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 181-187
댓글 0
Etc/조선왕조실록
2021. 6. 13.
181
망국 18 - 아관파천(2)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 중 하나는 엄상궁 입니다.
그녀는 5살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 들어가 후에 명성왕후의 시위상궁이 되는데, 못생기고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개 궁녀에 불과했던 엄상궁이 놀랍게도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고, 결국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32세 때 궁궐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5일이 지난 후 고종은 10년 전에 내쫓긴 엄상궁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아관파천이 있기 며칠 전부터 엄상궁은 심복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가마 두 채로 궁궐 출입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마 두 채에 대한 일본군의 경계를 해제시킨 후, 사건 당일 다시 가마 두 채에 고종과 왕세자를 태워 궁궐 탈출을 성공시켰던 것입니다.
1897년 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며, 고종의 아기를 임신했던 엄 상궁은 44세의 나이에 황제의 아들을 낳았고, 엄상궁은 당연히 황귀비로 책봉됩니다.
엄상궁이 낳은 이 아기가 바로 11세에 마지막 황태자가 된 후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는 비운을 맞은 영친왕입니다. 엄귀비는 아들을 그리다 끝내 보지 못한 채 1911년 7월 20일 58세로 눈을 감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졸지에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까지 검토했으나, 아직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고, 일단 협상을 추진하였습니다.
- 두고 보자!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야마기타가 참석하여 로바노프와 5월 28일부터 6월 9일에 걸친 비밀회담을 통해 체결한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입니다.
- 장래 필요한 경우에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것을 약속..
사정이 이러한데도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했으니...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채광권 등 등 각종 경제적 이권을 챙겼고, 알렉시예프를 고문으로 파견해 조선 재정을 요리하였으며, 그 외 구미 열강도 철도 부설권 등 주요 이권을 모조리 챙겨갔습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독립제국을 선포했지만, 허무한 메아리에 불과함은 고종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혜롭고 편한 엄상궁을 택한 고종의 맘이 이해가는 건 왤까~~^
182
망국 19 - 러일전쟁(1)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환궁 및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몇 년간은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국방을 생각하면서 군사력을 키웠으나,
그 규모는 겨우 궁궐수비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조선이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사는 길은 러시아가 일본을 대 놓고 막아 주거나,
일본과 러시아가 계속적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열강 모두가 조선에 관심을 가져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집어 삼키는 것을 막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뿐이었습니다.
고종은 이런 관점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중림국임을 선포 하였지만,
힘이 없는 이런 선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
이런 와중에 조선에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그나마 조선에게 유리한 상황인 러.일 간의 세력균형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나라가 일본에 랴오둥 반도를 내주는 등의 굴욕을 당하자,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을 굴복시키고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 하도록 하였는데(삼국간섭),
이 일 이후 러시아가 공치사를 하면서 만주의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서양 세력에 강하게 맞선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다른 서양세력과 연합군을 이루어 만주로 진출 했고,
의화단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러시아군은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를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 태평양으로 진출할 부동항 하나 장만하려는데 왜?
러시아가 이와 같이 남하정책을 노골화하자 일본과 서양 열강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 조선이 우리 나와바리임을 인정한다면, 만주 철도 경영을 인정하겠소!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 한반도와 만주 철도가 급이 같아?
조선 39도 이북을 중립화하고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일본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사실 일본은 진작부터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청일전쟁 전부터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의 땅 조선에서 로스케와 왜놈들이 또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183
망국 20 - 러일전쟁(2)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대륙진출을 위해 군사력을 계속 증가시켜왔고,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굳혀왔기에, 전쟁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 육군 병력이 120만에 해군도 10년전보다 4배가 커졌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고,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해 갔습니다.
- 전쟁 경비의 반은 우리가 댄다! (영국, 미국)
아무 힘이 없는 고종은 중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나름의 대책을 찾았습니다.
-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싸우더라도 우리는 중립이다! 난 몰라!
일본의 정보망에 의하면 러시아의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 러시아의 힘이 우리보다 훨씬 강하나 여기는 극동!
