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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通度寺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가 세운 사찰이다.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의 모양이 석가모니가 불법을 펼친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고 하여 사찰의 이름을 통도사라 하였다. 또한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찰의 이름을 통도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 특징이 있다. 대웅전 건물 뒤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진리의 모습으로 항상하는 부처님’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곳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수계단(승려가 되기 위해 계율을 받는 장소)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통도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과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이 소장돼 있다. 이런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통도사는 현재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통도사 대웅전‧금강계단
통도사 대웅전大雄殿은 상로전上爐殿(대웅전을 맡아보는 임원의 처소) 영역의 중심 건물로, 통도사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이다.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고쳐 지은 것이다.
두 개의 건물을 하나로 합친 형태의 건축물로, 내부의 기둥 배열이 다른 건물과는 다르다. 지붕은 정丁자 형태이며, 건물의 앞면, 뒷면, 옆면 등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모두 정면처럼 보인다. 건물의 다양한 특성을 반영하듯이 건물의 동서남북에는 다양한 편액이 걸려 있는데, 특히 남쪽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로도 유명하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규범인 계율을 받는 수계 의식이 이뤄지는 장소이다. 이곳의 종 모양의 석조물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수행자들이 부처님께 직접 계율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금강계단과 이어진 대웅전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 전통이 있다. 국보 제290호.
통도사 용화전
용화전龍華殿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영조 1년(1725)에 고쳐 지은 것이다. 용화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이 미래의 부처로 예언했다는 미륵불상을 모셨다. 보물 제471호 통도사 봉발탑이 용화전 앞에 세워져 있다.
봉발탑은 스승과 제자 간에 진리를 전하는 징표인 발우의 모양을 한 석탑이다. 이는 석가모니불의 심법을 미륵보살이 이어 받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용화전 내부 측벽에는 ‘서유기西遊記’의 내용 일부가 벽화로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경남 유형문화재.
호국불교의 살아 있는 역사, 용화전
현충 시설의 대부분은 탑과 비석, 기념관에 집중돼 있으며 이들 시설은 ‘기념’을 위해 후대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설물은 대개 보수나 개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충 시설은 공간의 보존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인물의 정신을 배우고, 장소가 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통도사가 31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였다는 실체를 밝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51년, 당시 통도사가 육군병원으로 쓰였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져오고 있었다. 현충 시설에 대한 고증을 당사자가 직접 소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통도사 용화전 미륵부처님 복장에서 연기문이 발견됐고, 해당 연기에는 불상 조성에 대한 연유가 상세히 밝혀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확실한 기록이었다.
이와 함께 통도사 대광명전 내외부 벽체에서 당시 통도사에서 치료받던 군인들의 필적으로 보이는 낙서가 여럿 발견됐다. 여기에 힘입어 대대적으로 증언을 수집해 녹취 기록을 남겼고 이런 노력으로 2021년 현충 시설로 지정됐다.
호국불교는 현재 진행형
현충 시설은 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훗날 건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도사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대광명전에서 참배하는 이 시간, 그 이전의 과거에는 아픈 병사들이 희망을 꿈꾸며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동일한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이 교차하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대광명전과 용화전뿐만 아니라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등 통도사 대부분의 전각에서 군인들이 치료받으며 기거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통도사 경내의 모든 공간들이 한국의 아픈 시대사와 함께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역사의 굴곡마다 통도사는 오롯이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사찰이 그러하진 못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사찰들이 왜란으로 불타고 전쟁의 국난 속에 무너졌다. 통도사는 단순히 현충 시설을 넘어서서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진 사찰의 아픔을 기록하고 한국 불교의 호국정신을 드높여왔다. 통도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이다.
통도사 봉발탑
봉발탑奉鉢塔은 스승과 제자 간에 진리의 가르침을 전하는 징표인 발우鉢盂(사찰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를 형상화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우를 미륵부처님이 받들어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봉발탑이라고 한다. 봉발탑이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 앞에 세워져 있는 이유도 미륵불이 석가여래를 이어 중생을 제도할 미래불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봉발탑은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과 덮개가 있는 유개有蓋발우로 구성돼 있다. 간주석의 형태와 연꽃무늬의 특징으로 미뤄 볼 때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471호.
