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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16년 12월 10일 (토)
o 날씨: 맑음
o 산행경로: 동문 - 산성입구 - 대륙봉 - 남문 - 상계봉 - 파리봉 - 서문 - 장골봉 - 미륵사 - 고당봉 - 북문 - 원효봉 - 의상봉 - 동문
o 산행거리: 19.8km
o 소요시간: 7시간 20분
o 지역: 부산
o 산행정보: 금정산
o 일행: 나홀로
▼ 등산지도
부산에서 가족모임이 있었는데 시간을 할애하여 금정산을 찾았다. 학창시절에는 학교 바로 위에 있는 산성으로 친구들과 함께 간혹 막걸리를 찾아오곤 했지만 금정산 산행을 나선 것은 난생 처음이다. 오늘코스는 4대 성문 종주로, 동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남문, 서문, 고당봉과 북문을 돌아 원점회귀할 계획이다. 아침일찍 택시를 타고 동문에서 하차, 30년만의 추억을 찾아 출발...
▼ 금정산성 동문 입구 (들머리)
금정산성 동문입구에서 잠깐이면 금정산성 성곽이 보이고 큼직한 동문이 나타난다. 동문을 지나 내려가면 금성동 마을이다. 멀리 고당봉이 햇빛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금정산성 동문 (들머리)
[금정산성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잘록한 허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동래읍성에서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1807년(순조7)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홍예문식(무지개 형태)으로 문쪽은 300cm, 홍예의 높이는 340cm이다. 동래부사 정현덕(재임 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안내판)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걸어가면 곧 산성입구에 닿는다. 입을 크게 벌린 암문 아래로 차량들이 드나들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금정산성 4대 성문 종주는 보통 이곳 산성고개나 맞은편 서문을 들머리로 한다고 한다.
▼ 산성입구 (동문에서 0.6km)
산성고개를 지나면서 등산로도 오르막을 타기 시작한다. 등산로는 성곽에서 약간 벗어나 바위길과 나무계단을 지나 대륙봉으로 향한다. 대륙봉에서 발아래로 보이는 동래구와 멀리 부산해운대의 고층빌딩숲은 태양에 가려 뿌옇기만 하다. 방향을 돌리면 맞은편의 상계봉과 파리봉은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다.
▼ 대륙봉 (동문에서 1.5km, 산성고개에서 0.9km)
▼ 대륙봉에서 바라본 망미봉(왼쪽), 상계봉(중간 좌측), 파리봉(우측)
대륙봉에서 제2망루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가벼운 산책로의 느낌이다. 제2망루 부근에서 등산로는 '금정산 역사탐방로'와 만난다. 이 구간에서는 성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산아래로 떨어지는 절벽이 성벽을 대신하는 것인지, 성벽이 등산로와 떨어져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제2망루에서는 멀리 고당봉에서 이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중간중간 성벽이 보인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산의 윤곽이 한층 선명하다. 제2망루 지점이 동제봉이다.
▼ 제2망루 (대륙봉에서 0.7km)
▼ 제2망루에서 바라본 고당봉(맨뒤)과 원효봉~의상봉~제3망루~동문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제2망루에서 남문까지는 다시 성벽을 따라 간다. 잘 정비된 성벽은 남한산성의 느낌이 전해진다. 성벽을 따라가던 눈을 들면 망미봉과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물개모습(?)의 바위가 보인다.
▼ 금정산성 남문 (제2망루에서 0.3km)
[금정산성 남문] 남문에서는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그리고 금강공원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 종점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깍아내어 메고 끌고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萬)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남문은 평거식문으로 문의 상부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익공계 팔작지붕의 단층문루이며, 문폭은 290cm, 높이는 280cm이다. (안내판)
▼ 망미봉(왼쪽)과 물개바위(?)
남문에서 망미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나무데크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망미봉 정상에서 아침 태양의 기운을 받으며 수련중인 구도자(?)들의 모습이 엄숙하다. 망미봉에는 별다른 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파리봉~고당봉~동문으로 이어지는 금정산 반북에서 동문까지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망미봉을 내려서면 헬기장을 지난다. 해가 중천으로 솟아 오르면서 햇빛에 가려져 있던 해운대의 고층빌딩숲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진행방향으로는 기암괴석들이 알알이 박혀있는 상계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남해 금산의 기암괴석群을 보는 듯하다. 상계봉은 파리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약간 우측으로 벗어나 있다.
