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서경덕과 황진이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어리다’는 ‘어리석다’는 의미다. 도학자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의 시조다.
이 시조에서 임은 기생 황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야담(野談)에 따르면 황진이는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으며, 서경덕도 유혹하였지만 그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후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평생 모시며 스승과 제자의 정을 나누었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서경덕이 사제의 정을 나누던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쓴 것으로 추정한다.
야사에 전하는 서경덕과 황진이의 사랑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내리는 여름밤 유혹실패후 다시찾은 초당황진이와 서경덕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연민과 흠모의 마음뿐 운우지락 기록은 없어
박연폭포와 ‘송도삼절’
◆서경덕을 유혹하러 간 황진이송도(개성의 옛 이름)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했다.
송도에서 빼어난 것 세 가지를 말하는 송도삼절은 바로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다.
이 송도삼절은 황진이가 서경덕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스스로 선정한 것이다.
박연폭포는 개성의 성거산과 천마산 사이에 걸쳐 있다. 박연폭포에서 멀지 않은 성거산에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을 때 일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이 성거산 기슭을 홑저고리와 홑치마만 입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몸은 옷이 달라붙어 육감적인 몸매를 나체 못지않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여인은 그런 모습으로 누군가 은거하고 있는 한 초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한 선비가 홀로 기거하고 있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선비는 아리따운 반라의 여인을 보자 말했다.
“웬 비를 이리도 맞았는가? 어서 들어오시게!"선비는 여인을 스스럼없이 맞아 주었다.
그러면서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손수 여인이 옷을 벗게 도와주었다.
알몸이 되도록 옷을 벗기고 직접 물기까지 닦아주는 선비를 보고 여인은 속으로 일단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선비의 반응을 기대하며 아름다운 전라의 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여인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선비는 차분히 이부자리를 펼 뿐이었다.
그래도 여인은 ‘도가 높은 학자라 해도 똑같은 남자이니 별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며 알몸으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선비는 눈도 깜짝 안 하며 마른 이불을 덮어주고 몸을 말리라고 한 뒤, 옆에 있는 책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참고 있겠지. 얼마 안 있다가 나한테로 올 거야.’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비는 책상 앞에서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발동했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벌거벗은 몸을 무기로 노골적인 유혹을 했지만 변화가 없었다.
한밤중인 자시(子時)가 되자 선비는 책상에서 물러났다.
여인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옆에 누운 선비는 곧 가볍게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여인은 포기하고 ‘이 선비는 역시 소문대로 도가 높은 사람인가’ 생각하며 이런저런 상념으로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혹 남성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 선비의 양물을 훔쳐 보았다.
크고 우람했다.그러다 잠든 여인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선비는 먼저 일어나 아침밥까지 차려놓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부끄러워하며 선비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초당을 떠났다. 선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연모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인은 황진이, 선비는 서경덕이었다.
◆서경덕의 제자가 된 황진이며칠 후 황진이는 서경덕이 머물던 성거산 초당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조촐한 모습으로 정성 들여 장만한 음식을 들고서였다.
서경덕은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다. 방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스승과 제자 관계이면서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연인이었지만 어느 야사에도 두 사람이 운우지락을 나누었다는 기록은 없다.
애틋한 연민의 정과 흠모하는 마음만 오갔을 뿐이었다.
어느 날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말했다.“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빼어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입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셋째는 바로 접니다.”
이렇게 해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서경덕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며 일생을 학문만 벗 삼았던 대학자였다.
집이 극히 가난했던 그는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게 도학에만 전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
평생을 산속에 은거하고 살았지만 정치가 타락하거나 정도에 어긋나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런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 황진이가 찾아간 것이다.
서경덕은 그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었다.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무너뜨린 황진이는 칭송이 자자한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고, 기생으로서 여러 선비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써 보았던 것이다.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식견이 높았고 시에도 능했다. 당시 잘나가던 선비들은 이런 황진이를 만나 하룻밤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다.
황진이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하루아침에 파계시켜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로 만드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碧溪守)라는 왕족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놓기도 했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혹하며 지은 시조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개성(송도)에 있는 박연폭포는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었다.
