경에 놀란 그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갈현은 분명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에 실내에 들어온
두 번째 손님도 자기를 맞이한 갈현과 똑 같은 사람이 대청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손님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 두 명의 갈현이 하나로 합쳐져 한 사람의 갈현으로 되었다.
갈현과 손님 두 사람이 만나 담소하던 그 날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갈현은 갑자기 “집이 몹시 누추하여,
따로 화로가 없습니다. 두 분께서는 매우 추우시겠습니다. 제가 불을 좀 피워 따뜻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벌려 뜨거운 불을 토해냈다. 잠시 후 집안은 마치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갈현은 술좌석을 만들어 손님들을 대접했다. 술잔에 술을 따르면 자동으로 손님에게 날아
갔고 그 술잔을 받아 술을 마시고 나면 빈 잔이 술 호로병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또 한 번은 손님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갈현에게 기묘한 도술을 한번 보여 달라고 졸랐다.
갈현은 한 입 밥을 물었다가 토해냈다. 그러자 그 밥알들이 수백 마리 큰 벌로 변해서 손님 주변을 윙윙거리면
서 날아다녔으나 사람을 쏘지는 않았다. 한 참 지난 후 갈현이 입을 벌리자 그 수백 마리 벌들이 입안으로 날아
들어갔으며 곧 모두 밥알로 변했다. 그 당시 갈현을 찾아왔던 손님들이 체험한 신기한 도술들은 그야말로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부적으로 사당을 불사르다
한 번은 갈현이 수레를 타고 외출하였다. 어느 사당(神廟) 앞을 지나가는데 한 나그네가 갈현에게 말했다. “
무릇 이 사당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백보 밖에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하며 이 사당을 통과해서
백보를 걷고 난 후에 수레나 말을 타야 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앙을 당한다.”라고 경고했다.
갈현은 그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갈현이 탄 마차가 사당을 통과하는데 큰
바람이 갑자기 몰려오고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자 수행하던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갈현은 크게
노하여 “이 사악한 귀신이 어찌 이리도 대담한가?”
일갈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자 순간 큰 바람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부록(符菉) 한 부를 꺼내 사당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벽력 같은 소리가 나면서 그 사당은 불에 타서 사라졌다.
뱀이 변한 요녀
갈현이 어느 날 화양(華陽) 지방을 경유하다가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수레를 세우고 가던 길을
멈췄다. 수행원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변신술을 사용하여 ‘밭가는 소를 끄는 농부’로 변신했다.
그때 그 숲속에는 선비 한 사람이 산보하고 있었다.
농부로 변신한 갈현은 그 선비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젊은 선비 당신은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에 머무르며 떠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 젊은 선비가 머뭇거리면서 제대로 대답
하지 못하자, 갈현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곳을 꿈에서 바라던 곳(溫柔鄕)이라 여겨 차마 떠나지 못하는가?”
라고 했다.
이어서 갈현은 정색하고서 “내가 당신에게 알려 주겠다. 당신 젊은 선비를 유혹하여 꼬드긴 그 미인은 사실
요망한 뱀의 화신이다. 최근 그 요망한 뱀에게 잡아먹힌 나그네가 이미 셀 수 없이 많다. 당신이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그 미인이 사는 집 뒤편의 마른 우물을 한번 살펴보고, 다시 그 여자 집 문 밖에서 집안을 몰래 엿
보아라.”라고 알려 주었다.
그 선비는 갈현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숲속의 그 여자 집 뒤로 돌아갔다. 집 뒤편의 마른 우물 안을 내려다
보니 말 그대로 백골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또 문틈을 통해 집안을 살펴보니 침상위에는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 선비가 줄행랑을 치자, 그 커다란 뱀이 그를 쫒아왔다. 바야흐로 큰 뱀이 혀를 널름거리면서 그
선비를 막 집어삼키려고 할 때 갈현이 나타났다. 그는 “이 요괴가 심히 대담하구나!”하면서 크게 사자후를
한번 토했다. 그 큰 뱀은 그 한 소리에 깜짝 놀라 순간 몸이 뻣뻣해졌다. 바로 그때 갈현이 칼을 날려 뱀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어 그 젊은 선비에게 먹으라 하였다. 선비가 부적을 먹더니
갑자기 입안에서 지렁이, 개구리, 두꺼비 등을 토해냈다. 갈현 덕분에 그 젊은 선비는 목숨을 부지하였다.
신발을 선물한 자매(姉妹)
갈현은 일찍이 형문(荊門)지역 자개산(紫盖山) 속 깊은 산골에서 수련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바야흐로 땅도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인데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 추위 속에 갈현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에 옷
또한 헤져 맨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웃에 굴(屈)씨 성의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성품이 착한 자매는 이를 보고 차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어서
밤을 꼬박 새워 신발을 만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녀들은 갈현에게 신발을 전하러 갔는데 갈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만 책상 위에는 금단(金丹) 한 알이 놓여 있었다. 그녀들은 이 단약을 나눠 먹은 후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름도
없어졌다. 고요함을 좋아하고 번거로움을 피하여 나중에 두 자매는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어 다시 나오지 않았
다고 한다.
갈현에 대한 이런 일화들이 사천(四川) 지방에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잊혀지고 지금은 극소수의 일화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오나라 손권의 초청
갈현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남쪽 오나라 손권도 이를 알게 되었다. 손권은 갈현을 오나라 수도, 건업
(建業)으로 초청해서 빈객의 예에 따라 대접하였다.
하루는 손권과 갈현이 높은 누각에 올라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멀리 눈길이 닿는 곳에 한 무리 사람들이
토지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손권은 백성들의 기우제(祈雨祭) 현장을 가리키면서 갈현에게 “갈선생님! 저기 백성들이 가뭄이 오래되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선생께서 저들을 위해 비가 오도록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하며 요청했다.