▼ 진행방향으로 바라본 상계봉
상계봉 봉우리에 뽀족하게 솟은 왕관바위(?)는 관악산의 그것과 닮았다. 왕관바위를 불꽃바위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상계봉에서는 사방의 조망이 시원하다. 남쪽으로는 백양산과 구덕산이,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김해평야가, 북쪽으로는 고당봉과 멀리 500km를 굽이치며 흘러온 낙동강이 가슴을 뚫어준다.
▼ 상계봉 왕관바위(?)
▼ 상계봉에서 바라본 고당봉 (중간 좌측)
▼ 상계봉(남문에서 1.4km) 정상부 모습
▼ 상계봉에서 바라본 김해 방향
▼ 상계봉에서 바라본 구포시가지(아래)와 낙동강하구 방향
멀리 해운대의 고층빌딩 숲은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흡수하고 또 반사하여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곳이 대한민국 최고의 금싸라기 지역' 임을 알려주듯이...
▼ 상계봉에서 바라본 백양산(중간 우측)과 구덕산(백양산 맨뒤)
상계봉에서 걸음을 되돌려 파리봉으로 향한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제1망루 지점이다.
▼ 제1망루 (상계봉에서 0.4km)
제1망루를 지나면 약간의 내리막길이 파리봉으로 미끄러진다. 파리봉을 앞두고 바라보는 파리봉과 전망대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금정산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파리봉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암봉이다. 아래에서 보면 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진행방향으로 바라본 파리봉(앞)과 고당봉(왼쪽 뒤)
▼ 파리봉 (제1망루에서 0.8km)
▼ 파리봉에서 바라본 김해방향
▼ 파리봉에서 바라본 고당봉(왼쪽 뒤)
▼ 파리봉에서 바라본 암릉과 금성마을
[금성마을과 국청사 전설] 옛날에 국(鞠)시와 두(杜)씨 성을 가진 두 가족이 금성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술 제조업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들이 몰려와 이마을 주민 모두를 납치하여 가서 한동안 마을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때 기장 철마에 살던 힘이 좋기로 소문난 김 장사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다. 그는 한꺼번에 수십명의 장정들을 상대로 힘 겨루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고, 혼자서 판 한섬을 지고 오기고 했다. 더구나 그는 호랑이가 뒤에서 잡아 당겨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의 김 장사도 처음 국청사 자리에 거주지를 마련했다가 밤마다 전쟁중에 죽어간 이들의 신음소리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무서워 다른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국청사가 세워진 뒤에는 그 오열이 여전히 들렸으나 스님들이 자장보살 보원삼층탑을 세우고 떠도는 넋들을 극락세계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청정한 기도도량이 됐다 한다. (안내판)
▼ 파리봉 암릉 모습
▼ 파리봉 암릉에서 바라본 고당봉
파리봉 암릉 아래에 갈림길이 있다. 왼쪽 화명동 방향도 화명수목원을 거쳐 고당봉으로 올라갈수 있지만 선답자들의 발걸음를 따라 우측으로 방향을 잡되, 중간에 좌틀하여 가나안수양관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정표도 드물거나 헷갈리기도 하지만 중간 중간 보이는 허물어진(?) 성벽을 나침판 삼아 따라가면 된다.
방향성에 유의하며 등산로를 내려오면 가나안수양관이 있는 임도를 만난다. 이정표는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 약 2.5km를 가면 서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금성동 마을을 지나는 도로(산성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성벽을 따라가는 등산로는 임도에서 곧장 직진해야 한다. 이정표는 없지만 입구의 나무에 등산리본이 달려있다.
▼ 가나안수양관 지점 (파리봉에서 약 0.8km)
▼ 뒤돌아본 파리봉
임도에서 직진하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이는 등산로를 따라가야 한다. 간혹 보이는 등산리본과 무너진 성벽이 조타수 역할을 해준다. 인기척은 물론 어느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오직 나그네의 발걸음에 밟힌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만 뒤를 따라 온다.
