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품 애용으로 큰 기업
내가 원동국 3학년일 무렵, 아버지는 고향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 있는 종산에 다녀오셨다. 6대조 할아버지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오늘날의 국회부의장)을 지내시고 한양에서 내려오셔서 오창에 정착하셨다. 따라서 종산에 모신 분들 중 가장 큰 어른은 6대조 할아버지이셨다.
장손이신 아버지는 오창의 종산을 지관과 같이 둘러보시며 이장(移葬)할 묘소의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셨다. 아버지는 오창 종산에서의 이장 등의 일을 마무리 짓고 어두컴컴해질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꿈에 나타나 불편하다는 하소연을 한 묘소를 옮겨드려야겠다고 아버지는 이미 말씀하신 일이었다.
아버지는 옷을 갈아 입으시고 세수를 하고 오셨지만 오창 종산에서 드시고 온 술 냄새가 났다. 곧이어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오셨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아무리 늦었어도 꼭 식사를 하고 주무셨다. 그리고 더운 여름날 밤에 나와 동생은 아버지가 잠이 드실 때까지, 아니 잠드셨어도 팔이 아파 더 못할 때까지 부채를 부쳐 바람을 일으켰다.
물론 당시에는 선풍기가 귀하던 때였지만 있는 집들은 미제나 일제 선풍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1960년에 국산 금성(Gold Star)사 선풍기도 나왔다.
당시 화폐로 35,000 환이었다. 1962년 화폐 개혁이 있었다. 아버지는 100 만환을 들고 은행에 가셔서 새 화폐 10만 원으로 바꿔오셨다. 당시의 시내버스 요금은 5원이었다. 2021년 현재는 시내버스가 1400원 그럼 무려 280배로 인상된 것이다. 그런데 구간요금이리는 것도 있었던 것과 계산의 편의를 위해 깎아서 200배 인상으로 보면 선풍기 가격은 700,000원 이상의 가치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미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왔고 일제는 6.25 동란 이후에 일본의 자국산 물품을 밀어 넣기 곧 경제침탈 공략이 먹혀들어 한국 요소 요소에 많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이 나오고 국산품 애용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 자전거도 많이 들어왔다. 국산으로 3000리 자전거가 나왔지만 일제 자전거 가격이 워낙 비싸 기를 꺾였다. 경주용 사이클(cycle)도 미제, 일제였다.
근수가 최초로 자전거 타기를 나에게 가르칠 때도 초록색 아동용 일제 자전거였고 그때 공설운동장에서 만난 사이클 선수들의 경주용 자전거도 모두 외제였다. 그 당시 3000리는 경주용 자전거는 만들지도 않았다. 하긴 만들어 봐야 몇 대나 팔리겠냐 이었겠다.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부대를 통해 군수품에 끼어있던 치약과 칫솔들이 흘러나왔다. 순일이 엄마 동양강철 강사장님이 가정방문 오신 담임 선생님께 대접한 까맣고 쓴 커피도 미군 PX 유출품이었다.
1952년에 낙희(Lucky)공업사가 국산 칫솔과 러키치약을 생산 판매하였다. 이때에도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여 그 덕에 오늘날의 LG가 되었다. 우리가 국군장병 형님들께 라고 위문편지와 함께 보낸 치약과 칫솔도 영문으로 찍힌 러키(Lucky)였다.
큰 고모님 댁에 갔을 때 내가 쓸 칫솔이 화제가 되었는데 소금과 볏짚을 내주시며 문지르라고 하셔서 싫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소독효과가 있는 버드나뭇가지 (楊버드나무 양 枝가지 지) 대에 볏짚을 감아 양치하셨다고 신출귀몰할 이야기를 큰 고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버드나무 가지로 깎았다는 이쑤시개를 주셨다. 참 놀랍고 어린 내 수준, 내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기가 찰 일들이었다. 고모님은 그 근거로 양치(楊齒이 치) 질이 양지(楊枝)에서 나온 말이라 하셨다. 나는 그럼 양지대에 볏짚을 감아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럼 이 밤에는 어두워서 안 되고 내일 아침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다 만들어주신다는 말에 고모부는 그냥 러키 칫솔을 사다 주라고 하셨다.
어느 날 멋진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고모부는 고모님과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때에 손바닥만 한 미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주먹보다 더 큰 배터리를 뒤에 연결하고 고무줄로 챙챙 감아놓고 들으셨다. 당시 가격은 33,000 환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660,000원대이었으니 참 높은 가격이었다.
이런 세상 물정에 박정희가 61년 쿠데타 직후에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자 바람이 일어나 골드 스타(Gold Star) 금성 라디오가 그 덕을 보았다. 이 바람에 금성사는 박정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고 후히 사례를 표했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관계가 정경유착이라는 의리의 정서가 싹트는 것이었다.
아마 그런 방식의 덕으로 치약산업은 수십 년을 러키의 독과점으로 이어졌다. 얼마 전 중간에 부광약품이 새로운 타입의 치약 안티- 프라그를 생산하여 인기를 끌자 쥐도 새도 모르게 이유를 불문하고 사라져 버렸다.
국산품애용 열풍은 작은 산업박람회라는 이름으로 먹자골목처럼 야식도 팔고 신제품 히트 상품을 비롯해 온갖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했다. 스피커로 팡팡 음악을 내보내 설레는 장터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중에 칸칸이 숫자가 인쇄된 쪽지를 나눠주고 부르는 번호에 맞는 당첨자에게 상품을 주는 국산품 애용 쪽지 코너도 인기가 좋아 사람들로 붐볐다. 어쩌면 그게 복권을 태동시킨 출발점일지도 몰랐다. ' 국산품 애용하여 나라 살림 펴보자.' 는 교실에서 표어 짓기 시간에 내가 만든 이 표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코로나(Corona) 승용차를 조립 생산하여 시판할 때에도 국산차라고 대견스러워하고 매진되도록 다 팔아주고 포니(Pony) 자동차가 나왔을 때도 국산품 열풍 속에, 환호 속에 온 국민이 자동차 산업을 응원하였다. 그리해서 오늘의 현대자동차라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유별나게 국산품 애용바람에 빠진 예외적으로 외제 상품에 빠진 귀족들 얼마를 빼고는 말이다.
이런 철없는 어른들과는 대비되도록 하물며 싹이 있는 어린이들도 남자아이는 유리구슬을 뜨겁게 샀고,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을 열심히 사서 타이어 공장이 나오게 하였고 강화유리공장이 출현하도록 국내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는 큰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