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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식사동성당 (성체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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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도움되는 글 스크랩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식사중 추천 0 조회 19 11.10.18 0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아침기도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저녁기도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끝기도

 

 

 

 

 

 

 

 

 

 

 

 

 

 

 

 

 

 

 

 

 

 성 루가의 무덤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 

 

이교 집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바울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복음서를 썼다. 「사도행전」이라는 책에서 교회의 초기부터 바울로가 로마에 처음으로 체류할 때까지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주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Hom. 17,1-3: PL 76,1139)

 

주님은 당신을 전파하는 이들을 뒤따르십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주 구세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말씀으로써 또 어떤 때에는 행위로써 우리를 권고해 주십니다. 주님의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 그 자체로 계명입니다. 주님이 무언중에 하시는 행위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사도들을 둘씩 짝지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둘씩 짝지워 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러 파견하시는 것은 말 없이 행위로써 우리에게 다음의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복음전파의 직분을 결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에 당신을 앞서 제자들을 파견하셨다.”고 복음서가 적절히 말해 줍니다. 복음 전파가 앞장서 나아가고 주님은 당신의 복음 전파자들을 뒤따르십니다. 즉 복음 전파의 말씀들이 앞장서 나아가고 그것을 통해서 영혼이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만 주님은 우리 영혼에 오시어 거처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권고해 줍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그리고 시편은 말해 줍니다. “서녘으로부터 오르시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 실상 주님은 당신의 수난으로 인해 넘어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더 찬란히 보여 주시어 서녘으로부터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서녘으로부터 오르셨습니다.” 즉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심으로써 그 죽음을 서녘에 잠겨 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영혼에게 주님의 영광을 전파할 때 서녘으로부터 오르시는 분의 길을 닦아 놓고 주님이 친히 오시어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여러분을 비추어 주시게 합니다.


파견하시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로 합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들이 적습니다. 나는 이 말을 할 때 서글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밀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찾아내기란 너무도 힘듭니다. 우리가 사제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말씀을 재삼 숙고하십시오.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우리가 여러분의 필요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여러분을 권고해 주는 일에 잠시도 중단치 않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설교자의 직분을 취한 다음 우리의 침묵이 의로우신 재판관 앞에서 우리를 고발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서의 인물] 사랑받는 제자 루가 

 

루가는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머리 속으로 지나가는 젊은 시절, 수없이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일생을 한 순간에 바꾸었던 사도 바오로와의 만남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루가는 자신의 일생을 결코 사도 바오로의 삶과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사도 바오로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섭리하고 준비하신 만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우연히 사도 바오로의 주치의 노릇을 하면서 그의 전도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고질병을 갖고 있었고 전도 중에도 자주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으로 신음하였다. 그때마다 루가는 사도 바오로의 곁에서 극진하게 간호하곤 했었다. 루가는 유다인이 아니라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리아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의 인간적 인품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사도 바오로를 만난 후 진정한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에 루가는 사도 바오로의 충실한 동반자이며 제자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따라 다니려고 노력했다. 루가는 모름지기 신의와 충성을 중요시하는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도 바오로를 같이 따랐던 사람들이 가끔씩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에 굴복하여 바오로를 떠났어도 루가는 항상 사도 바오로의 곁을 지켰다.

 

그는 자신이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소식을 기록하기로 작정했다. 루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록했지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그 분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면밀히 조사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직업 의식이 몸에 배 있었다. 또한 그는 특히 뛰어난 필체와 문학가로서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전해 들은 구전 지식과 전승들을 모아놓고 붓을 들어 편지 형식으로 복음서의 첫머리를 써 내려갔다.

 

"존경하는 테오필로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써서 각하에게 써 보내드리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바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루가 1,1~4)

 

루가 복음의 첫 대목만 보아도 저자가 얼마나 지혜롭고 명석한 지식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글의 재료와 편집의 방법과 목적을 분명히 밝히면서 논리 정연하지만 들뜨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마치 신앙을 고백하듯이 복음서의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루가는 자신 안의 어떤 큰 힘에 이끌려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었다. 루가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이란 사실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영적 체험을 한껏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사도 바오로와 동고동락하면서 그를 통해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살아있는 분으로 느끼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병든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루가는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도 했지만 한편 죄악으로 곤란함에 빠져있는 영혼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 특히 이방인 지역에는 죄악에 빠져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루가는 이런 상황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는 것을 막고자 마음 먹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 있게 기록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루가는 지식의 사람이요, 활동가인 동시에 덕이 높은 신사로 존경받았고 사도 바오로가 "사랑을 받는 의원 루가"라고 칭송해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루가는 자신 안에서 늘 활동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루가는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으로 모든 이에게 겸손되이 봉사하였으니 사랑을 받아 마땅한 인격자였다. 루가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필체로 살아있는 주님을 전해주고 있다. 