이렇게 약 1.1km의 숲속을 헤쳐 나오면 화명동과 금성동 마을을 연결해주는 '산성로'를 만난다. 산성로를 가로질러 내려가면 금정산성 서문이다. 서문은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 산성로
▼ 금정산성 서문
[금정산성 서문] 금정산상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이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모양으로 조성한 성곽의 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낙동강과 구포, 김해방면으로 왕래한 성문이다. 서문은 홍예식문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 건물이며, 좌우에는 폭4m, 길이5m, 높이5m 규모의 적대와 여장이 복원되어 있다. 서문 북측 대천천의 수문은 교량식 홍예형으로 폭이 약 250cm, 높이 약 300cm 규모의 수구 (폭 약 230cm) 3개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수 있다.
서문에서 대천천을 지나 성벽을 따라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분명 등산로는 있지만 사람의 왕래는 많지 않은 모습이다. 잡풀과 잡목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게다가 제법 가파를 오르막길이라 발걸음이 쉽지 않다. 이렇게 0.6km를 올라가면 우측으로 몇몇 가옥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좌틀하여 '부산광역시 학생교육원' 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 독립가옥 부근에서 서쪽으로 좌회전....
등산로는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등산리본과 무너져 가는 성벽을 참고하면서 '학생교육원'의 방향에 유념하면 큰 문제는 없다. 이렇게 약 0.6km를 가면 나무와 수풀사이로 '학생교육원'이 보인다. 등산로는 그앞에 있는 성벽을 따라 장골봉으로 올라간다.
▼ 부산광역시 학생교육원
장골봉으로 이어지는 '학생교육원' 뒷편의 등산로에는 교육코스 시그널이 많이 메달려 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율리역'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며,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우측에 전망이 좋은 너럭바위(전망포인트)가 있다.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보니 파리봉에서 이곳까지의 경로가 눈에 들어온다. 크게 보면 별것 아닌것 같은데, 그 속에 들어가면 미로가 된다....
▼ 너럭바위(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학생교육원'(왼쪽)과 서문(우측 화명수목원 위쪽)
너럭바위에서 몇걸음 못간 지점이 물리재석문의 발굴조사 작업 현장이다. 이곳이 장골봉이며, 이정표나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 물리재석문
작은 암문을 지나고 등산로는 고당봉을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혀간다. 등산로 주변으로 큰 암석도 보이지만 대부분 전나무나 소나무 숲길이다. 마른가지가 어지럽다. 얼마 못가 제2금샘을 만난다. 제2금샘은 등산로 우측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야 볼 수 있다.
▼ 제2금샘
제2금샘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의 등산로가 이어진다. 등산로 옆 암석 위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마치 분재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너럭바위에서 약 3.6km 정도 올라오면 미륵사 갈림길이다. 좌측으로 가면 고당봉으로 직접 이어지며, 직진하면 미륵사 방향이다. 미륵사에서도 고당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기 때문에 미륵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통일신라 때인 678년(문무왕 18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미륵사는 대사가 호리병 5개로 신통력을 발휘, 왜구 5만 명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 미륵사
[미륵사] 금정산 미륵봉(712m)을 병풍처럼 두른 아래 바위굴 속 연못에 그 옛날 이무기가 살다가 용으로 승천하였는데 바로 그 곳에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678년)하고 미륵암이라 이름하였는데, 미륵암이란 염화전 법당 뒤 암봉이 마치 화관을 쓴 미륵불처럼 생겨서 사람들에게 신령한 기운을 준다고 하는데서 이름 지어졌다 한다. 암봉을 자세히 보면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7개가 있는데 코끼리는 상서로운 동물이어서 마음이 맑아야 다 보인다고 한다. 대웅전인 염화전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의 규모이며, 법당 내무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양쪽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가운데 후불탱과 양쪽으로 신중탱과 지장탱이 모셔져 있다. 노적가리 바위가 산문 대신 염화전 좌우쪽에 자리잡고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양식 걱정은 없도록 하고 절대 굶어 죽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법당 옆 산신각으로 오르는 왼쪽에 용굴 구멍에서 쌀이 매일 한 되씩 나왔는데 하루는 사미승이 쌀을 더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 막대기로 구멍을 쑤신 후부터는 쌀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독성각 뒤 바위면에는 원효대사께서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이 남아 있으며, 호로병 5개로 왜적 5만을 물리쳤다는 전설과 왜적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미륵불 바위가 독성각 오른쪽에 서있다. (안내판)
미륵사 왼쪽 뒤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미륵봉이다. 미륵봉은 염화전 법당 뒤의 암봉이며 상단부는 제법 널찍하다. 이곳에서도 사방의 조망이 좋다. 어느듯 고당봉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미륵봉에도 정상석이나 별다른 표식이 보이지 않는다.
