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고흐의 빛’을 읽고
떠올랐다. 낡은 소파의 때와 얼룩이 벗겨지며 드러난 연한 주황빛이 그림엽서에 찍혀 있던 고흐 자화상의 배경색을 떠올린 것처럼, 이수경의 소설 ‘고흐의 빛’은 내가 잊고 있었던 어떤 빛깔을 떠올렸다. 그 빛깔은, ‘아를’의 태양 아래서 광기서린 열정으로 캔버스를 채우던 예술가가 사랑했던 찬란한 주황 빛이 아니다. 냄새나는 좁은 다락방에서 값싼 술 압생트를 마시고 위액을 게워 내며 두통에 시달렸을, 절망한 한 인간의 환각을 물들였을 썩은 주황 빛을 닮았다.
88년에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고, 올림픽이 열렸고, 그 이듬해에는 전교조가 출범했다. 나는 교지 편집부였고, 풍물패였다. 출근투쟁을 하는 선생님들을 철문 안쪽에서 바라보며 피켓을 들다가, 재직하고 있던 선생님들에게 익명의 편지를 쓰다가, 담임에게 따귀를 맞았다. 처음은 아니었다. 교지편집부와 풍물패의 지도를 맡았던 선생님은 스물 여덟 살의 국어 담당이었다. 그녀는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학교 식당에서 전교조 결성식이 있었던 나른한 4월의 봄날, 그녀는 결성식에 가지 않았지만 퇴근도 하지 못했다. 그 봄이 다 가기 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월 18일이었다. 풍물패 아이들이 강당에 모였다. 우리는 전교생에게 돌릴 수백개의 검은 리본을 만들었다.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말없이 리본만 잘랐었는지도 모르겠다. 리본은 학생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모두 압수당했다. 또 따귀를 맞았다. 이번엔 여럿이 함께였다.
나는 학교를 혐오했고, 선생들을 증오했다. 자율학습시간에 학교를 빠져나와 대학로의 고등학생 운동단체들을 기웃거렸고, 모레내에 있던 전교조 사무실에 들락거렸고, 학교 근처의 숙명여대와,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야 했던 연세대 동아리방을 찾아다니며 대학생들과 어울렸다. <전태일 평전>을 집에 들고 들어왔다가 당시 대학생이던 오빠에게 빼앗겼다. 87학번이던 오빠는 학교 테니스 동아리 회원이었다. 또 한번 이런 거 갖고 있다 걸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연세대 동아리 방에 꽂혀 있던 구소련에서 출판되었다는 <세계철학사>를 뒤적거렸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니체와 키에르케고어를 교과서 대신 끼고 다녔다. 그 시절 나는 참고서에 나오는 출제 가상 문제들 대신 민주주의, 자유, 해방, 혁명, 신의 죽음, 단독자 이런 것들이 내 세상의 언어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그러나 그 우쭐함이 성적을 담보하지는 못했다. 한때 모범생이었던 나는 “근근이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학생”과 “정신을 딴데 팔고 있는 문제아,” 혹은 “감시가 필요한 미쳐버릴지 모르는 아이” 사이를 오가며 “인서울” 합격권에서 멀어졌다. 상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함께 대학 동아리방을 드나들던 고등학생 무리들처럼 과감하게 집을 나와 공장이나 단체에 취직을 하기에는 용기가 없거나 너무 시니컬했다. 첫해 대학입시에서 떨어졌고, 재수생으로 지내던 해에도 크게 바뀔 것은 없었다. 전기에서 떨어진 후 어머니가 내대신 수험표를 들고 나가시더니 지방 신학대학에 원서를 내셨다. 합격했다. 학교가 자랑스러울 리 없었다. 그렇게 아무 감흥 없이 대학생이 되었다. 스무 살이었다.
