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 월요일이다. 날이 밝아와 핸드폰을 꺼내보니 여섯시 반이다. 투루판에서 8시간을 왔으니 신장 지경 가까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지도를 보니 간수(甘肃) 류위안까지는 700여km 되어보이는데 자느라 어디 어디서 섰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한사람의 승객은 어디서 내렸는지 없다. 일곱시에 승무원이 어제밤에 플라스틱카드를 주고 가져간 승차권을 돌려주고 카드를 회수해간다. 다음 역에서 우리가 내린다는 뜻이다. 투루판역에서 산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웠다. 잠 잔 자리를 정돈했다.
런이 묻는다. "从柳园然后在去什么地方(유원에 들린 후 어디로 갑니까)?"
"我们要去敦煌看莫高窟(우리는 둔황가서 무가오쿠 구경합니다)."
"你每一年都到中囯吗(일년마다 빠지지 않고 중국옵니까)?"
"不, 这次是七年我最終來了这儿以后(아니, 이번이 내가 중국에 마지막 온지 7년만입니다)." -말이 되는지 자신 없지만 알아 듣는 것 같다.
"老婆怎没來中囯(부인은 어째 중국 안왔나요)?"
"因为她有事在韩囯, 她己经來过多次看风景地方, 桂林, 张家界 等(집사람은 한국에 일이 있어서요, 계림, 장가계 등 경치보러 벌써 여러번 왔지요.)."
도착예정시간을 20분이나 지나 여덟시다. 남자승무원에게 류위안 언제 도착하냐니까 15분쯤 걸린다고 한다. 미심쩍어 이번에는 여자승무원에게 물었다. 10분쯤, 差不多(대강 그렇다)란다.
도착안내방송을 듣자 런과 인사했다. "一路平安到你家(집까지 편히 가세요)." "旅游順平(순조롭고 평안한 여행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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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위안역을 나서니 안과장과 같은 회사의 임부장이 마중한다. 승합차에 올라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첫인상의 우펑두어(吴锋铎) 스지(司机)와 인사를 나누고 차는 곧 출발했다. 둔황까지는 130km, 약 두시간 걸린단다. 잠깐 눈을 부쳤는가 싶었는데 떠보니 차는 여전히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무수한 바람개비가 꽂혀있다. 여기가 안시시안(安西县)이며 풍력발전중심이란다.
지난번 오상회 산행으로 울릉도 갔을 때 본 돌지않는 바람개비-그것도 딱 한개뿐인데-생각이 나 안타깝다. 우리가 이 서역까지 넘보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춥고 항량하다고 만주벌판을 간과한 작은눈이 안타깝다. 국토는 넓히고 볼 일이다. 아, 췐룽 당신의 큰눈이 부럽다. 불모의 땅이라고 明이 버린 이 서역땅을 당신은 소중하게 품에 안지 않았던가? 정복욕, 소유욕, 뭐라 해도 좋다. 당신 덕에 오늘의 중국이 여기서 석유와 천연개스도 캐고, 석탄과 광물도 캐고, 발전도 하는 것이 사실아닌가?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그나마 반토막 난 땅을 다시 이어붙일 절치부심 원모를 하는 지도자가 있는가? 오늘의 풍요에 안주하는 세대는 이미 북한땅이 안중에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땅, 버릴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지금 생활비의 반을 쪼개 생활하며 통일비용에 충당하자는 주장은 미치광이 취급받고 몇표도 얻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리고 김정은, 너, 잘 생각해야돼. 네가 깔고 앉은 그 땅이 네 땅이냐, 너희 김씨 집안땅이냐? 년년세세 빚지다가 설마 여차하면 중국에 땅문서 몽땅 넘기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누가 봐도 한국이 북한보다 세지 않습니까. 힘있는 한국이 왜 북한을 틀어쥐쥐 못합니까. 베이징에서 만난 조선족이 한 말이 생각난다. 틀어쥔다? 어떻게? 그럼 전쟁하잔 말입니까? 이런 반문으로 공포심을 부추기며 와글와글 하겠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차는 둔황시내로 들어왔다. 인구 16만에 7만이 중심부에 산다는데 시가지가 아늑하고 정돈되어 보인다. 지금은 떠났지만 톈진에서 이곳에 온 시장이 중심부 하천에 물도 흐르게 하고 시가지 정돈을 눈에 띄게 해놨단다. 돈을 먹더라도 이렇게라도 해놓으면, 하는 것이 시민들의 평판이란다.