▼ 미륵봉에서 바라본 고당봉
▼ 미륵봉에서 바라본 북문(중간 왼쪽)과 원효봉(우측)
한 걸음 옮길때마다 고당봉은 큰 걸음으로 다가온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아침의 쌀쌀했던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해졌다. 등산로 옆에 핀 진달래가 계절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얼었던 등산로도 풀리면서 질퍽해져 정말 초봄이 온 느낌이다.
고당봉에는 이미 많은 산객들이 정상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하단부에서 정상까지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험한 암릉을 비교적 쉽게 올라갈 수 있다. 고당봉 아래에는 고모당이 소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하는 고모당에서 만성이 되고 있는 내 비염이 없어지길 빌어보고...
▼ 고모당
[고모당(姑母堂)]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에 밀양 사림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박씨는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범어사의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신명을 바쳤다. 어느듯 나이가 든 이 보살은 주지스님께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 아래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당집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주면 범어사의 수호신이 되어 절을 돕고 지키겠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주지스님께서는 박씨의 유연대로 박씨 사후에 고당봉에 고모당을 지어 1년에 두번(음력 1.15, 5.5)씩 고모제를 지냈는데 이후 범어사는 화엄 비보사찰로 사찰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병원에서 못 고치는 마음의 병도 이 고모당에 와서 빌면 씻은 듯이 나아 마음이 편안해지며, 하는 일도 잘 풀린다" 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안내판)
▼ 고당봉 (801.5m, 미륵사에서 약 1km)
[금정산]은 부산의 지나으로 주봉인 고당봉(801.5m)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 남으로 상계봉(623m)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대륙봉, 파리봉 등의 많은 봉우리와 나비바위, 부채바위 등 천구만별의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는 명산이다. 동쪽으로 금정구, 서쪽으로 북구, 남쪽으로 동래구, 북쪽으로 경남 양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81845m)이 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다. 금정산의 유래는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한 마리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속에 놀았다" 하여 산 이름을 金井山이라 전하고 있다. (안내판)
[고당봉(姑堂峰)]은 금정산의 주봉을로 부산전경과 부산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당봉은 범어사에서 산길을 따라 2.5km를 걸어 올라가면 1시간이 걸리며 금정산성 북문에서 0.9km의 거리에 있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금정산의 최고봉이면서 금샘(金井)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당봉의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금정구에서는 1994년 8월 '금정산표석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이름 찾기 고증작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서 '고당봉'과 '고당봉(高幢峰)'의 두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오랜 토론 끝에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고려때까지 내려오는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 금정산의 고당봉도 할미신으로 할미 고(姑)의 고당봉(姑堂峰)이 옳다"는 우리나라 고유의 샤머니즘 민속신앙세서 고당봉과 연계하는 학자 및 향토사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고당봉(姑堂峰))으로 확정되어 표석비를 세웠다. (안내판)
▼ 고당봉 정상부 모습
▼ 고당봉에서 내려다본 물금 방향
▼ 고당봉에서 바라본 북문 (왼쪽 중앙)과 원효봉~대륙봉 능선
고당봉에서 북문 방향으로 약 0.3km정도 내려오면 좌측에 보이는 샘터를 끼고 좌회전하여 장군봉 방향으로 0.4km를 내려가야 금샘을 볼 수 있다. 금샘 방향 등산로 입구의 샘터는 산객들의 쉼터 역할을 해주고 있다. 금샘 방향의 등산로에는 '금샘 방향' 이라는 팻말이 중간중간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 샘터
금샘 바로 아래에서 작은 암릉을 타고 오르면 금정산의 이름의 기원인 금샘이다.