-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40일 걸려 여기까지 올 주력군은 10만에 불과할 것이다!
- 우리는 25만 이상을 투입할 수 있다!
-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주특기인 선빵 작전, 즉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먼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뤼순항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한 방 맞은 러시아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보다 국력이 훨씬 강한 러시아였지만 실제로는 워낙 땅덩어리가 넓어 주력군이 만주에 도달해 일본과 정상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전쟁 발발 40일 후에야 만주에 도착한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다음과 같이 판단했습니다.
- 러시아가 강하다 하나 극동에서 정상적으로 대규모 전쟁 을 치르기는 어려우므로, 장기전을 펴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자.
반면, 일본은 처음 겪어 보는 대규모 전쟁에서 인적, 물적 자원이 극심하게 소모되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으므로,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했습니다.
- 러시아가 큰 나라긴 큰 나라다!
184)
망국 21 - 러일전쟁(3)
러시아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 불리하다 싶으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
일본은 뤼순항 습격, 봉천전투 등 이런 저런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했지만,
러시아 못지않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렇게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덜 된 관계로 심한 재정적 압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을 어느 정도 장기전으로 끌고 가던 러시아는 패배가 계속되자,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러시아는 러시아 가 자랑하는 유럽 주둔의 대규모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출발시켰고,
1905년 5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했습니다.
일본도 도고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함대를 대한해협에 집결 시켰으며,
5월 27일 새벽, 일본 해군이 2열로 동해를 북상 해오는 38척의 대함대를 먼저 발견하고,
러시아의 사령관이 탄 기함 등 선두에 포격을 가해 기함이 격침되고 사령관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기선을 제압한 일본군은 이틀간에 걸쳐 러시아 함대를 무차별 공격했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오느라 맥이 다 빠진 러시아군은 세계 해전사상 보기 드문 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러일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발틱 함대가 무너지긴 했지만, 실은 일본과 러시아 모두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쟁을 끝냈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일본은 러시아라는 거대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 러시아 못지않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1년 예산의 7배가 넘는 전비를 부담하여 재정이 바닥이 났습니다.
미국과 영국도 더 이상 일본에 원조를 하거나 일본 국채를 매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 일본이 더 커지는 건 곤란하거든?
러시아도 본토에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는 등
제정 말기에 극심한 혼란이 찾아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형편 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리저리 재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를 자임해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을 종결하고 포츠머드협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 했지만, 러시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 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본다면, 러시아가 참패하기는 했으나, 러시아가 끝내 전쟁을 이어갔다면,
당시 국력으로는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배상금 한 푼 없는 포츠머드협약을 수용한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나라의 존망을 건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이겼습니다.
일본은 엄청나게 운이 좋았고, 조선이 엄청나게 불운했던 것입니다.
185
망국 22 - 을사조약(1)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 전인 1903년 12월에 이미 대한제국,
즉 한국을 일본의 지배 아래 둘 것을 내각회의 에서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은 1904년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군사를 동원해 서울을 사실상 점령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야욕의 일단을 드러 내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국의 통신 분야 장악,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경부선 철도 개통과 경의선 철도 건설, 필요한 토지의 무자비한 수용, 어업권 확보, 헌병의 치안권 보유,
왕릉에 대한 대대적 도굴 등 사실상 한국을 거덜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 승리로 러시아가 조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자, 일본은 예정대로 한국을 손안에 넣기 위한 수순을 밟았습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 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왔고,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만나 아래와 같은 내용의 일왕 친서를 내밀며 고종을 위협 했습니다.
-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시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 15일, 이토히로부미는 다시 고종황제에게 보호조약의 승인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치를 일본 통감에게 맡긴다는 충격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나라를 내어 놓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 외교권 이양
- 한국을 통감부 아래에...
이 무렵,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 받아 궁궐을 포위 함으로써, 한국은 공포분위기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조약 승인 요구를 받은 고종황제는 이를 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 이 조건을 인가함은 나라가 망하는 것과 다름이 없소.