영어로 Dunhuang Sunshine Hotel이라 병기한 양광따쥬뎬(陽光大酒店)에 체크인 했다. 샤워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점심식사하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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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卜记)라는 찬팅인데 당나귀고기 뤼뤄(驴肉)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중국인이 하늘에는 용고기, 땅에는 당나귀고기(天上之龙肉 地上之驴肉)라고 한다지 않는가. 진하지 않은 양념 무침으로 나왔는데 평생 처음 먹어보지만 기름기가 없고 맛이 담백해서 좋다. 황몐은 베이징의 옛날식 짜장면이라는 라오베이징자장몐(老北京炸酱面)이랑 같은 된장맛이다.
점심을 마치고 시내를 벗어나 양관(阳关)을 향해 갔다. 양관을 거치면 톈산난루(天山南路)를 택하게 되고 그보다 북쪽의 위먼관(玉门关)을 통과하면 톈산베이루(天山北路)로 가게 된단다. 두 관이 모두 서역을 드나드는 상인으로부터 관세를 징수하는 목적이었단다. 오늘날은 포장된 길을 이정표를 따라 찾아 다닐 수가 있지만 옛날 옛적에는 길도 없고 주위 사방을 둘러보아도 표적이 될만한 지형 하나 없는 사막에서 어찌 찾아다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욱이나 말이나 낙타의 배설물이 표적이라도 되었을까. 별 걱정을 다하네. 망망한 바다에서도 달과 별을 좌표 삼아 항해했거늘 육지에서의 길찾기가 대수였겠나.
양관보우관을 먼저 들렀다. 마당에서부터 아주 흥미로운 인물을 만나게 된다. 장쳰(张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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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실크로드의 개척자다. 슝뉘 토벌에 절치부심하던 武帝의 특명을 받고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에즈(月氏)와의 동맹을 위해 그들을 찾아 나서지만 오히려 슝뉘의 포로가 된다. 수행군사들은 다 죽었지만 외교관 특유의 세치 혀로 살아남아 십년간 포로생활을 한다. 그 사이에 장가도 가고 아이도 낳았지만 汉의 사자로서의 임무를 잊지는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위에즈를 찾아가지만 이미 슝뉘와의 과거의 원한관계(슝뉘와의 전쟁에서 패한 위에즈는 더욱 서편으로 쫒겨가고 위에즈왕의 해골을 슝뉘 묵돌의 아들이 자랑삼아 술잔으로 썼단다)를 잊고 사는 위에즈왕은 동맹을 거부한다. 이에 실망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슝뉘의 포로가 되지만 슝뉘 찬위(单于: 군주)가 죽어 혼란한 틈에 탈출하여 13년만에 한으로 돌아온다. 그가 파악한 지리와 슝뉘의 내부사정이 후에 우디의 슝뉘 토벌에 큰 역할을 한다. 슝뉘를 내친 후, 한은 실크로드를 확실하게 장악하여 멀리 로마까지 왕래하게 된다. 드라마도 대장편 드라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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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표지석 하나만 달랑 서있다. 봉수대의 흔적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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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에서 둔황 쪽을 바라보는 전경. 땅과 하늘의 경계에 굵은 띠처럼 보이는 것이 나무이고 바로 오아시스다. 포도농원, 목화밭이 있는데 요즘은 목화밭을 포도농원으로 바꾸고 있는 추세란다. 지나다 보니 여기 밭의 특색은 두둑에 심는 우리와 달리 고랑바닥에 작물을 심는다. 두둑은 고랑의 물을 가두어 두는 역할이다.