▼ 금샘
[금샘(金井)] 금정산맥은 경남 양산시 다방리에서 시작하여 장군봉을 거쳐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 그리고 원효봉, 금정봉, 백양산, 승학산에서 다대포의 몰운대로 이어진다. 금정산의 유래는 1432년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정산 서북산정에 바위가 있는데 샘의 둘레가 10자(3m) 남짓하며 깊이는 7치(21cm)쯤 된다. 물이 항상 넘쳐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빛깔은 황금과 유사하다. 옛날 황금색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헤엄치며 놀았으므로 금샘이라 불렀고 범어사의 창건설화가 시작된 곳이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고 황금색 물고기가 노닐던 금샘은 생명의 원천, 창조의 모태인 다산을 기원하는 성소였다. (안내판)
▼ 금샘에서 올려다본 고당봉
금샘에서 되돌아와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약간 너덜길과 흙길이다. 이곳의 성벽은 새롭게 정비된 모습이다. 내리막길 끝에는 금정산 등산문화탐장지원센터가 자리잡고 있고, 그 옆에는 현대식(?)의 세심정(洗心井)이 오가는 길손들의 마음과 갈증을 씻어주고 있다.
▼ 금정산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와 세심정(우측 시멘트 구조물)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 옆에는 이전의 고당봉 정상석이 유리상자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 정상석은 금년(2016년) 여름에 낙뢰로 파손되어 이곳으로 옮겨 보존중이며, 현재의 정상석은 그후 새롭게 설치된 것이다.
▼ 2016년 8월 이전 정상석
금정산성 북문은 등산문화탐방지원센터와 인접하고 있으며, 범어사나 금성동 마을을 이어주는 연결통로이기도 하다.
▼ 금정산성 북문 (고당봉과 0.8km)
[금정산성 북문] 북문은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약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성문보다 작다.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초봄(1808년)에 오한원 부산의 지휘로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깍아내고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운동(1919년)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내판)
북문을 지나 완만한 오르막 경사를 따라 원효봉으로 이어간다. 고당봉에서 북문~원효봉~의상봉~제4망루~제3망루로 이어지는 구간은 성벽이 깔끔하게 보수된 모습이며, 등산로도 폼나게 정비되어 있다.
▼ 뒤돌아본 고당봉
▼ 당겨본 맞은편 미륵사와 미륵봉
▼ 원효봉 방향 등산로
오르막 능선을 올라서면 널찍한 공터의 원효봉에 도착한다. 원효봉은 원효대사와는 관계가 없으며, 금정산 동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새벽의 동해의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 (元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효봉 아래의 의상봉도 의상대사와는 무관하다.
▼ 원효봉 (북문과 0.7km)
[원효봉]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효봉(元曉峰, 687m)이라 불렀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고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봉우리다. 김유신 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 선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보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사람들은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안내판)
▼ 원효봉에서 내려다본 남산동과 회동저수지
원효봉을 정점으로 금정산의 동쪽 능선은 동문까지 거의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뱀처럼 파도처럼 굽이치는 성벽과 숨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기기묘묘한 기암괴석 그리고 멀리 바다와 도시가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금정산에서도 손꼽히는 경관이라고 생각된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을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 8.2km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8) 통제사 이제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이 성을 쌓았고, 1707년(숙종33)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中城)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8)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안내판)
▼ 의상봉(중간)과 솔봉(? 중간 좌측)
[김유신 솔바위]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금정산 고당봉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았다. 어느날 고당봉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 원효봉 부근에서 수련을 하였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는 높은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 틈서리에는 어른 키만한 땅딸보 소나무가 박혀 있다. 이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곳에서 김유신이 낭도들을 훈련할 때, 이 바위 위에서 부동자세로 몇십시간 서있는 훈련을 하다가 선 채로 소변을 싸 버렸다. 그것을 본 한 낭도가 그 자리에 아기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 놓았다. 이 소나무가 1쳔년의 유구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지금도 그 푸름을 뽐내고 있다. (안내판)
▼ 의상봉 (원효봉과 0.8km)
[의상봉(義湘峰), 620m] 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보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봉우리이다.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로 웅크린 호랑이가 동해를 바라보며 부산을 지키는 지혜로운 모습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 호랑기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기 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 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虎峰)이 되고 아래쪽에는 용을 닯은 용봉(龍峰)이 되었다. 이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힌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오늘에도 부르고 있다. (안내판)
▼ 의상봉에서 바라본 금정산성과 수영만 방향
▼ 의상봉에서 내려다본 솔봉(?)과 남산동
▼ 제4망루에서 바라본 의상봉 모습
▼ 제4망루 (의상봉과 0.1km)
제4망루 부근은 넓은 평원의 느낌이며, 금성동 마을 방향은 억새 군락지다. 편안한 등산로를 따라 제3망루로 이어지며, 제4망루와 제3망루 사이는 기묘한 기암괴석들이 밀집해 있다. 겉모습은 무던한데, 그 속에는 불같은 뜨거움을 품고 있는 것이다.