남명 조식이 만년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경남 산청).
서경덕은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 지리산 유람을 왔다가 조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이런 이야기도 회자된다.
어느 날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소세양(1486~1562)이 황진이가 대단히 매력적인 기생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는 한 달간 황진이와 같이 살아도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
단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장담했다.
이 소문을 들은 황진이가 의도적으로 소세양에 접근했고, 소세양은 그녀를 보자 바로 빠져 버렸다. 그리고 만난 지 한 달이 지나 이별하는 날이 왔다.
이때 황진이가 작별을 기념하며 한시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지어주었다.
달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月下梧桐盡)
서리 속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霜中野菊黃)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樓高天一尺)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人醉酒千觴)
흐르는 물은 거문고처럼 맑고(流水和琴冷)
매화는 피리소리에 젖어 향기롭기만 하네(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明朝相別後)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 없으리(情與碧波長)
이 시를 본 소세양은 “내가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라고 말하며 처음의 호언장담을 꺾고 한참 더 머물렀다.
황진이는 당대의 명창인 선전관 이사종(1543~1634)과는 6년간을 약정하고 함께 살기도 했다.
명기 황진이 여러 인사와 자유분방한 사랑
화담 서경덕 개성 출신의 조선 중기 대학자理보다 氣 중시 主氣論 선구자 송악산 화담 초막서 학문 열중
이처럼 여러 인사와 자유분방한 사랑을 나눴지만, 서경덕에 대해서는 오직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그리운 마음 시로 달래며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도 이런 황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다음 시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황진이가 서경덕을 몹시 연모하며 애태웠음은 물론이다.
황진이의 아래 시는 서경덕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언제 속였기에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가을 바람에 지는 낙엽 소리를 임이 오는 소리인가 여긴다는 마음을 표현, 임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래 시조는 서경덕이 별세한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인걸은 서경덕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노메라
1546년 서경덕이 별세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을 떠올리며 그의 발자취가 남은 금강산, 속리산 등을 찾아다녔다. 러다 결국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이 세상을 떠났다.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에 대해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랑(황진이)은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했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거처에 가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가 30년을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이 처사(處士)로서 행실이 고상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학문이 정수(精髓)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보려고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찾아가 절을 한 뒤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예기(禮記)에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고 했습니다.
저도 학문에 뜻을 두어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화담은 웃으며 받아들여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틈타 곁에서 친근하게 굴면서 마등(魔登)이 아난(阿難)을 어루만진 것처럼 음란한 자태로 유혹했다.
여러 날 그렇게 했다.
하지만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후 평소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동경하던 백호(白湖) 임제(1549~87)가 1583년 평안도 도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의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술잔을 올린 뒤 시조 한 수를 지어 애도하기도 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서경덕(1489~1546)은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해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개성 출신이며, 호는 화담(花潭)이다. 1502년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506년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는 날마다 힘써 탐구했다. 특히 20세 때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주 잊은 채 사색에만 잠기는 습관이 생겨 3년을 그렇게 지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서경덕이 사색과 궁리를 통해 직접 깨닫는 데에 힘을 쏟았음을 말해준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 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아갔다가 남명(南冥) 조식을 만나기도 했다.
1531년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나,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挽人)’ 중 일부이다.
‘만물은 모두 잠시 머무는 것 같아서(萬物皆如寄)/
한 기운 속에서 떴다 가라앉을 뿐이네(浮沈一氣中)/
구름 생기는 것을 보라 흔적이 있던가(雲生看有跡)/
얼음 녹은 뒤를 보라 자취도 없다네(氷解覓無)/
낮이면 밝다가 밤이면 어두워지니(晝夜明還暗)/
으뜸과 곧음이 시작되고 끝나고 하네(元貞始復終)/
진실로 이런 이치를 훤히 알게 되면(苟明於此理)/
장자처럼 항아리 두드리며 그대를 보내리(鼓缶送吾公)’
[출처] [평택 늘찬국어학원]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