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의 궁술- 신사가 배우는 차례
온깍지궁사회 현곡(顯鵠)
이번 장에서는 '발자세'에 관한 조선의 궁술의 설명 중에 잠시 곁가지 얘기를 합니다.
조선의 궁술의 ‘신사가 배우는 차례’(新射入門之堦)(堦는 階와 同字, 계단)는 처음 활터에 올라온 신사가 활을 내는 방법부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우궁을 물론하고 두 발을 팔자로 벌려딛되, 관혁과 좌우의 아래 끝을 정면으로 향하여 딛고....’로 시작하여 ‘위에 말한 여러 가지를 활힘(弓力)이 실하게 생길 때까지 이 법으로 익히고 배워야할 것이니라’로 이어집니다. 이 안에는 여덟 팔자로 서기, 줌손을 이마 높이로 들기, 각지손 높이 끌기, 과녁 겨냥하기, 턱을 겨드랑이 아래로 묻기 등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과녁을 준적(과녁을 겨냥함, 準的)하기를 설명할 때, 활 아래 양냥고자가 관혁과 수평선이 되게 보라고 하며, 또 턱을 겨드랑이 아래로 묻으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해보면 요즘보다 대단히 표를 높게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활로는 아무리 40호 정도의 약한 활이라고 하더라고 표를 볼 때 줌통 아래나 기껏해야 대림끝 정도로 흔히 과녁을 겨냥합니다. 또한 턱을 왼쪽 ‘죽머리’에 가까이 붙입니다. 턱을 ‘겨드랑이 아래로' 묻을 정도로 줌손을 높이 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궁력이 길러지지 않은 신사의 과녁 겨냥하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는 해도, 요즘과는 너무 달라서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궁'으로 활을 배우게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첫째는 화살촉이 오늘날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영집궁시박물관의 유세현씨에게서 화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화살의 무게를 말할 때 화살대와 촉 무게를 합하여 계산하는 것은 같답니다. 다만 당시에 화살 촉은 무거운 내촉과 외촉이 있었으므로 전체적인 무게의 배분이 오늘날과는 달랐답니다. 오늘날보다 과거 화살의 무게 중심이 앞에 있었답니다. 무게 중심이 앞에 있으면 관중할 때의 파괴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지지만 비거리는 짧아진답니다. 즉, 오늘날은 무게 중심이 뒤로 왔기 때문에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더 멀리 날아가는 화살을 쓰는 셈입니다. 옛날 촉을 사용했던 구사의 말을 들어보면 '화살을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둘째로 화살 무게를 생각해봐야하는데, 무과급제 때 화살의 규정된 무게가 8돈이었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아 오늘날보다 무거운 화살을 쓰는 추세였다는 것(온깍지궁사회 논문집6, 2007. 죽시의 변천에 관한 소고-유세현)도 감안해야합니다. 활에 비해 가벼운 화살을 쓰는 요즘의 추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당시의 이상적인 궁체입니다. ‘조선의 궁술’은 처음 활 배울때 줌손을 함부로 낮추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활힘이 실하게 생길 때까지 이 법으로 익히고 배워야할 것 이니라’라는 구절을 음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활병은 대개 줌손을 낮추어 표를 낮게 보려고 하다가 생깁니다. 뒷손이 충실하지 않는 상태에서 줌손을 쉽게 낮추다가는 죽이 빠져나가기 쉽습니다. 죽머리가 빠져나가면 활병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양냥고자’를 과녁에 겨냥하는 당시 신사의 자세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발견되는 일부 옛날 사진이 거의 하늘을 향해 활을 쏘는 것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