슝뉘와 한왕조와의 악연은 가오주(高祖) 류방(刘邦) 때부터다. 변방을 어지럽히는 슝뉘를 토벌하러 나선 류방이 오히려 슝뉘에 포위되어 잡힐뻔하다 구사일생하여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시집보내는 굴욕적인 조약으로 화친을 맺는다. 슝뉘가 몽골의 일부인지 몽골이 슝뉘의 일부인지 알 수 없지만 중국북방과 중앙아시아 초원(steppe)을 중심으로 활동범위가 넓은 유목민족이다. 여러 부족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지만 찬위를 중심으로 뭉치면 큰 세력이 되어 중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만리장성의 등장이 슝뉘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디 류처(刘彻)는 10년의 원모심려로 슝뉘의 분열을 틈타 조약을 파기하고 그들을 내쳐서 서역을 탈환해 중국에 복속시킨다. 이때 투항한 인물 중에 김일제(金日磾)는 우디의 중용을 받고, 신라 김씨의 원조라는 설도 있지만 정설은 아닌 것 같다. 류처는 그뒤에도 푸졘(福建), 윈난(云南)을 손에 넣는다. 동으로 눈을 돌려 왕검성을 점령하고 고조선을 뒤이은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만주를 차지한다. 오늘날 동북공정으로 만주에 터를 잡은 고구려와 발해의 중국역사 편입의 단초를 2,100년전에 마련한 셈이다. 우디는 이로써 오늘의 중국강토를 일궈낸 위대한 황제로 칭해진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과도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여 전한이 기울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슝뉘는 오호십륙국 이후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이 없다. 그 일부가 유럽으로 간 훈(Hun)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슝뉘는 굉장한 싸움꾼이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匈奴라는 흉칙한 이름으로 불렀을까. 그 피가 몽골로 이어져 나중에 세계를 재패하는 DNA로 나타난 게 아닐까. 훈도 싸움꾼 기질은 슝뉘와 같아 전유럽을 벌벌 떨게하고 로마를 기울게 한다. 그때까지는 싸움이라면 게르만이 그 이름을 날렸는데 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고 서양사는 기록하고 있다.
보우관은 우디와 장쳰, 실크로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 패자 슝뉘의 흔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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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구청보우위안(故城博物园)에 들렀다. 1978년 일본인이 실크로드 촬영을 위해 지은 세트장. 감독이 씨나리오에 따라 마을이 불타는 클라이맥스 씬을 찍기 위해 태우려고 했더니 둔황시에서 두가지 조건을 냈단다: 재를 일본으로 가져 갈 것. 환경오몀에 대한 배상을 할 것. 할 수 없이 그대로 남겨두고 떠났다. 그뒤로 여기서 40여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챙긴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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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 발전회사(위)와 사막에 펼쳐놓은 발전시설(아래). 날씨와 솜씨가 모두 시원찮지만 아래 사진의 땅과 하늘 경계선에 희끗하게 보이는 것이 집광패널이다. 땅이 넓으니 이렇게 펼쳐놓지 우리나라에서는 펼쳐놓을 데도 없다. 현재 중국의 태양광발전설비량이 세계1위다. 집광패널에 사용되는 폴리실리컨의 생산도 세계1위다. KCC도 생산을 했지만 사업검토시에 200달러/kg이던 가격이 중국의 대량생산과 유럽경제의 퇴조로 18달러까지 하락하여 두손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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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아파트 지붕에 올라앉은 집광판. (우) 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에 깨끗한 아파트단지가 있어 물으니 일명 과부촌이란다. 남자들이 300km 밖 칭하이시요우(靑海石油)에 근무해 한달에 한번 올까말까란다. 강남제비 끓지 않냐고 물으니 임부장은 강남제비를 모르는 것 같다. .
첫댓글 실크로드 반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