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날 부르는 거지? 누가 날 간절히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
벌써 며칠째 코로나에 걸려 신음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어요. 할아버지가 펄쩍 뛰며 말렸지요. "뜬금없이 누가 부른다고 그러시오. 허! 고열에 시달리더니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 모양이군." "누군가 날 부르는 것이 분명하다니까요? 왕릉 동산에 가 보아야겠어요. 거기서 누가 날 오라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음이 자꾸 그쪽으로 가는걸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나 봐요." 할머니는 억지로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어요. "아이고, 큰일났군!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 재택치료 중에무리하면 안 된다고 의사가 신신당부했는데...... . 코로나는 주로 노약자를 데려간다고 하지 않소? 제발 조리나 하시오." 그래도 할머니는 기운 없는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기어이 왕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어요. 할머니 말씀이 맞았어요. 그동안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왕릉의 동산 안에는 제초제를 흠뻑 둘러쓴 풀꽃들이 아우성치고, 석상 곁의 용담꽃도 큰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요.
용담꽃이 이렇게 외쳤어요.
"헉, 헉, 저 좀 구해 주세요. 지금 구해 주지 않으면 제 목숨은 사그라지고 만답니다. 할머니! 어서 오셔서 절 구해 주세요. 태어나서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억울해요!" 제가 처음 이곳에서 새싹을 피우고 뿌리를 내릴 때만 해도 내가 이런 지경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조차도 해보지 않았어요. 저도 처음엔 신라 임금님 무덤의 동산에 살게 된 것이 그저 신나기만 했지요. 바위틈이나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꽃피우는 풀꽃들에 비하면 정말 행운이었으니까요. 왕릉의 동산에 있으니 좋은 일이 있겠다는 기대로 잔뜩 들떴었답니다. 왕릉 주변에는 소나무, 아카시나무, 좀작살나무, 밤나무, 굴참나무가 빙 둘러서 있었어요. 그 나무들은 주억주억 고개 끄덕이며 호위무사처럼 왕릉을 지키고 서 있었지요. 왕릉 앞의 석상 곁에 뿌리내린 나는 정말 행복했어요. 조록조록 내리는 봄비가 맛있는 단비를 뿌려주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쓰다듬어 주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랄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발 뻗고 있는 왕릉 주변 동산 부근에 큰 아파트 단지가 있어서 산책이나 가볍게 등산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심심치 않게 지나다녔어요. 그러나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죠. 잔디밭에 섞여 있는 잡초를 자세히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들 눈에는 내가 그저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왜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날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물었어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 산과 들과 나무와 풀꽃들을 지으신 하나님은 저도 지으셨지요? 그런데 저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가요? 잔디 속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죽거나 김매는 일꾼의 손으로 뽑혀서 마르고 마는 것이 제 운명인가요? 제가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제 속엔 어떤 꽃이 들었나요? 너는 어떻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하도 많은 질문을 해서 그런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도 소리쳤어요. "저 좀 보아주세요. 저는 꽃이에요. 지금은 볼품없어도 가을이 되면 예쁜 꽃이 필 거예요. 그러니 저를 밟아 뭉개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도 저는 늘 그렇게 외쳤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요. 낯선 얼굴이 왕릉 입구에 나타났어요.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였지요.
노부부가 왕릉으로 성큼 들어섰어요.