 

[평화신문, 제666호(2002년 3월 10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성 루가 복음사가 축일: 성실함의 사도 루가(10월 18일) 
 
현대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이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람이 인지도가 높다. 무언가 뛰어난 역량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튀는 사회가 오늘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재능을 갖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무언가 큰일을 하거나 큰 영향을 끼치면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요즈음을 연예인들이 더 유명한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시대라고 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무슨 연예인이나 프로 운동 선수가 되겠다는 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만큼 명예와 재물이 주어지는 큰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무엇보다 무슨 큰 재능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어 명예를 누리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복음에서는 결코 중요한 것으로 삼지 않는다. 명예나 부나 권력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들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하느님 찬미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서들이다. 이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잘 집약되어 있다. 그래서 이 정신을 일컬어 ’복음정신’이라 말한다. 복음서는 네 권이다.
 
복음서의 저술가인 마태오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마르코와 루가는 그 다음 세대로 사도 바오로와 함께 다닌 제자들이다. 특히 루가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동행하면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사도행전’이다. 그는 자신의 복음인 루가 복음에서 예수의 승천으로 글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승천부터 사도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뿐 아니라, 복음서를 전해준 복음사가들도 기억하고 그들의 축일을 지냈다. 루가 복음사가의 축일을 교회는 10월 18일에 지낸다. 루가는 원래 이방인 의사 출신이었지만 개종하여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바오로의 2차와 3차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이라고 판단되어 끝까지 바오로를 수행하며 ’전교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사도 바오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했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의사였음에도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영혼을 구원해 주시는 분을 만났고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으며, 후세를 위해 그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깊은 생각을 가졌다. 마치 후세의 질병 구제를 위해 ’동의보감’을 쓴 허준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큰 능력이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작은 것 하나까지 정성을 기울이는 성실한 자세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루가는 침착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끈기 있고 성실한 사도였다. 그래서 복음사가들을 상징하는 것 가운데 루가에게는 ’황소’를 상징으로 그리곤 하였다.
 
그렇다. 루가 복음사가는 자신이 쓴 복음 말씀의 가르침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흔적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복음정신을 일깨워주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력이나 명예나 부가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보장해 준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현대인들은 무언가 큰일, 위대한 업적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루가는 자신의 삶의 흔적을 통해 작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끈기 있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침착하고 강인한 자세로 성실하게 살아야 복음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한꺼번에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맨손체조처럼 가벼운 운동이라도 날마다 꾸준히 성실하게 할 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교와 기록으로 주님의 신비를 세상에 알렸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깨닫도록"(본기도) 이날을 묵상해 보자. 그래서 루가 복음사가처럼, 육신의 병을 고치고 육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는 길로 나아가자.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경향잡지, 2000년 10월호]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9. 사도와 성서저술가 (5) 루가 복음사가

 

 

전설에 따르면 루가는 제일 처음 성모상을 그린 성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후 그리스 지방으로 가서 전교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죄많은 여인, 방탕한 아들, 십자가상 우도 이야기 등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복음으로 특징화되는 「루가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자기가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의식을 가지고 정리한 흔적이 엿보이는 복음서다.

 

전통적으로 복음서 저자로 언급되는 루가. 그는 바오로의 협력자였고 의사였으며 초대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전해주는 역사서 「사도행전」도 함께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중략)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서 보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란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루가 1, 3∼4).

 

복음서 서문에서 엿볼 수 있듯 루가는 자신이 서술하는 글에 대해 정확히 제대로 기록한다는데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실제 당시 주변의 역사적 기록들을 소상히 밝히는 작업을 시도했고 예수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마치 그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자세하게 묘사하는 등 놀라운 자신감으로 「예수」라는 거인을 기록했다.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3, 22).