- 짐은 목숨을 잃을지언정 결코 인가할 수 없소!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을 대사관으로 불러 위협과 매수에 나섰으나,
대부분의 대신들은 줄곧 거부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 이 일은 우리가 판단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외다.
- 마땅히 폐하께 아뢰고 결정해야 하오이다.
현재 아베 정권이 추구하는 바가 뭘까?
불과 100여년전의 일이 현재 일본 정부와 무엇이 다를까?
186
망국 23 - 을사조약(2)
고종황제와 대신들이 위협에 쉽게 넘어가지 않자, 이토히로부미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강요했습니다.
궁궐 안팎이 일본 군대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드디어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어전회의가 열리자, 고종황제도 대신들도 조약의 체결을 반대했지만,
힘없는 자가 하는 반대나 거부의 모양새는 처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5시간 넘게 어전회의가 이어졌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고,
이에 초조해진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는 직접 대신들에게 가부를 따져 물었습니다.
이토히로부미 앞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불가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결과적인 찬의를 표하였습니다.
이들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합니다.
이토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 중 5명의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된 것이라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한규설 참정대신이 억울함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기 시작했고,
이토히로부미는 “별실로 데려가고, 더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날 밤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칙재를 강요하였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1. 일본은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지휘한다.
2. 한국은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은 한국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는다. 일본은 필요한 곳에 이사관을 두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불과 1세기 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이와 같았습니다.
187
망국 24 - 나라가 망하다!(1)
아! 원통하구나. 아!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
이 민영환은 한번 죽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진력하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다.
- 충정공 민영환의 유언 -
-----------------------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겨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었고,
영국, 미국, 독일, 청나라 등의 주한 공사들은 모두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였으며,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면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명실공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 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위에서 본 장지연의 논설 등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하게 꾸짖기도 하였고,
백성들이 궐기하여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을사5적의 처단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 에 전달하기 바란다.
한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나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켜 힘으로 일본을 몰아 내려는 시도를 하였고, 을사5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불과 100년 전 우리 모습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188
망국 25 - 나라가 망하다(2)
을사조약 체결에 조정 대신 민영환은 비분강개하는 글을 남긴 채 자결을 했고,
그 소식을 들은 행랑채에 살던 인력거꾼도 뒷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주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보다 앞서 주영 공사 이한응이 조약체결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결하였습니다.
- 슬프다! 종사는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겠구나!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친형 홍만식도, 강직한 대신 조병세도, 학부 주사 이상철도,
평양친위대 김봉학도, 경연관 송병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일본에 항거함과 아울러 고종과 대신과 백성의 각성을 구하였습니다.
이렇듯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이 극렬했지만,
이완용 등은 오히려 당초 다소 부득이한 찬성에서 적극적 찬성으로 선회하며 조약 하의 정국을 기정사실화 하였습니다.
- 이리 될 게 뻔한 일이었는데, 어찌할 힘도 없으면서 우리에게 다 덮어씌운단 말이냐!!!
사실 이완용 등 5적이 없었더라도 조약은 좀 늦춰졌을 지언정 체결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동의를 얻은 일인데다, 당일 총칼로 위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일에 대놓고 도장을 찍은 자에게 돌아갈 동정은 있을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들의 그 후 행보는 총대를 맨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한국의 지사들은 을사조약 체결 후 앞에서 본 것처럼 더러는 목숨을 내던지고,
더러는 무력으로 일본군과 을사 5적에 맞서기도 하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때부터 일진회 같은 것을 만들어 일본의 정책에 적극 협조한 세력 역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힘이 없었으므로...
-----------------
이토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으로 들어온 후 내각을 이완용 등 친일파로 채우고,
각 부문별로 고문관을 두어 한국 내정까지 틀어쥐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토히로부미를 통감이라 부르지 않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하는 한편,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이준, 이상설을 보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위법성 을 대외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 힘 이었습니다.
한국호가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189
망국 26 - 나라가 망하다(3)
헤이그 밀사 파견이 알려지자,
고종 황제의 입장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1907년 7월 16일 어전회의,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다그쳤습니다.