"에구, 허리야! 여기서 좀 쉬었다 갑시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어요. "그러시구려." 할아버지보다 서너 살 아래로 보이는 할머니는 젊고 건강해 보였어요. 그래서인지 앉기보다 잔걸음으로 능 주위를 돌며 잔디밭 속의 풀꽃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나! 잔디밭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야생화가 많이 숨어 있네! 이건 골무꽃, 이건 까치수염꽃이고, 이건 쑥부쟁이, 산부추도 있네? 가을이면 예쁜 꽃도 볼 수 있겠는걸." "허허! 당신 하는 짓을 보니 내 친구 나 시인이 쓴 시가 생각나는군. 그가 '풀꽃'이란 시를 썼는데 오늘 보니 정말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군." "읊어 주시구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네가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전문--
"아, 정말 좋은 시네! 평범한 사실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진리를 발견해 낸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에요. 풀꽃을 자세히 보면 얼마나 예쁜데요. 제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리고 오래 보고 있노라면 정말 사랑스럽거든요." 할머니 얼굴에는 예쁜 웃음꽃이 피어났어요. 그러다가 풀꽃 한 포기와 눈이 딱 마주쳤어요. 할머니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아니 이건 용담이잖아! 이 꽃이 어떻게 이런 곳에 났지? 이 지역에선 전혀 볼 수 없는 꽃인데 가까운 곳에서 자라고 있었네? 그동안 심심치 않게 이 길을 지나다녔는데도 이제야 발견하다니...... . 얘, 너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니?" 할머니는 나를 발견하고 한동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할아버지를 불렀어요. "여보, 여보! 어서 이리 와 보세요. 여기 용담이 있어요!" "용담이라니? 그게 뭔데 호들갑이야. 대단한 보석이라도 발견한 거요?" "맞아요! 이건 사파이어보다 더 예쁜 보석이에요. 나는 사파이어 반지보다 이 꽃을 더 좋아해요. 내가 어린 시절 고향 앞산에서 보았던 꽃이거든요. 어린 시절에도 용담꽃을 너무 좋아해서 이 꽃을 보려고 앞산을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었다니까요." 할머니는 자신의 고향 앞산을 그리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았어요. "허허, 아무리 야생화를 좋아하고 들꽃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해도 들꽃 한 송이에 단박 어린아이 같이 변하는 당신이 더 신기하구먼." "좋아하는 대상 앞에서는 바보도 되고, 어린아이도 되는 거 몰라요?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 앞에 서면 그 앞에서는 순수해지고 사악함이 없어지니 얼마나 좋아요? 어린 아기나 바보는 죄를 모르니 천국이 그들 것이라고 하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비웃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결심한 듯 말했어요. "내일부턴 여기로 산책 코스를 바꾸기로 해요. 용담이 자라는 걸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정신 운동이거든요. 우리 집에서 5백 미터 정도의 거리니 산책길로 안성맞춤이잖아요." "뭐, 그렇게 합시다. 당신 말대로 좋은 운동 같긴 하군. 마다할 이유야 없지...... ." 할아버지도 찬성이었어요. 그때부터 노부부는 날마다 동산으로 산책을 나왔답니다.
용담꽃이 지그시 눈을 감고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그 후로 할머니는 날마다 내 곁에 와서 무럭무럭 자라는 손자를 보는 듯 정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나를 자세히 보아 주셨어요. 누가 관심 가져 준다는 것! 그리고 자세히 보아준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오늘은 키가 더 컸네? 많이 자랐구나! 신통하기도 하지!" 할머니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왜 사는지...... ' "넌 말이야. 늦여름부터 시작해서 구시월에는 꽃이 활짝 핀단다. 산과 들엔 욕심 많고 호들갑스럽게 죽죽 자라서 무더기로 꽃을 피워 땅을 뒤덮는 꽃들이 좀 많니? 넌 하루 만에 피고 지고 씨앗을 맺어 온 산과 들에 퍼뜨려 강산을 어지럽히는 잡초가 아니란다." 할머니는 또 먼 곳을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옛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내가 어릴 때 놀던 옛 동산 무덤가에 용담꽃이 피어 있었어. 처음 그 꽃을 보는 순간, 세상에 저렇게 신기하고 예쁜 꽃이 있는가 싶어 무척 감동했었지. 난 조용하고 기품 있는 꽃이 좋아. 넌 보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주는 꽃이야. 야생화 마니아들이 공연히 들꽃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란다. 예쁜 꽃을 보고 밀려오는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지. 그런 감동은 몸 속의 다이돌핀을 샘솟게 해 주거든.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은 흔히 기쁠 때나 아름다운 것을 접하고 감동 받는 순간에 샘솟는 호르몬이란다. 엔돌핀 보다 4000배나 좋다지 뭐니? 너를 볼 땐 그래. 넌 그렇게 기품 있는 꽃이지. 그래서 내가 좋아한단다." 와~ 내가 '기품 있는 꽃'이라니! 곁에 선 석상이 할머니가 내게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면 이렇게 투덜거리겠죠. "칫! 괴짜 할머니로군. 