 

루가를 복음서의 저자로 보는 의견은 2세기 말엽 로마에서 작성된 「무라토리 경전목록」에 「루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썼고 그는 바오로의 협조자이며 의사」라는 기록과 함께 최초의 교회 역사가로 불리는 에우세비오가 그의 「교회사」에서 「그리고 바오로의 동역자였던 루가도 바오로가 전해주는 복음을 써내려 갔다. 이것은 이레네오가 쓴 「반이단론」 3권 1장 1절에 기록된 것이다」는 구절 등에서 비롯된다.

 

학자들은 「루가에 의한 복음」 표제를 지닌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 「보드머 파피루스(175∼225)」임을 살펴볼 때 이미 이 책이 쓰여진 시기에 루가가 전통적인 저자명으로 굳어진 것 같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저술은 마르코 복음(70년경)과 예수 어록(50년경)을 집필 자료로 사용했다고 볼 때 루가복음 경우 70년 이후 90년대 초반 이전, 사도행전은 1세기 말엽에 씌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학설이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추측되는 루가는 자신만의 재료를 이용, 예수 사건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 특히 시각적 효과를 활용, 여러 상황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독자들이 예수의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는 평가다. 「신약성서 저자들 중 루가만큼 당대의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의 문학적 기법에 밝은 저자가 드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풍부한 어휘 사용과 자료를 다듬는 역량을 보이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루가는 안티오키아 출신이었으며 바오로는 그를 「우리의 사랑하는 의사」(골로 4, 11)라고 불렀다. 사도행전중 바오로의 두 번째 전교여행 중에 등장, 바오로가 세 번째 전도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몇해 동안 필립비에 머물다가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가 체사레아에서 수감됐을 때 곁에 머물렀다.

 

루가는 이 기간동안 예수를 알았던 이들을 만나면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는 시간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전설과 교회에 대한 낭설이 유포되던 상황에서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루가는 바오로 사도의 권유 등으로 주님의 올바른 모습을 전하는 성서 저술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루가가 저술한 복음이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교회의 시대」로 나눠 각 시대마다 하느님과 예수와 성령의 활동을 대입시킴으로써 교회의 시대를 구원사적인 시각으로 정리하고 그 기원을 철저히 예수에게서 찾는, 독특한 역사 의식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3단계로 분류한 루가 사도의 구세사관은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구도 전망을 이해하는 결정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역사가와 신학자로서의 자질을 드러내 주고 있다.

 

자비의 복음, 보편적 구원의 복음,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 기쁨의 복음, 기도와 성령의 복음 등으로 불려지는 복음의 성격처럼 루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듯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글을 썼고 탕자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특히 병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은 그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는 듯 하다.

 

눈여겨 볼 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으로 표현되는 그의 구세사관이다.

 

구원계획이 인간의 역사안에서 진행되는 동안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인종적 차이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다. 즉 예수께서 모든 이에게 구원을 선포하였고 이 구원의 소식은 교회를 통해 지중해 연안의 모든 민족과 지역에 퍼져 나가면서 세계 중심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점이다.

 

전설에 따를 때 제일 처음 성모상을 그린 성인이라고도 알려진 루가는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후 그리스 지방으로 가서 전교하다가 80세 정도 나이에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30일, 이주연 기자]

 

성 루가 복음사가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신약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제3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하여 그리스도의 생활과 초기 교회 생활을 나란히 보여준 루가는, 사도 바오로께서 “사랑하는 의사”(골로 4,14), 전교사업의 “동료”(필레 1,24), 바오로가 순교하기 전 “유일한 동반자”(2디모 4,11)라고 부를 만큼 사랑받는 제자였다.
 
루가는 복음사가 중에서 유일한 이방인 출신이다. 그의 고향은 교육의 중심지인 시리아국 안티오키아였다. 그리스도 강생 후 40년경 안티오키아에는 신자 단체가 형성되었으니 그는 그중의 열심한 한 청년이었다.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에서 전교를 하였을 때 그들을 알게 되고 특히 바오로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것이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드로아에서 의사로 살아가려 하였으나 주님께서는 복음 전파라는 더 큰 사명을 그에게 주셨다.
 
흔히 그를 예수의 72제자(루가 10,1) 중 한 사람이거나, 엠마오로 가는 길의 글레오파의 동행자이거나(루가 24,18) 혹은 사도 필립보에게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해주십시오”(요한 12,21) 하고 간청한 저 이방인의 한 사람이라고도 하나 신빙성 있는 근거는 없다. 루가 자신이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루가 1,2)과 자기를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비의 복음, 보편적 구원의 복음,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 절대적 재생의 복음, 기도와 성령의 복음, 기쁨의 복음을 썼으며, 특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10,30), 잃었던 양 한 마리(15,7), 자캐오(19,5), 잃었던 아들(15,11-32) 등의 얘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증거한다. 또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읍니다”(루가 23,34)라고 하시며 박해자까지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준다.
 