통도사 관음전
통도사 관음전觀音殿은 하로전과 상로전을 잇는 중로전中爐殿 법당이다. 불이문을 지나 금강계단이 있는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관세음보살이 원만하고 두루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준다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중로전의 3개 법당 중 가장 앞쪽에 있는 건물이며, 그 뒤로 대광명전과 용화전이 이어진다. 관음전은 조선 영조 원년 1725에 용암대사가 처음 지었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해 오늘의 모습에 이른다. 관음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고,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다.
관음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고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이런 관음전의 구조는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통도사 석등
관음전 앞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소란스러움을 잠시 잊게 하는 석등이 있다. 석등은 전각 외부나 길을 밝히기 위해 돌로 만든 등이다. 이 석등은 맨 아래에 네모난 바닥 돌이 있고, 그 위에 팔각 받침돌,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넣어둘 수 있도록 만든 부분, 지붕돌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팔각 받침돌은 아래 받침돌, 가운데 기둥, 윗받침돌의 3단으로 쌓았다. 가운데 기둥에는 3줄의 테를 둘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했다. 사각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주위를 밝히도록 했다. 지붕돌에는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고, 꼭대기에 보주寶珠, 탑‧석등 등의 맨 꼭대기에 얹은 공 모양의 부분을 놓아 머리 장식을 했다. 석등을 만든 방법이 용화전 앞 봉발탑과 비슷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한다. 경남 유형문화재.
통도사 영산전
영산전靈山殿은 하로전下爐殿의 중심 전각으로, 조선 숙종 30년(1704)에 송곡대사가 고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숙종 42년(1716)에 쓰인 ‘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문’에 따르면 숙종 39년(1713) 봄에 영산전과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됐고, 숙종 40년(1714)에 청인·정안·낭일·치원 등 여러 대선사의 노력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총안대사가 숙종 41년에 단청을 올렸고, 숙종 42년에 모든 공사를 마쳤다. 보물 제1826호.
영산전 내부에도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벽화가 있다. 또한 천장, 대들보 등에는 단청이 아름답고 위엄 있게 장식돼 있다. 영산전 내부의 벽화는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내용을 담은 수준 높은 벽화들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을 표현한 다보탑 벽화를 비롯해 포벽包壁(지붕과 기둥을 잇는 포包 사이의 벽면) 48면에는 ‘석씨원류응화사적’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26장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과 관련된 그림들이고, 22장면은 전법 제자들의 행적과 관련된 그림들이다. 영산전 벽화는 종교적 감수성, 작품의 예술성과 시대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18세기 초 우리나라 벽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1711호.
통도사 삼층 석탑
영산전 앞에 있는 이 삼층 석탑은 큰 받침돌 위에 2층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1987년 해체 수리 당시, 원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약 1.5m 정도 옮겨 극락전과 약사전의 중심축에 맞춰 복원했다. 당시 상층 기단 안쪽에서는 조선 시대 백자가 발견됐고, 하층 기단의 다진 흙 속에서는 소형 금동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이 나왔다. 기단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지금의 위치로 석탑이 옮겨지면서 탑 배례석과 함께 성보박물관에 보관했다. 보물 1471호.
자장매
통도사 자장매화慈藏梅花는 370년 된 노거수老巨樹에서 피는 홍매화다. 영축산중과 한반도에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반가운 전령사다. 자장매는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의 경내 영각影閣 오른쪽 처마 밑에 있다.
임진왜란 후 통도사 중창을 발원한 우운대사는 먼저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한 이후 참회하는 마음으로 불타버린 역대 조사의 진영을 모실 영각을 건립했다. 상량上樑보를 올리고 낙성落成을 마치니 홀연히 매화 싹이 자라 해마다 섣달 납월臘月에 연분홍 꽃이 피어 사람들은 이를 자장스님의 이심전심이라 믿었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진다. 그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스님의 지계持戒 정신을 표현한다 해서 대중이 이를 ‘자장매화’라 하였다. 정초에 자장매화 아래서 소원을 빌면 한 해 동안 좋은 일들이 꽃길처럼 열리고 선남선녀가 사랑을 약속하면 백년해로 한다는 말이 전한다.