J와 Y는 내가 입학한 신학대학의 선배였다. 그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학교를 혐오하다 성적이 떨어졌고, 재수해서 그 학교에 왔다. 우리는 잘 통했다. 운동권이 한줌 밖에 안되고, 그나마 NL계열이 주류이던 학교에서 서너 명 새내기들을 모아 PD 동아리를 만들었고,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를 자처했다. 학내의 주류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하지만 잘난 체는 들어줄 귀가 있을 때나 즐거운 법이다. 학내 운동은 곧 시들해졌고 나는 대신 수원지역의 노동자 문화운동판을 기웃거렸다. 학생회실과 동아리방 보다는 노동운동단체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어쩌면 그 시기부터 였던 것 같다. 내 몸에 축적되고 있던 분노가 불편해 지기 시작했던 것이. 해방, 자유, 혁명 이런 단어들이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 탈주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
강릉의 고향 선후배 사이였던 J와 Y는 재학시절엔 연애를 금기시하더니 졸업이 가까워 오자 결혼했다. 사랑은 그들을 묶었지만, 그들을 그 시절에 묶기도 했다. 나는 동아리 후배들과 함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강릉에 갔다. 결혼식 말미에 우리는 “참사랑”을 합창했다. “우리 새 세상 만들 때까지 우리 변치 말고 투쟁하자고! 그대가 감싸주는 내 어깨에 어리는 뜨거운 그 온기는 노동의 꿈과 희망입니다.” 나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다. 까닭 없이 슬펐다.
졸업하고 나는 지역을 떠나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갔고,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인권운동단체에서 3년 일하다 유학을 결심했다. 떠나고 싶었다. 그리 되었다고 후배들에게 알리던 술자리에서, 내가 가장 아끼던 후배는 내 얼굴에 소주를 끼얹었다.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무엇에 대한 배신감일까,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몇달 후 나는 비행기를 탔고, 그 후로 일년이 지나 J와 Y의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지역에 남아 계속 운동을 했지만, 신문배달과 과외 만으로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기저귀 값과 분유 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J는 결국 다단계에 손을 대었고 중간에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졌다. 그는 야반도주를 했고, 아내에게 책임이 확대적용 될 것을 피하기 위해 위장이혼을 했다. 그리고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이후 그 두사람의 소식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명맥만 남아 있던 동아리를 해체 시키고 그 시절과 단절했다. 여전히 후배들을 만나지만, 우리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이수경의 소설이 왜 잊고 있었던,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불러냈을까. 그 빛깔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열하는 순간에는 아름답지만 일상으로 드리워지면 본래의 색을 잃어 때로 추하고, 때로 폭력적일 만큼 불화하는 그 빛깔 말이다. 그 빛은 타오를 땐 “사물의 색을 모두 삼켜 버린 듯” 강렬하지만, 일상은 강렬함을 좀체 견디지 못한다.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할 것만 같은 뜨겁고 거센 열정은 일상과 화해하기 힘들다. 일상은 대부분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 전화하지 못한 채 응축되어 일상으로 고이는 열정은 썩는다. 어쩌면 소설 속의 “나”와 “재이 아빠”의 찬란했던 그 날들도 쓰다 만 주황 빛 물감과 함께 고여 마침내 썩어버린 것이 아닐까. 푸르덩덩한 토사물 같이 바랜 채 말이다. 그래도 주황빛 기억은 낙인처럼 선명하게 남긴 채 말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가장 밑바닥으로 숨어 버린 나의 주황빛은 어찌되었나.
배신감을 느꼈다는 후배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두 다 떠나가더라도 누군가는 “선량하고 조용한 방글라데시 청년 아불”과 같은 이들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그게 자유, 해방, 혁명 이런 거 이야기 하며 꽤나 잘난 체하던 선배 너 같은 사람이길 바라는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남지 못했던 까닭은 일상과의 불화를 견뎌낼 자신이, 아니, 그 뜨거운 주황빛으로 일상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망할! 무엇을 되돌려야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고 되묻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희망도 없고 기쁨도 사라”지고, “행복하고 찬란한 아침이 있었다는 기억마저 사라진” 채 “돌아갈 길이 없어”서 버텨내야 할 일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형편없이 가난”하더라도 “함께라면 무엇이든 빛나게 바꾸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식의 희망이 그저 무기력할 뿐 아니라 민폐가 되어 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 “발을 들어 등을 내리치게” 될 그 순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우리는, 그 시절 너무 많은 꿈을 꾸었던걸까. 너무 큰 희망을 품었었던 걸까. 세상이 어떻게 바뀌던, 일상은 그저 “여느 때와 다름 없”다는 것을 몰랐었던,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첫댓글 발제가 아닌 독후감이라 글이 너무 좋습니다. 글을 읽고 그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여 쓴 글이라 더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물론 내용은 가슴아프지만요. 감사합니다.
울림이 있는 글은 읽고 난 후 저도 모르게 후우우우~ 하고 긴 숨을 내뱉곤 합니다.. 선생님 글이 그랬어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빛이 바랠지라도 빛나던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허름한 조명으로 겨우 유지되는 빛이라도 꺼지지 않기를, 언젠가는 제부도에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과 발제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