우리는 루가를 통하여 성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며 성모송 이외 매일 성무일도에서 외는 마리아의 노래, 즈가리야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성모님에 관한 그의 기술은 성모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루가가 복음서를 쓰기 위해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을 만났다면 성모님을 빼놓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루가는 의사일 뿐 아니라 화가였으며 성모님에 대한 초상화를 처음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는 초대 신자들간에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도 한다.
 
성 바오로가 고린토인에게 보낸 서간 중에 “우리는 디도와 함께 한 사람을 딸려 보냅니다. 그 사람은 모든 교회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명성을 떨친 사람입니다”(2고린 8,18)라고 한 것은 그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의 겸손은 자신이 기술한 사도행전에서 자신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음에서 드러나며, 다만 우리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도 선교 사업에 일익을 담당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각 성서 저자의 상징이 마태오는 천사, 마르코는 사자, 요한은 독수리이며 루가는 희생을 표시하는 소로 묘사되고 있는 바(에제 10,14; 묵시 4,7) 이는 침착하고 강인한 그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의 복음이 성전에서 시작하여 성전으로 끝나는 데도 이유가 있다고 한다.
 
스떼파노가 순교한 후 그의 고향 안티오키아에서 믿음을 얻은(사도 11,20) 루가는,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두번째 전도 여행을 할 때, 드로아스에서 그를 만나 일행이 되어 마케도니아의 필립비까지 행동을 함께 하였다(사도 16,10.12). 그리고 바오로는 이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는 곧 떠나게 되었는데, 평신도인 루가에게 교회를 돌보도록 맡긴 것 같다. 이어서 세번째 전도 여행 때 바오로는 필립비를 거쳐 갔는데 루가는 여기서 다시 그 일행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갔고 이어서 가이사리아, 마지막으로 로마까지 따라갔다. 바오로가 로마에서 처음 감금되었을 때 루가는 그와 함께 있었고(골로 4,14; 필레 1,24), 다시 로마에서 감금되었을 때에도 바오로 옆에서 협력자로 그를 섬긴 단 한 사람이 루가였는데 “루가만이 나와 함께 있읍니다”(2디모 4,11)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같이 복음사가 루가는 참으로 사도 바오로의 충실한 제자요 협력자로서 그의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루가는 66년 바오로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그리스로 건너가 아카이아 지방에 전교하고, 다음은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주를 위해 수많은 간난 신고를 기꺼이 참아 받았다. 루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충실히 주를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아카이아(비타니아 혹은 에집트)에서 별세한 듯하지만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의사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축일은 10월 18일.
 
복음사가 루가는 온 일생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였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복음의 사도들을 열심히 돕고 말과 글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선교에 있어 출판물의 중요성을 깨달아 교회 출판 사업에 협조하도록 하자.
 
[경향잡지, 1988년 10월호]

 

 

[성서의 세계 - 신약] 거룩한 동정녀의 초상화가 - 루가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루가의 작업 방식
 
스물일곱 권의 신약 성서 가운데 복음서 저자 루가의 두 작품은 다른 것들보다 서구인들 구미에 잘 맞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가는 유다인도 셈족도 아닌 그리스인인 까닭이다. 즉 유럽인이라 할 수 있다.
 
루가가 태어난 곳은 정확하게 모른다. 어떤 자료들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근방을 암시하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루가가 트로아스나 그 고대 도시 가까운 곳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루가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 행전의 이야기에 근거한다. 사도 행전은 한동안 바오로에 대해 삼인칭으로 말한다. “그 뒤 바오로는 데르베에 들렀다가 리스트라로 갔다”(사도 16,1).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는 바오로의 길동무가 되어 함께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복수 삼인칭으로 계속된다. “……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사도 16,6). 그러나 바오로가 트로아스에 이르자 이야기는 갑자기 복수 일인칭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다”(사도 16,11). 트로아스로부터 사도 행전의 저자는 여행자 무리에 초빙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소아시아의 이 도시의 그리스인일까?
 
