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산(2), 와우산이야기
1) 행주외동 17통 92세, 할머니 정유헌
원래 고향이 남양만, 전쟁전에 행주나루로 이사왔다. 아들위해 이름을 남자처럼 지었다
전쟁이 나서 바로 나루에서 배타고 남양만으로 피난갔다. 아버지는 집안에 숨길것을 숨기고 나중에 합류했다
남양만에는 바닥 빨갱이 몇 하고 인민군 일부만 활동하고 큰 통제는 없었다
밤에는 주로 불려가 인민학습과 노래등을 배운다
그런게 3녀2남인데 바로 밑에 동생이 경비대 시절부터 군에 갔었다. 지금 89세로 인천에 살고 있지난 귀를 먹어 알아듣지 못한다
문제는 동네사람들이 군인가족이라고 밀고를 해서 아버지 어머니가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아야했다
★알가친척도 죽음앞에서는 어쩔수없이 고자질알당에 합류했다. 악몽이 계속되었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탄띠를 차고 멋진 동생인데 나라를 지킨다는 이유로 이제 죽음의 선택길에 가족이 매달리게 되었다
인민군은 별로 보이지도 않고 조용하다
바닥빨갱이가 판을 치는데 잘사는 집등에서 약탈해온 물건으로 머무는 곳을 궁전처럼 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내무서/파출소에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동생은 한강을 후퇴해 내려와
포탄이 터지는 가운데도 살아서 집에 잠간왔다가 밑으로 후퇴해 갔다
그리고 3년간 소식이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53년도에 죽은줄 알았던 동생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물론 악랄한 빨갱이들은 모두 달아나고 없지만 그들에게 동조했던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수없이 끌려와 업드려 살려달라고 빌고 있다
동생이 안된다고 다 죽어야한다며 큰소리 치고 일가친척이 어찌 그럴수 있느냐고 눈물지었다. 작은 아버지등이 동생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가 설득했다
★"피는 또 피를 본다", 결국 대부분 훈방되었다
전쟁 종료후 나중에 들어와 보니 살던곳은 대부분 불타고 할머니 집은 타지안했다
불탄 집 사람들이 몰래 집에 있는 것들을 훔쳐다 본인들 몸을 맡길 천막같은 집을 지었다
★틈새골 위가 상여집린데 그 부근에 시체가 많이 묻혔다고 한다
피난을 바로가 보지는 못했는데 우리 국군이 행주나루를 이용 강너머 개화산 쪽으로 후퇴하려 모였다가 뱌가 부족해 우왕좌왕 하다가많이 죽어 물에 떠내려 가기도하고 주변에 쥭어서 뒹굴고 있어 걷어서 묻었다한다
★그런데 그 후에 집을 짓는다고흙을 많이 파내어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주변이 원형이 변경 되었단다
옛날에는 일제시대부터 웅어가 얼마나 많은지 마포나루까지 불 밝히고 웅어잡아 팔고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못사는 사람들이 강가에 머물며 얻어먹고 살았는데 참 비참했다
너머 개화산앞에 강가에는 갈대가 우거져 군인이 넘어가도 보이지도 않는다
2) 83세 할머니, 김포 통진이 고향이다
★국군과 인민군이 통진일대에서 전투했다
군인들이 차를 버리고 도망가더라
한강가에 군인들이 죽어 떠내려 가는 것 목격
나중에 불발탄이 터져 동네 사람들이 배터져 사망했는데 직접보았다
3)선호경 83세등 3인, 강내1리 노인정이다
너무 급하게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내려와 피난도 못갔다
그런데 이곳 봉대산은 전투는 없었다
국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인민군이 와서 주둔만 했다, 그러니 호는 몇개 있을 것이다
1.4후퇴당시에도 전투는 없었다
바닥빨갱이도 이곳은 별로 없어 동네가 조용했다. 물론 완장차고 다니며 밤에 주로 모이게하여 인민학습과 김일성군가 가르쳤다
강매역에 실탄실은 인민군 열차가 있었는데 앞뒤를 고립시켜 못 움직이게 해놓고 비행기로 폭파하여 다 터트렸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간 인민군이 실탄을 받을수 없어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4)노성열 83세, 개성이 고향이다, 와우동거주
개성중학교 2학년때 전쟁이 났다
피난도 못가고 동네에 남아 있었다
북진시 동네 치안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4후퇴시 강화유격대를 따라 강화도로 내려왔다
★김포 강변에 군인시체들 많이 보았다
강가에 그때는 시체가 엄청 많았다
종전후에 갑종간부로 군에가 병참장교로 대위까지 달고 나왔다
이곳 와우에는 50년 넘었지만 산에 시체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다
그때 살았던 사람은 주변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