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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승이시여
- 장공 김재준 목사임 영전에
-문익환(목사)
* 이 시는 고 문익환 목사가 스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옥중에서 작시한 것을 장례예식 때 조시로 낭송한 것이다.
스승이시여
큰 스승이시여
하늘 같은 땅 같은 스승이시여
당신이 가실 날이 이렇게 오고야 말았군요
구만리 장공 훨훨 나는 마음으로
이 강산 굽이굽이 안 가는 데 없이 불어예는 슬픈 바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87년 긴 세월 당신을 떠메고 다니느라 늙어 버린 몸
마침내 벗어 버리고 가셨군요
홀가분히 아주아주 홀가분히
오늘 아침에는
나의 샛별도 숨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셨다는 하늘 무너진 소식을 들으려고
그러나 지금 여기 청주 미평동 148번지
6사 상 10방은 겨울답지 않게 온화하기만 합니다
자그마한 질화롯가에 둘러앉아
밤새우며 정담 나누듯 따뜻하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
오래 뜸하던 시정에 반짝 불붙이며
저를 잠자리에서 깨워 주신 건
제 아버님만이 아니셨군요
두 분이 소리 없이 성큼 들어서시어
나의 두 어깨에 오른손 왼손 얹으시고
이마를 툭툭 치시며 일으켜 주신 거지요
틀림없지요
저는 이제 여기서 아버님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까지 만지며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 그리우면 볼을 비비며 소리 없이
고마운 눈물도 뜨겁게 흘리는 거죠 뭐
뜨거운 눈물로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허영심 같은 걸 지우는 거죠 뭐
스승이시여
우리의 큰 큰 스승이시여
죽어서 사는 길을 몸으로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여
우리를 죽음을 사는 길로 몰아넣으시고
그 길을 앞장서 가신 지독한 스승이시여
너무 나무라지 마소서
저는 벌써부터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죽일 놈이지요
스승의 부음을 기다리는 후레자식이지요
그래도 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 무너지는 소식인 줄 알면서도
당신의 몸은 이제 할 일을 유감없이 다 했으니까요
하고도 남을 만큼 해냈으니까요
날개 접힌 수리를 풀어놓아
높푸른 창공 유유히 날게 하고
몸은 조국의 거름이 될 때가 되었으니까요
캐나다에서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사모님
당신이 도착하시는 날로 쓰린 듯이 나아
이 방 저 방 분주히 들락거리시던 사모님이시지만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당신의 날개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요
우리의 마음이요 꿈이요 하늘이요 자유이니까요
우리 조국이요 사랑이니까요
아마 1975년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이 나라는
마치 기수를 잃은 군대처럼 갈팡질팡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오시라고 띄운 이 못난 제자의 편지에
당신의 회답은 불호령이었습니다
“너희 젊은 것들은 뭐냐?다 늙은 내가 나가야 한다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 아니냐?”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꽁지에 불이 붙은 호랑이처럼
우리는 온통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꼭 미친놈 같았겠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당신에게 배운 게 그것뿐인데
스승이시여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버이 같은 아니 어버이보다 더한 스승이시여
당신은 함경북도 경흥에서도 전형적인 샌님 아니었습니까
머리는 좋아 글공부는 잘하셨다지만
그 보잘것없는 몸매에다가
꾸물거리기는 왜 그리 꾸물거리는지
가는 귀 먹은 사람은 한참 귀를 곤두세워야
겨우 알아들을 소리로 웅얼거리는 못난이
그러나 그 작은 몸 속에서는 두만강 푸른 물 소리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백두 영봉에서 흘러내리며 쩌릉쩌릉 살아 튕기는 물소리였습니다
풀려난 죄수들 면천한 천민들이 땅을 파는 변방이었지만
당신은 거기선 드물게 선비의 끄트머리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덕에 샌님이 되셨지만
당신의 글에선 흙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죄수들의 울분이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천민들의 뚝심이 불끈불끈했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하며
손끝만 까닥거리며 백성의 고혈로 살아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의 좀상스런 모습을 껄껄 웃어 주는
말갈기 휘날리며 대륙을 주름잡던
고구려의 기개가 있어 죽은 역사를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그 흙내음에서
절대로 절대로 정직한 땅의 양심이 고요히 번져 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속이지 않는
남 속이느니 차라리 내가 속아 주는 양심
속아 주면서도 결코 결코 속지는 않는 시퍼런 땅의 양심이
봄바람 타고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모든 간사한 유혹을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양심의 소리 따위 껄껄 웃어 주며 짓눌러 오는 검은 손을
가볍게 튕겨 버릴 수 있는 순발력도 주셨습니다
그 흙내음으로
당신의 학문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학이었습니다
가시덤불 갈아 엎고 씨를 뿌리는 농학이었습니다
감옥이란 감옥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있고
즐거운 생활이 꽃피는 주택 단지를 세우는 공학이었습니다
온갖 불의와 부정을 때려부수는 군사학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자유와 정의를 기둥으로 평화의 나라를 세우는 정치학이었습니다
그 울분으로 당신은
선친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자유가 좋아서 기독교인이 되셨지만
거기도 툭툭 끊어 버려야 할 사슬이 많았군요
되지 못한 우월감으로 콧대만 높은
서구인들의 전통과 풍습은 더 무거운 사슬이었습니다
공자 왈 맹자 왈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슬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문자주의였습니다
유교의 사슬을 끊어 버린 당신의 울분은 다시
기독교의 사슬도 끊어 버리고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뼛속까지 길들여진 노예 근성을 못 털어 버리고