어느 경우든 루가는 그리스인이다. 언어와 양식이 그것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순수 그리스어로 쓰였고, 또한 개념의 논리적 연결성도 그리스적 풍미를 띠며, 따라서 관심, 변증법적 양식, 끊임없이 그리스-유럽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행동과 기록 방식이 특히 서구인들의 심성에 맞아 떨어진다. 종합적으로, 루가의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더 유럽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들어맞는 것이다.
 
이 복음서의 특색 있고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역사 기록에 대한 관심이다. 본래의 의미에서, 복음서들은 설교의 근본인 기쁜 소식의 보고이다. 그러나 루가는 자신의 이야기의 역사적 성격에 관해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이것은 이미 그의 이중 작품의 목적에서도 드러난다. 사도 행전은 교회 역사의 첫 번째 소묘이며, 세 번째 복음서는 일종의 서언인 셈이다.
 
루가가 역사적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보편적 역사를 두 번이나 참고하면서 이러한 틀 속에 이 복음적 사건을 끼워 넣은 사실로 명백해진다. 그는 예수의 출생을 아우구스토 황제 시대에 시리아 총독 퀴리노가 포고한 인구 조사로 시작한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공적으로 나타난 때와 비교되는 시기를 지적한다.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루가 3,1-2). 따라서 그는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의 나이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복음서 저자다. “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루가 2,23).
 
복음서 서문(루가 1,1-4)에서부터 루가의 행동 양식, 그의 정확함, 그리고 반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역사적 감각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실상 그보다 앞서 착수되었던 시도들에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그는 그 가운데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들을 자기 작품의 본보기로 취한다. 그의 선구자들처럼 그는 이미 말씀의 직무에 관련 있었던 목격 증인들을 환기하면서 그의 소식을 전한다(루가 1,2 참조). 바꾸어 말해서, 그는 정리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기 위하여 애초부터 모든 사실을 주의 깊게 조사했음을 눈에 띄게 명확히 하였다.
 
심지어 루가가 진술한 복음서의 기적적인 이야기들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현대에 와서는, 복음서를 역사 기록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에 대한 확증으로 바로 루가의 진술이 인증된다. 그러한 진술에 따라 그는 “말씀의 직무자들”(말씀을 전파한 사람들, 루가 1,2)이었던 사람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반하여 루가 자신은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예고한다. 그는 존경받는 목격 증인들에 의지한다. 즉 그가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을 그는 일관된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해, 즉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서”(루가 1,4) 걸려내고 정리하였다.
 
사도적인 설교를 보급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고, 그는 폭 넓게가 아니라 깊이 있게 작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이미 믿음을 지닌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전해진다. 그러므로 루가는 바로 유럽인의 심성을 만족시키듯이, 무엇보다도 하나의 기초와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복음서를 썼다. 이 때문에 세 번째 복음서는 가장 역사적인 복음서로 간주되며, 참으로 가장 역사적인 복음서다.
 
 
화가 루가
 
로마의 성 마리아 대성전 부속 성당 안에는 ‘로마 민족의 구원’으로 존경받는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가장 오래 된 초상화’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비잔틴 아이콘을 복음서 저자 루가의 작품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화가와 예술가들 협회도 화가 루가의 작품이라는 전승을 논의의 여지없이 자연스러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성 루가는 화가들의 수호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리 확실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널리 퍼져 있는 확신은 오히려 대중적인 환상에 근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몹시 순결한 대중적인 환상이다.
 
화가로서 루가에 대한 첫 번째 통지는 6세기에야 나타난다. 530년경 테오도로라는 사람이,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에우도시아 황후가 알려지지 않은 풀케리아라는 사람에게 루가가 직접 손으로 그런 마리아의 아이콘을 선물로 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는 몹시 때늦은 자료다. 그런데도 이 자료는 중세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후에 루가는 마리아 앞에서 캔버스와 화필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루가에 대한 이 마지막 표현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루가는 초상화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확실히 그는 손에 화필을 든 적이 없었다. 자신의 책자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마리아의 발치에 앉아 있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 형체를 색감이 풍부한 일련의 그림 안에 붓으로 고정시켜 예수의 유년기 복음이라 불리는 것을 이루어냈다.
 
루가는 마리아의 섬세한 초상화를 기쁜 메시지의 순간에 고정시켜 놓았다(루가 1,26-38). 후광을 띤 한 천사가 순박한 소녀를 부른다. 나아가 어린데도 소녀는 이러한 응답밖에 할 줄 모른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복음서 저자가 다시 한번 소녀를 묘사하는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이번에는 사촌 엘리사벳 앞에서 행복감으로 충만된다(루가 1,39-56). 천사의 메시지가 있던 순간에는 겨우 한마디만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제 그녀는 그녀의 찬미 노래 ‘마니피캇’ 안에서 기쁨으로 용약한다.
 