▼ 뒤돌아본 고당봉(왼쪽), 제4망루, 원효봉(제4망루 뒤), 의상봉(중간 우측), 솔봉(우측)
▼ 제4망루와 제3망루 사이의 기암괴석群
▼ 부채바위
[대자연이 만든 성곽 - 토르] 금정산성의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불쑥 솟아 있거나 누군가가 돌탑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바위들을 흔히 볼수 있다. 이 암석들은 풍화에 의해 형성된 토르(Tor)라고 하는데 "똑 바로 서있는 돌탑" 이라는 뜻으로 영국 콘웰지방의 지방어에서 유래하였다. 암석이 땅위에 드러나기 전 지하에 있을때 암석의 빈틈을 따라 차별적인 풍화와 침식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암석이 지표에 드러나면 풍화되어 부스러진 부분이 없어지고 남은 암석덩어리가 기반암과 연결되어 돌탑처럼 보이는 지형이다. (안내판)
▼ 나비바위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제3망루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수 있으므로 이정표를 잘 살펴야 한다. 제3망루는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깊게 들어간 곳에 있기 때문에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등산로를 벗어나 암릉을 지나면 숨어있는 듯 자리잡고 있는 제3망루를 만난다. 제3망루에서는 제4망루 방향으로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제3망루 (제4망루와 1.1km)
[금정산성 제3망루]는 동문 북쪽 약 1km 지점에 암반이 솟아 오른 절벽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듯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망루는 금정산의 유명한 나비바위와 부채바위 주변의 천구반별(千龜萬鼈, 천마리의 거북과 만마리의 자라)의 모습을 한 바위와 어울려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찬탄을 자아낸다. 제3망루는 능선 동쪽으로 돌출되게 이어진 암반사이 경사면에 축대를 쌓고 정면2칸과 측면1칸의 맞배식(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벽이 삼각형으로 된 집) 망루이다. 망루의 서족 10여m 전방 바위에는 '번위돈(蕃威墩)' 이라는 음각명이 새겨져 있어 돈대(墩臺, 성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된 포대) 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안내판)
▼ 제3망루에서 바라본 제4망루(왼쪽), 의상봉(중간 좌측)
제3망루에서 되돌아 나오면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등산로가 동문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좁은 등산로 안쪽에는 동문으로 연결되는 넓은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지만 4대성문 종주인 만큼 성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좁은 길을 고수하게 된다. 제3망루 약간 아래에 있는 나비바위를 제외하면 사실 별다른 조망은 없다.
▼ 나비바위
성벽을 따라가던 좁은 등산로도 동문을 앞두고 넓은 등산로와 합류한다. 경사도 완만한 나무숲길을 따라 걸으니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
▼ 동문 (원점회귀, 제3망루에서 1.3km)
예상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받은 산행이었다. 고당봉에서 동문까지는 성벽과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반면 그외 지역은 아직 발굴과 정비가 미흡한 느낌이다. 금정산이 부산시민의 안식처로서, 또 전국적인 명산이 되기 위해서는 성벽을 조속히 재단장 하는 것은 물론 등산로와 이정표를 정비하고, 역사문화유적에 대해서는 스토리를 강화하며,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은 이름을 붙여 재미를 더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서울의 북한산이나 남한산성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