- 이제 방법은 폐하께서 일본 천황폐하께 사과하거나 대한문 앞에 나아가 하세가와 사령관께 사과하는 것 뿐입니다!
이완용은 더 나아가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력히 요구 하였습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와 사전에 논의된 일 이었습니다.
- 양위로써 사죄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의 살길입니다!
같은 날 내각회의는 고종 황제의 퇴위를 결정했습니다.
- 우리에게 이런 권한이 있나? 나도 몰러!
고종 황제는 원군으로 박영효를 부르는 등 완강히 양위를 거부했지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종 황제의 완강한 저항이 계속되자 17일 저녁에서 18일 새벽까지 이완용, 송병준 등은 내관도 다 내보내고 전화선까지 끊은 채 고종 황제를 끊임없이 압박해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고야 말았습니다.
-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하노라!(양위가 아님)
일본 측은 대리 청정의 의사를 양위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황제와 황태자도 없는 가운데 약식으로 양위식을 갖고는 이를 세계 각국에 알려 기정사실화 시켜버렸습니다.
- 황제는 커다란 걸림돌이야. 노련하고 수가 많거든!
고종 황제는 자신이 물러나면 이제 500년 조종이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양위를 끝내 거부했지만, 결국 이렇듯 강제로 퇴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단했던 44년의 재위였습니다.
양위식이 있고 나자 일본은 곧바로 정미7조약을 셀프로 체결했습니다.
- 조선 정부가 통감의 밑에 있음을 확인하는 내용!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에는 군대 해산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비록 미약하나마 존재하는 한국 군대 자체를 없애, 편하게, 아주 편하게 합병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시위대 1연대장 박승환이 항의의 뜻으로 권총 자결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격분하여 거리로 진출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집단 탈영해 의병 부대에 대거 합류 했습니다.
- 어서 오시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전국의 의병 부대는 연대를 모색해 무려 1만명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주에 집결한 후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 까지 하였으나, 일본의 대토벌작전으로 수많은 의병과 의병장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더러는 국경을 넘어 항전했고, 더러는 망국 후 독립군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190
망국 27 - 나라가 망하다(4)
때는 1907년! 새 황제 순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순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가 박한 것을 보면 순종은 아비 고종에 여러모로 미치지 못했나 봅니다. 그러나 이름뿐인 황제가 뛰어난들 또 무엇하겠습니까.
순종은 전에 본 상궁 출신 엄씨의 아들이자 동생인 영친왕 을 황태자로 삼았고, 황태자는 곧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 말이 유학이지, 실상은 인질!
새 황제는 이토히로부미의 예상대로 일본의 야욕 충족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정미7조약에 따라 주요 자리에 일본인을 직접 배치했습니다.
아울러 친일파로 내각을 채우는 한편, 보안법, 출판법 등으로 일본에 대한 저항을 막고, 삼립법, 동양척식주식회사법 등 한국의 국부를 일본이 뽑아갈 수 있는 모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을 일본에 복속시키는 행위였습니다.
-----------------
한국 침략의 선봉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다는 평가가 있는데, 을사조약 등 한국이 일본에 합방되는데 일련의 조치를 모두 취한 원흉 중의 원흉인 이 자가 온건파라 불릴 정도라 하는 것은 그만큼 일본에 급진적이고 광폭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위인으로 추앙 받는 일본인 이토히로부미! 그러나 한국에는 의사 안중근이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해주 양반가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웠고, 어려서 부터 무예와 사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처음에는 개화지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고종 퇴위, 군대 해산의 과정을 지켜보며, 의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 이제 나라가 망한 것과 다름이 없다. 어느 세월에 자강을 한단 말이냐. 직접적인 항쟁이 필요하다!
안중근은 1907년 직접적인 대일항쟁을 위해 연해주로 떠났고, 그 이듬해에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의병을 이끌고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09년에는 11명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자르고 피의 맹세를 나누기에 이르렀습니다.
- 나라를 찾는데 목숨을 바친다!(이 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중근이 목숨을 바칠 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