이렇게 멋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까짓 풀이 뭐가 좋다고 날마다 와서 호들갑이래? 나야말로 기품 있는 왕의 신하가 아닌가?"하고 말이에요. 그러나 할머니는 생명 없는 석상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할머니는 꼭 같은 시간에 와서 내 곁에 앉아 나를 쓰다듬어 주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작은 언덕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나는 행여 할머니 집이 보일까 하여 목을 길게 늘여 보았지요. 그렇지만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어서 어림없었죠. "나도 할머니 집 정원에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를 볼 수 있는 할머니의 정원에서 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할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따뜻이 눈맞춤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넌 모두 다섯 촉의 꽃대를 뽑아 올렸구나. 가을이 되면 마디마다 청보라색 종 모양의 꽃이 필 거야. 네 꽃송이는 쉽게 시들지도 않는단다. 그건 네가 기품 있는 꽃이라는 증거지." 하면서 칭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너무 즐거웠으니까요. "그런데 큰일이구나. 벌써 몇 달 째 비가 오지 않으니 여기저기 말라 죽는 풀과 나무가 많아. 너도 목마르지? 자 이 물을 마시렴. 그리고 힘내서 꼭 꽃을 피워 주렴. 네 모습을 그리고 싶어." (물론이지요. 저는 꼭 기품 있는 꽃을 피워서 할머니의 다이돌핀을 샘솟게 해 드리겠어요.) 나는 꼭 기품 있는 꽃을 피워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어요.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을까요? 메마른 잔디 속에서 모든 풀꽃이 가뭄에 허덕이고 이슬조차도 제대로 내리지 않는데... . 하나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에요. 나는 그나마 다행이도 뿌리를 감싼 발밑의 흙이 바짝바짝 말라가긴 해도 할머니가 남겨 준 물병 속의 물 덕분에 무사히 목숨을 붙들 수 있었지만 고단하기는 다른 풀과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다정하게 찾아 주던 할머니가 언제부터인지 발길을 뚝 끊고 만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혹시 병이 나신 걸까? 어디 먼 곳으로 여행 가신 걸까?" 나는 별별 생각을 떠올리며 온종일 할머니의 집 쪽만 바라보았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는 목도 타고 마음도 탔어요. 그리고 다른 풀꽃들처럼 이파리도 거뭇거뭇 말라가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이 무심히 잔디밭에 길을 내며 오갔지만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지요. 또다시 이름 없는 잡초로 돌아가고 만 거예요. 날벼락은 계속 일어났어요. 어느 날 내 앞에 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그들은 왕릉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수군수군 뭔가를 의논했지요. "그 사이 잔디밭 속에 잡초가 많이 날아왔군. 잔디밭이 곧 잡초밭으로 변하겠는데. 일꾼들을 고용하면 비용이 많이 들 테니까 제초제를 뿌려야겠다. 제초제를 치면 잔디 외의 잡초는 모조리 죽으니까 굳이 풀 뽑을 수고할 필요가 없지." "그거 좋은 방법이구먼. 그럼 내일 당장 제초제를 칩시다." 왕릉을 돌보는 관리인들이 와서 왕릉 주변의 잡초를 없앤다고 의논했지요. 풀꽃들은 그 소리를 듣고 비명을 질렀어요. "으악! 우린 이제 모두 죽은 목숨이야. 달아날 발이 없으니 고스란히 독을 마실 수밖에 없어. 아아, 너무 억울해. 난 죽기 싫어. 아직 꽃도 피우지 못했는데...... ." "난 지금 꽃봉오리를 달기 시작했어. 그런데 꽃도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너무해!" 까치수염꽃은 정말 억울하다고 울부짖었지요. 참으아리꽃, 오이풀, 여기저기서 숨어 살던 풀꽃들도 왕릉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대며 아우성쳤어요. 그렇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거나 염려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요.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그들을 말렸을 테지만 소식 없는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는 것 같았어요. 이제 내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걸까요. 나는 그래도 혹시 할머니가 들을까 하여 힘껏 소리쳤어요. "할머니! 어서 와 주세요! 내일이면 저는 독을 마셔야 해요. 제발 오셔서 절 구해 주세요."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할머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음 날, 일꾼들이 어김없이 커다란 분무기를 지고 왕릉으로 들이닥쳤어요. 그리고 동산 전체에 고루고루 제초제를 뿌렸지요. "으~아." 제초제를 흠뻑 둘러쓴 풀꽃들은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져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칭찬해 주던 예쁜 내 이파리도 축 늘어지고 말았죠. 온몸이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졌어요. 나는 안간힘을 다해 할머니를 불렀지요. "으, 으~ 할머니, 제발 오셔서 절 구해 주세요!" 그러나 할머니는 오지 않았어요. 나는 가물가물 꺼져가는 심지 다 된 촛불처럼 까무룩 꺼지고 말았어요.