뒷걸음치는 우리를 이끌고 당신은 앞장을 서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자유의 황무지를 갈아엎는 보습이었습니다
그 뚝심으로 당신은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과 지성들이 이천 년 걸려 쌓아 올린
교리의 금자탑들을 허무셨습니다
이 겁쟁이들 세상이 무서워서 숨어드는
도피성을 아무 미련 없이 무너뜨리시고
길바닥으로 내모셨습니다
박봉랑 박사 서남동 목사가 본회퍼의 비종교적인 기독교 해석을
현영학 교수가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당신으 종교적인 언어가 말끔히 가신 찬송가 가사를 지으셨습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 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 가리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지요
하늘과 땅 그리고 세계사에 울리는 그 격조 높은 가사는
두 절로 끝나 있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알아 3절을 붙여 완성해 주기를 바라셨던 거죠
그 메아리를 잡으려고 저는 몇 해 징역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권모술수로 온몸이 절어 있다는
같이 앉아 차만 마셔도 부정 탄다고 기피당해 오던 정치인들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횐가 뭔가를 만들고
의장이 되어 사회봉을 두드리시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지만
농담이라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내놓은 말이었습니다
이단이요 분열분자로 파문을 받았습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신으로 손수 세우시고
온갖 정성 다 바쳐 키우시던 조선신학교는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두려워할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적 기독교라는 기치 아래 동지들이 혁신 교단이라는 걸 만들자
단신으로 이와 결별하고 나오신 ‘당신의’ 담력이
그 정도로 움츠러들 수야 없었지요
남이야 성서 파괴자라고 하든 말든
이단이니 뭐니 하며 칼을 빼들고 달려들든 말든
당신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오던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었습니다
속이 정 언짢으시면 며칠 잠적 정도는 하셨지만
송창근 박사님이 찾아내시어
신앙과 학문을 교회 정치와 얼버무리지 않겠다고 한마디 하면
평온한 모습으로 당신은 다시 나타나시어
우리와 허물없이 섞이셨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당신의 말소리는
마냥 웅얼거림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당신이 큰 소리 치시는 걸 들은 사람이 있다면
천릿길이라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가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고함 소리 길바닥에 밖으로 나가는 일 없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팔락이는 심지도 끄지 않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었습니다(이사야 42:2-3)
한국 신교 백년사에 당신만큼 많은 글을 쓰신 이가 없지요
많은 그 글을 다 모아 저울에 달아도
당신의 그 고요한 침묵 당신의 그 웅얼거림에는 못 미칩니다
그것은 역사의 증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고요한 침묵과 웅얼거림으로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역사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위선과 독선으로 독기를 뿜는
살인과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오만불손한 기독교의 역사를 당신은 툭 꺾어
민족사 속으로 겸손하게 끌어들이는 만용을 부리신 겁니다
드디어 두 역사는 소리치며 하나로 어울려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분단의 찌꺼기를 깡그리 쓸어내고 통일의 대해에 이른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만년 청청하게 우리와 함께 서 계실 스승이시여
낙락장송은 정몽주의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도 낙락장송입니다
1987년 이 준열한 역사의 절벽에 온몸으로 버티고 섰는
버티고 서서 역사를 증언하는 낙락장송이십니다
정몽주가 옛 질서를 지키려다가 죽어 간
고풍창연한 솔이라면
스승이시여 당신은 불어오는 바람과 맞서서
내일의 꿈을 휘날리는 낙락장송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영웅은 아니십니다
당신은 우리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샌님이십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당신은 한국 교육의 풍운아 ‘한신’의 정신이요 창설자이십니다
기독교장로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보다 전에 당신은 분명 예수의 제자요
우리의 다시없는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전에 당신은 우리의 형제이십니다
종로 네거리에 나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우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분명 우리와 한겨레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조금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겨레입니다
겨레의 양심입니다
아- 당신은
저 두꺼운 역사의 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렵잖이 무너뜨리시고
백지장 뒤집듯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마치 똥강아지 코끝으로 사립문을 밀고 나서듯이
당신이 하신 일을 우리라고 왜 못하겠습니까
갓 풀려난 죄수들의 울분이 가슴에 살아 있고
갓 면천한 천민들의 뚝심만 있다면
당신이 지난날 해낸 일
우리도 내일 또 모레 해보일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고마운 스승이시여
길이 우리와 함께 계시소서
1987년 1월 28일 자정에
- 청주에서 불초생 익환은 엎드려
첫댓글 어떤 제자나 도반이 스승의 영전에 이렇게 사무치는 글을 써 올릴 수 있겠는가? 그들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 죽임 당한 자들은 잠들었으나 죽인자들은 구멍이 나 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