識은 연기된 것이다. 연기란 반드시 前法의 조건과 원인이 있어야 (後法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識의 전법은? 意다. 그러면 意도 연기된 것으로 무엇으로부터 인가? 당연 心이다.
身體도 사실 상 연기되어 생겨난 것인데 이 身體에 들어와 心이 작용 할 때 개념상으로 意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모든 개념은 인간의 이해과정을 돕기위해 생성된 것일 뿐이므로 개념에 끌려 다니지 말자.
제목의 '④번 識'과 '⑤번 識' 이라는 말은 불교의 경전 인 '중경(Majjhesutta)'에 나오는 것으로서, 中(間)經은 초기 불교 경전인 증지부(앙굿따라 니까야, AN 6.61)에 수록된 경전, 이 경전은 여러 원로 비구들이 모여 부처님의 시(詩) 구절인 "양극단을 알고 중간에 달라붙지 않는 자..."의 의미를 해석하고 토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경전의 중요한 구절에 "양극단을 알고서 중간(majjhe)에 오염되지 않는 자,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 부르며 그는 이곳에서 바느질꾼(갈애)을 넘어섰다." 라는 부분이 있고, 그 '中'의 예를 6가지로 들고 있는데 그 중에서 4번째와 5번째에 '識'이 언급된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으로도 경전을 찿아 볼 수 있음)
④번 識은 '12연기'에서 3번째 연결고리이고, ⑤번 識은 소위 '육육연기'에 등장하는 6識에서의 識이다.
그래서, 12연기와 육육연기의 상호 관계에서, 識이 각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이해 해 보고자 함이다.
붓다께서 깨달음에 드시고 가르침을 시작 하실 때의 상황이나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때의 상황을 기준으로 경전을 이해 해야만 바른 이해가 올 것이다. 즉 붓다의 통찰이 시작되는 장소가 바로 이 身이 성립하고 난 이후부터라는 것. 따라서 身에는 육내입처(안이비설신의)와 육외입처(색성향미촉법)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것.
④번 識’에 의하여, ‘육내입처’가 Dhātu(界)로 전환되고 (내입처계열의 ‘觸’), ‘④번 識’에 의하여, ‘육외입처’가 Dhātu(界)로 전환되고 (외입처계열의 ‘觸’), ‘④번 識’에 의하여, ‘⑤번 識’이 Dhātu(界)로 전환 된다는 점을 이해 하겠는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조건으로 ‘⑤번 識’이 생겨난다는 경문은 있지만 우리는 <왜? 생겨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힌트는 ‘육내입처’가 <첫 번째 ‘극단’>이고, ‘육외입처’가 <두 번째 ‘극단’>이며 ‘⑤번 識’이 <majjhe(中)>이다 라는 경문이 있다.
身에 내재한 <탐, 진, 치>에서 연기되는 <탐, 진, 邪見>의 ‘邪見’이 바로 ‘극단’과 관련이 깊은 見(“사견을 가져서 극단을 취하는 見解를 고루 가졌다.” .... 라는 디가니까야 3권 98페이지)이고, <탐, 진, 正見>의 ‘正見’이 ‘majjhe(中)’과 관련이 깊은 見(diṭṭhi)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 하여야 한다. 나아가 그러한 見(diṭṭhi)들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와 ‘⑤번 識’>이 모두 Dhātu(界)로 전환되어야 만, 그러한 Dhātu(界)들을 조건으로 (세부적인 subjective) 種種의 ‘Dhātu(界)들’을 꿰뚫어 알 수 있게 되는데 그 곳이 四禪이다.
반면 <탐, 진, 치(moha)>에서의 ‘치(moha)’는 ‘올바르지 않은 作意’라고 지적되므로 “作意의 集이 法의 集.”처럼 Āyatana(處)에서 ‘意의 작용(=作意)'에 따라 法이 따라서 변화하는 것. 그러할 때 <Āyatana(處) 자체가 Dhātu(界)로 바뀌는 점>인데, 가장 빠른 이해방법은.........
Ⓐ 心과 Āyatana(處)의 관계, Ⓑ 心과 Dhātu(界)의 관계에서 보면 Āyatana(處)고 Dhātu(界)고 간에 모두 心의 입장에서 보면 法(dhamma)이다.
Ⓐ 心과 Āyatana(處)의 관계 라는 것이 바로 <心과 ‘육내입처라는 Āyatana(處)’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으로 그 관계 가운데 <意(處)와 法(處)라는 관계>에서 ‘意의 작용(=作意)’에 따라 法이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心의 고짜라이며 위사야인 法(dhamma)’이 ‘육내입처라는 Āyatana(處)’로 바뀐 것이라는 말씀. (어떻게? 라고 물으면 身行, 語行, 心行 때문이라고).
낑수까經을 보면, ‘육내입처’를 ‘여섯 가지의 문(門)’이라고 비유하며 心이 들락거리는 門에 비유되는 것이 <Āyatana(處)라는 法門>이다. (意라는 것이 <意라고 부르는 ‘法門’>이라는 지적)
Ⓑ 心과 Dhātu(界)의 관계를 보면, <意라는 Āyatana(處)를 識이 분별하여 Dhātu(界)로 바꾸는 것인데, 心行이라고 부르는 이 ‘行’ 때문에 意行이 연기되는 것인데, ‘行’의 기능이 없는 ‘識’을 연기시켜서 생겨나는 것이 18Dhātu(界)이다.
‘④번 識’에 의하여, ‘⑤번 識’이 Dhātu(界)로 전환 되고는 뭔가? 이는 '육육연기'에서의 <육촉입처>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면 드러난다.
<육촉입처>는 3사화합 '촉' 이전의 상황 (즉 단수형 인 '육입')
'⑤번 識'은 <相(nimitta)을 쫒아서 '밖으로(바히다) 흩어진' 識>이라는 점. .또한 '⑤번 識'은 <'六識'이듯이 여섯개나 되는 識>. 단수형이었던 '六入'이 어떻게 '여섯'을 의미하는 <육내입처>로 전환되는 것인가?
이는 ④번 識이 '육입'을 <'육내입처'라는 處> 즉 '여섯'을 의미하는 <處>로 분별(?)하는 것. 意(mano)차원의 '六入'을 ④번 識이 '육입'을 <'육내입처'라는 處> 즉 '여섯'을 의미하는 <處>로 분별(?)하는 것이다.
相(nimitta)을 제공하는 '명색'을 실재와 동일시 하는 착각, 그래서 '實在'라는 것을 붓다는 인정하지 않는다. '觸'을 근거로 實在라고 집착하는 것 뿐이라는 것. (有對 만 있다는 것)
사실은 有對觸에 불과한 것인데 <현실이다. 사건이다. 있다(有). 없다(無) 등등 '위딱카와 위짜라' 하면서......... 이 같은 중생계.
'⑤번 識'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육촉입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⑤번 識'. 이 <육촉입처>가 갈림길 (= 정정진 : 善法의 증장을 위하여 선법을 택하는 택법각지) 핵심은 선법으로 향하는 방향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