그때였어요!
기적처럼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동산에 나타났어요. 할머니는 용담을 보려고 급히 석상 앞으로 갔지요. 그리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에구머니나! 이게 웬일이야? 이게 웬 날벼락이람! 왜 이렇게 된 거지요?" "왕릉 관리인들이 제초제를 친 모양이군. 뾰족한 잎만 남기고 동그란 잎을 가진 식물들이 된서리를 맞은 걸 보니......" "안 되겠어요. 이대로 두면 죽을 게 뻔하니 우리 집으로 옮겨가서 살려 봐야겠어요." "이미 독을 맞았는데 살 수 있겠어? 포기하고 집으로 갑시다. 신발에 농약 묻겠소." "그럴 수 없어요. 집에 가서 호미랑 장갑 좀 가져다주세요. 용담을 살려 봐야겠어요." 할아버지가 극구 말려도 할머니는 결국 용담을 캐어 집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농약 묻은 대궁을 모두 자르고 뿌리는 물속에 담가 놓고 해독되기를 기다려 옥잠화 곁에다 심었지요. 그래놓고 할머니는 날마다 주문처럼 외쳤습니다. "깨어나라! 제발 살아나라!" 그 꼴을 보고 할어버지가 말렸어요. "그만 포기하시오. 제발 어린애 같은 짓 그만두라고! 제초제 맞은 풀이 살겠소? 무리하지 마시오. 무서운 전염병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그러다가 또 드러누울까 걱정이오." " 이 꽃을 살려내면 나도 건강해져요. 이 꽃이 내게 다이돌핀을 주거든요." "에구구, 또 다이돌핀 타령!" "당신은 이해가 안 가겠지만 다이돌핀이란 호르몬은 최상의 치료제라니까요." "아이구, 참! 못 말리는 사람이야!"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지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요.
그런데 분명히 나는 죽은 것 같았는데 할머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정말 이상해요. "살아나라! 살아나라! 어서 일어나라!" 그래요, 자나 깨나 늘 귀에 익은 그리운 음성! 바로 할머니 목소리가 맞았어요. 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깨어나라! 깨어나라! 하고 나를 깨웠지요.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앞에 와서 속삭였어요. "넌 살 수 있어. 살아날 거야! 어서 살아나!" 하고 말이에요. 그러니 죽었다가도 살아나야 할 지경이었지요. 나는 희미한 정신을 붙들어 안간힘을 다하여 새 꽃대를 만들어 땅 위로 뾰조롬이 밀어 올렸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왕릉도 석상도 안 보이고 온갖 귀한 꽃과 나무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는 곳에 내가 있었어요. 바로 곁에 백일홍, 옥잠화, 쑥부쟁이꽃, 둥굴레, 층층이꽃...... . 온갖 야생화와 진귀한 꽃들이 방글방글 피어 있었죠.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할머니 집 정원인가 보았어요. 드디어 간절한 내 소원이 이루어진 거예요. 마침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가 펄쩍 뛰며 소리쳤어요. "와우~ 드디어 촉을 틔웠구나! 살아났어! 깨어났구나. 넌 정말 대단한 꽃이야!" 할머니는 요란하게 할아버지를 불렀어요. "여보, 여보! 어서 나와 보세요. 용담이 깨어났어요! 살았다고요!" 이번에는 할아버지도 의외라는 듯 정원으로 나왔어요. "아니, 다 죽은 꽃이 어떻게 살아났지?" "하나님의 귀는 바보나 어린아이에게 더 활짝 열려있으니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지요." 어린아이 같다고 늘 할아버지에게 지청구만 먹던 할머니는 어깨를 활짝 펴고 말했어요. "자, 사파이어 아가씨! 다음은 꽃 피울 차례야. 서둘러! 난 꼭 널 내 화폭에 옮겨 많은 사람에게 널 오래오래 바라보게 할 거야." 하고 말이에요.
열린아동문학 202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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