세 번째 틀에서는 띠로 감싸인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향한 경탄으로 충만한 채 구유 곁에 무릎 꿇고 있는 마리아를 본다. 마리아의 모성적 기쁨이 담긴 그림이다(루가 2,6-7).
 
조금 뒤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다(루가 2,22-28). 시므온과 안나는 그녀 곁에 서 있고, 그들의 말은 마리아의 모습에 관해 묘사된다. 즉 파멸과 부활, 그리고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칼. 행간을 좀더 내려가 보면, 마리아는 같은 성전 안에서 박사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며 질문도 던지는 자기 아이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침묵 속에 있다(루가 2,41-51). 불안과 고뇌는 상당히 크나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는 단 한 행으로 드러난다.
 
다른 어떤 복음서 저자도 마리아의 생애에 대한 주요한 순간들을 이렇게 폭 넓게 고정시킨 바 없다. 섬세한 감각과 심오한 색깔로 루가는 마리아의 모습을 후대를 위해 보존하였다 그를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의 초상화가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재능을 지닌 화가, 초상화가가 단 하나의 인물에만 제한된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루가의 복음서에서 다른 부수적인 모습의 초상화도 발견한다. 그는 몇몇 여인들을 ‘화폭’ 위에 찍어 놓는다. 그리고 복음적 사건에서 지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조차도 비범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루가는 복음서들의 주요 인물 가운데 예수를,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철저히 인간적인 초상화로 묘사하였다. 그것은 고통과 고뇌 속의 인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관대한 사랑의 초상화다.
 
그리고 최상의 공헌으로 루가는,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미지도 소묘하려고 애썼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잘 알려진 방탕한 자식에 대한 묘사로 하였다(루가 15,11-32). 진실로 이 비유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방탕한 자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을 지닌 그 아버지다.
 
비유의 서두에서 아버지는 연민에 가득 차서, 어린 자식이 자기 것을 주장할 때 침묵을 지킨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계속된 기다림 끝에 그가 돌아오는 날, 이미 멀리서부터 그가 오는 것을 본다. 그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자신의 뉘우침을 드러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축제의 식사와 함께 귀환은 모든 가족에게 축하받았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서 짧은 정식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라고 제시하는 것을, 화가 루가는 매혹적인 색깔로 표현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본질’을 제시하고 루가는 그것을 살아 있는 초상으로 그린다.
 
(L'uomo me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13) 성 루카 복음사가
 
① ‘행동하는 학자’… 초대 신자들 존경 한몸에
 
정영식 신부·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엘리사벳·선교사
 
 
루카는 마태오, 마르코, 요한과 더불어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루카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며,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루카의 고향은 당시 학교 교육의 중심지인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였다. 기원전 40년 경에 이 도시에는 이미 가톨릭 신자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고, 루카는 그 단체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의사 청년이었다. 루카는 요즘말로 우등생이었다. 그리스어에 능숙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고, 학문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와 이집트를 여행하기도 했다.
 
특히 루카는 안티오키아에서 전교를 하고 있었던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인다. 루카는 사도들을 존경하였고, 특히 바오로 사도를 잘 따랐다.
 
루카는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였다. 바오로 성인의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사랑하는 의사 루카와 테마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콜로 4,14)라는 구절이 있고,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에도 “나의 협력자인 마르코와 아리스다르코스와 테마스와 루카가 그대에게 인사합니다”(필레 1,24)라는 문장이 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도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2티모 4,11)라고 나와있다. 루카는 중요한 시기에 늘 바오로 사도 옆에 있었던 셈이다.
 
루카는 또 바오로의 제2차 전도여행을 옆에서 수행하며 함께 고난을 겪으며 힘껏 도왔으며, 바오로 사도가 마케도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도 함께 있었다. 또 바오로 사도가 제3차 전도여행 도중, 트로아스에 도착되었을 때 루카는 급히 그곳으로 가서 상봉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이후 루카는 줄곧 바오로 사도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바오로 사도가 카이사리아 감옥에 갇였을 때도, 로마에 호송되어 형장에 끌려 나갈 때도 그는 늘 옆에 있었다.
 
