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자작나무 옮겨심고 , 콩 베고 , 퇴비 만들 볏짚 자르다보니 몸이 좀 피곤하여
쉬고 싶어졌습니다.
아침에 우리집 강아지 지니를 차에 태우고 집을 나섰습니다.
말은 못하는 짐승이지만 길동무인 셈이지요.
오늘의 목적지는 분천입니다.
분천은 영주와 울진 중간 쯤에 있는 아주 작은 동네입니다.
내가 왜 분천에 가고자 했는지는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영주에가서 울진에 이르는 국도를 택하는것이 가장 쉬운데
다른 길이 없을까 하고 지도를 뒤져보니 정선 - 사북 - 고한 - 태백 - 봉화 의 경로가 있어
그리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사주에 역마살 이라는게 있습니다. 떠돌아 다니는 팔자 라지요.
그런데 따지고보면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자체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습니다.
다만 여건 때문에 그리 못할 뿐이지.
집을 떠난지 두시간 정도 지나서 사북에 도착했습니다.
읍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에 나라에서 공인된 도박장인 강원랜드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산골짜기 광산촌인 사북은 급조된 도박배후산업 (?)인 숙박업소 , 음식점 , 전당포들로 넘쳐났습니다.
카지노에 들어 가보았습니다.
500원 동전을 집어넣고 하는 슬롯머신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 반면에
칩을 가지고 하는 게임에는 거의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몰아치는 대박을 노리는 광풍을 실감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손님의 반 이상이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연을 지닌 여자들일까....
손님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는 모두 찬것 이었습니다.
돈 잃은 사람에게 속 타는것 식히라는 것인지 , 냉수 먹고 속차리라는 것인지 아리송했습니다.
한가지 아이러니 한것은 그곳에 도박중독을 치료하는 안내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중독된 사람에게 그 안내문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서 오지 폐광지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테이블을 가득메운 그 시뻘건 눈들을 생각하면 찜찜한 기분을 떨쳐 버릴수 없었습니다.
사북과 이웃한 고한에 있는 정암사라는 절에 들렀습니다. 이곳에는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곳으로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양산 통도사 , 오대산 상원사 , 설악산 봉정암 , 영월 법흥사 ,
그리고 여기 정암사가 그곳입니다.
이전에 네곳은 가보았는데 오늘로 5대 적멸보궁을 다보았으니 무언가를 해낸것 같은 기분입니다.
드디어 분천에 도착했습니다. 봉평을 떠난지 거의 4시간만에.
정확한 행정지명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입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내 아버지의 체취를 찿고자함에 있습니다.
내 나이 5살때 나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사서 서을에 파는
장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머무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때 엄마를 떨어져 아버지와 그곳에 가있었는데 역 앞의 큰 여관인데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한 여름 장마통에 곳곳에 길이 끊겨 난리인데 어린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몇날 며칠을 울고 불고 보챈 모양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달래려고 사주셨던 짜장면은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습니다.
나의 보챔이 극에 달했는지 동생을 임신하여 해산달이 가까웠던 어머니는 무거운 몸을 하고
군데 군데 끊어진 길을 뚫고 서울에서 내려와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내가 분천을 찿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해드린것이 없으나 마음속에서는 항상 잊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곳에서 50년 가까이 사셨다는 촌로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 여기에는 서울여관과 낙동여관이 있었다고 하느데 내 아버지가 어디에 머무셨는지는
알 길이 없고 , 중국집은 불이나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40 - 50년은 된것 같은 낡은 집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동네가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으나
한때는 북적거렸을 영화의 잔재로 느껴졌습니다.
그 옛날 줄배로 건너던 강 위에 세워진 다리를 건너 되돌아 나오며
아버지 ! 아버지 ! 하고 외치며 발길을 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