이에 갈현은 흔쾌히 대답하면서 그 자리에서 부적 하나를 썼다. 사람들에게 부적을 주면서 토지신 사당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부적을 막 불사르고 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뇌성이 치기 시작하면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다.
천지가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워지더니 물을 퍼붓듯이 큰 비가 내렸다. 장대같은 빗줄기가 목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자 말라 비틀어졌던 벼이삭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파도를 밟으며 걸어와
어느 날 손권과 갈현은 함께 양자강에서 작은 배로 나누어 타고 유람을 하였다. 무리지어 움직이는 배가 강
중류쯤 닿았을 때,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쳐 왔다. 거대한 파도가 일면서 많은 배를 뒤집어 버렸다.
갈현이 탄 작은 배도 실종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뜻하지 않은 풍랑에 이렇게 도술이 정심한 선인도 수장되는 재앙을 면할 수 없단
말인가?”하며 탄식했다. 그는 풍랑에 무사한 배들을 강가로 집결시켜 정박하고, 사람들을 시켜 갈현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첫날 하루 종일 찾았으나 성과가이 없었다. 그 다음날 손권이 갈현을 찾아보려고 막 배를 타고 사방을 살펴
보고 있는데, 돌연 갈현이 앞쪽 강위에서 파도를 밟으면서 손권이 탄 배로 걸어오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듯 얼굴색이 불그레한 갈현이 손권에게 미안한 듯이 “어제는 전국시대 장군인 오자서(伍子胥)
가 저를 초청해서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께서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누추한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사오니 정말 송구할 뿐입니다!”
이에 손권은 살아있는 갈현을 보자 기뻐하며 “선생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저는 기쁠 뿐입니다. 신령(오자서)의
초청을 받아 함께 술을 마셨다니 선생의 도덕(道德)이 높아서가 아니겠습니까?”
오나라 손권은 여러 차례 갈현의 신묘한 법술을 보고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일었다. 이에 손권은 어느
하루 좋은 날을 택해 목욕재계하고 향을 사른 후, 갈현을 궁궐로 초대하였다. 그리고 성의를 다하여 간절히 도(道)
를 물었다.
“저는 타고난 천품이 어리석고 어둡습니다. 대도의 심오한 이치(大法玄深之至理)를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신선에
관한 가르침(修仙)을 듣고자 하오니, 선생께서는 저에게 수련하여 신선이 되는(修煉成仙) 첩경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갈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권에게 답했다. “폐하께서 물으시니, 제가 어찌 신선술에 관해 숨길 수
있겠습니까?”
대도(大道)와 가까우려면
오나라 손권이 갈현에게 신선술에 관해 간곡히 묻자, “‘진(眞)’을 수련해서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修眞求仙)은 한
나라의 임금이 취미로 삼을 일이 아닙니다. 폐하는 나라의 임금으로서 우선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책무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매일 모든 정사(政事)를 처리한 후에도 마음이 맑고 욕심을 적게 할 수 있다면 대도(大道)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타고난 운명 때문에 임금이 되어 번거롭고도 겉만 번지르한 것에 빠져
있는데 다행히 선생을 만났습니다. 선생에게서 지극히 이치에 맞고 가치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땅히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궁궐을 떠나 와운암에서
가화(嘉禾) 2년(232) 정월 초하루, 갈현은 제자들과 마주앉아 담소하다가 세월이 덧없음을 탄식했다.
“폐하(오나라 손권)의 요청으로 한동안 성안에 머물렀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백발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깨닫지 못했다. 공덕(功德)을 비록 쌓았다고 하나 아직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이루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곳에서 세월을 허송할 수 없다.”하며 결심을 굳히고 손권에게 이별을 고했다.
예전에 수도하던 강서지방 각조산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각조산 동쪽 봉우리에 도관을 세웠는데
이것이 ‘와운암’(臥雲庵)이다. 와운암 내에 법단을 세우고 조왕신을 모셨다. 일체 찾아오는 손님을 사절하였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구전금단(九轉金丹)을 수련했다. 와운암이 있는 산골짜기는 항상 상서로운 기운과 맑은
빛이 비쳤다고 전한다.
수련한 지 3년이 지나 갈현은 금단(金丹)을 이루었다. 그가 집 앞에 있는 연못인 ‘금사지’(金砂池)에서 금단을
씻는데 연못물이 돌연 용솟음치면서 끓어올랐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 금단은 화성(火性)이 너무 왕성하여 지금 곧 복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제단을 만들었다.
천지에 감사를 드리며 금단을 각조산 동쪽 절벽에 있는 석실에 보관했다. 나중에 천천히 금단을 복용하기로
했다.
지금도 각조산 동쪽 봉우리에 있는 ‘금사지’(金砂池)의 연못물은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다고 하며, 연못 밑의
금모래도 솟구쳐 오르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갈현이 금단을 씻으면서 남겨놓은 신비한 자취라고 전한다.
선약(仙藥)을 먹은 새가
갈현이 금단을 단련할 때 각조산 서쪽 봉우리 석벽 위에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돌절구(石臼)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이 절구를 이용해서 선약(仙藥)을 제조했다. 이 절구에는 선약을 찧다가 남은 찌꺼기가 조금 있었다.
이곳을 날아가던 새 한 마리가 우연히 그 남은 선약을 쪼아 먹고는 이때부터 이 새는 장생불사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곳에는 달이 밝고 청명한 밤이 되면 선약을 먹은 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새의
울음이 마치 돌절구에 약을 찧을 때 나는 절구질하는 소리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이 새를 ‘약
찧는 새’(搗藥鳥)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