루카는 초대 신자들 간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우리는 형제 한 사람을 티토와 함께 보냅니다. 이 형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입니다”(2코린 8,18)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형제 한 사람’은 바로 루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바오로 사도 및 루카 복음사가 시대에 벌써 주 예수께 대한 그릇된 말들이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명석한 두뇌를 가진 루카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릇된 진리가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올바른 진리를 저술로 남길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카는 바오로 사도의 권유에 따라 복음서 및 사도행전을 집필하게 된다.
 
루카는 이를 위해 친히 성모 마리아를 찾아뵙고 주님의 탄생전후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의 특징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다루지 않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와, 아기예수의 잉태부터 어린 시절의 일화가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다.
 
또한 직업이 의사였기에, 특히 병자들에 대한 치유에 대해 관심이 많아, 이를 복음서에 많이 수록했다. 루카는 또한 사제직에 대해서는 면밀한 관심을 갖고 복음서를 썼다.
 
루카의 저서로서는 또 초창기 교회사를 담은 사도행전이 있다. 28장 중 앞부분 12장은 베드로 사도에 관한 내용이고, 뒷부분은 바오로 사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바오로 사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자신에 대해서는 한 구절도 없다. 루카 복음사가의 겸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루카는 신앙적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분이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시절과 관련한 상세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집필가로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책상 앞에서만 앉아있는 학자가 아니었다. 바오로 사도가 67년 로마에서 장렬히 순교하자, 루카는 그리스로 건너간다. 그곳 아카이아 지방에 전교한 그는 이후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주님을 위해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복음을 전하다 84세를 일기로 귀천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3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14) 성 루카 복음사가
 
② 하느님께 받은 능력 주님과 합치로 승화시켜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삶의 행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우리 삶은 모두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와의 만남, 형제 자매와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학문과의 만남, 사상과 종교와의 만남 등 우리는 늘 만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만남이 나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성 루카의 만남을 살펴보자. 루카의 부모님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루카의 삶을 통해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루카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분이다. 그래서 의사가 됐고, 저술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의 부모는 루카의 이러한 지적 성취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었을 것이다. 성 루카의 이러한 지적 성취는 바오로 사도와의 만남을 통해 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를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40대 중반, 루카는 30대 중반이었다. 바오로 사도와의 만남을 통해 루카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됐고, 이후 바오로 사도가 순교할 때까지 그의 옆에서 보좌했다. 루카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바오로 사도를 평생 동안 따랐다는 것은 새로운 엄청난 가치를 깨닫고 그것에 심취했다는 의미다.
 
바오로 사도 순교 후 홀로 남게 된 루카는 그동안 자신이 듣고 배운 것, 기도를 통해 얻은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은 루카 복음사가를 미리 지적으로 안배해 주셨고, 바오로 사도와의 만남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초형성)시키셨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글로 기록해야 된다는 영감을 주셨다. 이것을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명으로 받들어 순명하는 삶을 살았다. 루카 복음사가의 내면을 볼 때 순명을 잘하고 순수하고 착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열심이었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의사가 되었다. 그만큼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을 잘 형성시켜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육신과 정신적 삶을 초월하는 초월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기에는 물론 바오로 사도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영향이 컸다고 해도 루카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활동하신다. 하느님은 루카 복음사가에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나에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어떠한 능력을 심어주셨다. 영적으로 당신을 따르고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심어 주셨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나 지적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을 심어 주셨다. 우리는 루카 복음사가처럼 그 능력을 일깨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합치가 중요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늘 하느님과 합치된 가운데 생활했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했고, 복음서도 집필했고, 전교활동도 30년 가까이 수행했다.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하느님과의 합치 안에서 승화해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의사인 그는 특히 연민의 마음이 가득했다. 의사로서 그는 상처를 입은 이들을 만났을 때 늘 연민의 마음을 느끼고, 아파했다.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보듬어주면서 치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개인적 차원의 연민은 사회적 차원에서 자비로 승화됐다.
 
그런데 이 합치와 연민, 자비는 루카에게 있어서 한 단계 더 나간다. 바로 겸손의 덕이다. 그는 좀 배웠다고 해서 잘난 척하지 않았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고, 또 하느님의 뜻에 순명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합치 연민 자비 겸손의 성향을 늘 간직하면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의 초석을 놓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다시 한번 루카에 의해 드러나는 이 아름다운 초월적 성향, 영적 성향들을 떠올려 본다.
 
합치, 연민, 자비, 겸손….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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