오향매
추운 겨울을 이겨낸 그윽한 매화 향이 부처님께 향 사르며 예배하는 수행자의 지계持戒의 향, 선정禪定의 향, 지혜智惠의 향, 해탈解脫의 향, 해탈지견解脫知見의 향과 닮았다 해서 오향매五香梅라 한다. 또 다섯 가지로 힘차게 뻗어 오른 형상이 오분법신五分法身과 닮았다 해서 오향매라 부른다.
지리산 남녘 깊은 골짜기에서 자생한 이 매화나무는 수령 300년이 되었다. 여러 귀한 인연으로 통도사에 뿌리내리고 주지(香田) 스님으로부터 뜻깊은 이름 얻었으니, 도량을 장엄하고 부처님과 사부대중에게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공양하며 영축총림의 일원으로 당당히 도량의 주인이 되었다. 백매화. 장미과. 2~3월 개화.
통도사 자장암
자장암慈藏庵은 신라대국통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에 앞서 짓고 수행하던 곳이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칠방의 하나로서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수행하던 공간이다. 창건 이후 중건 사실에 대해서는 회봉대사檜峰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전해지며 그 후 1987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이 현문화상에 의해 암자가 일신하였으니 현재는 관음전 수세전 자장전 등의 전각과 감원실 금화당 취현루 선당 등의 요사가 중건돼 오늘에 이른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해 서쪽을 향해 있으며 그 옆에는 1896년 조성된 약 4m에 달하는 통도사 유일의 마애불상이 모셔져 있다. 마애불 옆으로는 나라와 민중의 평안을 기원한 수세전과 창건주와 독성, 산신을 모신 자장전이 있다.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한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금와공에 관한 이야기는 통도사 사적기 중 금와변현金蛙變現과 이능화李能和(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1918) 중 변화금와變化金蛙에 기록돼 있다.
먼저 사적기에 전하기가 다음과 같다.
‘자장암 뒤 석벽에 작은 샘이 있어 자장율사가 고운 삼베에 걸러 식수로 사용하였다. 석벽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한 쌍의 개구리들이 자주 샘물을 흐리게 하였다. 율사가 무명지無名指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개구리들을 살게 하였더니 개구리들이 더 이상 물을 흐리게 하지 않았다. 이 후로 한 쌍의 금개구리들이 혹은 벌과 나비로, 혹은 거미로 모습을 변화함이 신비로웠다. 총림의 곳곳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혹은 법당의 공양물 위에 혹은 부처님의 어깨에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돌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의심하였으나, 한 사람이 보고 다른 사람을 부르는 사이 없어지기도 하니, 사람들은 이를 신비로이 여겼다.’
조선 말기의 대학자 이능화는 변화금와에서 말하고 있다.
“축서산鷲栖山(영축산靈鷲山의 옛이름)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뛰어다닌다. 절의 스님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게 한 것이다.”
지금도 이 금개구리는 특별한 날이면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니 세간에서 우러러 말하길 ‘금와보살’이라 경외한다.
통도사 안양암 북극전
안양암安養庵은 통도 8경 중 하나인 안양동대 위에 자리 잡은 암자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찬인대사가 다시 지었고, 조선 고종 2년(1865)에 우담대사가 보수했다.
북극전北極殿은 장수를 도와주는 북두칠성을 모시는 불전으로 칠성전이라고도 한다. 중국 도교 신이었던 칠성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명을 다스리는 불교 신이 되어 칠성전에 모셔졌다. 칠성전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불전으로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북극전은 건물의 가로 길이가 5m 남짓할 정도로 작지만 내·외부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 점은 칠성 신앙이 기복신앙으로서 당시 민중에게 매우 깊이 뿌리 내렸음을 보여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47호.
*통도 8경
[1경] 무풍한송舞風寒松 : 영축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의 솔숲
[2경] 안양동대安養東臺 : 안양암에서 조망하는 통도사의 일출 경관
[3경] 비로폭포毘盧瀑布 : 비로암 폭포
[4경] 자장동천慈藏洞天 : 자장암 계곡 일대의 경관
[5경] 극락영지極樂影池 : 극락암의 영지
[6경] 백운명고白雲鳴鼓 : 백운암의 북소리
[7경] 단성낙조丹城落照 : 단조성의 저녁 노을
[8경] 취운모종翠雲暮鐘 : 취운암의 저녁 종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