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이 재 성
가을비가 몰고 온 냉기는 한겨울 추위 못지않다. 설마, 설마 하다 몸과 마음까지 얼어 붙게 할 때가있다. 어제 같은 날이 그 격이다. 난로라도 피워 가장(家長)의 체면을 세워 본다고 한 것이 결국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낙인이 되고 우리 내외지간은 더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작년에도 요긴하게 써먹던 난로다. 어려서 군불을 때본 경험이 있어 난로에 불 부치는 것쯤은 식은죽 먹기다. 폐 종이상자를 찢어 난로 밑에 불쏘시개로 깔고, 마른 나뭇가지를 가는 것부터 굵기 순으로 차곡차곡 넣은 후 불을 지폈다. 헌데 이게 웬 일인가? 활활 타올라야 할 불꽃은 보이지 않고 매캐한 연기만 쉼 없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궂은 날씨의 저기압 탓이려니 했다. 장작을 쑤석거리며 제 아무리 부채질을 해 보아도 연기만 더 날 뿐 불붙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집안이 연기로 가득 찼다. 모든 창문을 열어 제켜 보지만 소용없다. 인내하며 부엌일을 하던 안식구의 얼굴에 근심 반, 원망이 가득하다. 눈을 비비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마른 기침을 연신 하더니 결국엔 냉파리처럼 쏘아붙인다. “오소리라도 잡을 작정이유? 일삼아 앉아서 불 하나 제대로 못 지피고…… 변변치 못하게 시리! 여자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잖아도 눈치가 보이고 속에서 천불이 나는 판에 옆에서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감지덕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설마하니 이 나이에 불장난이 재미있어 재티를 뒤집어 쓰고 눈물 범벅을 해가며 허둥대겠는가? 비 맞은 중처럼 멎을 줄 모르는 아내의 비아냥에 잘 버티고 있던 내 이성(理性)의 고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내 이 놈의 난로를 낼 당장 고물장수에게 팔아 치우고 말 거여. 그래야 당신 맘이 편하지.” 한마디 던지고는 바가지에 물을 가득 퍼다 난로 안에 훌훌 뿌렸다. 피시식거리며 잔불 꺼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그 소리에 비위가 더 상했다. 바가지를 주방으로 홱 집어 던지고는 서로 말없이 돌아섰다. 우리는 어제, 각 방에서 옆구리 시린 밤을 보내야 하는 큰 벌을 받았다. 홧김에 큰 소리는 쳤지만 정작 고집을 피워 고물장수를 부른다는 것은 소갈머리 없는 짓이다. 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안식구가 출근하기 바쁘게 식식거리는 마음으로 난로를 부위 별로 잡아 제쳤다. 연통을 뜯어 내고 구석구석 살펴보다, 아뿔싸! 뒤 통수를 치고 말았다. 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연통 중간 부분에 개폐(開閉) 장치를 해 놓은 것이 있는데, 착각을 하여 열어 놓는다는 것이 그만 꼭꼭 닫아 놓고 부채질만 열심히 해 댔던 것이다. 불문으로 들어간 공기가 연소를 시킨 후 굴뚝을 통해서 연기는 원활하게 빠져 나가는 소통이 이루어져야 불이 잘 피는 것이 당연하거늘, 난 그 순리에 역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이 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궁이만 뜯었다 맞췄다 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옛날에 어른들은 아궁이에 불이 피지 않으면 오히려 아궁이는 뒷전에 두고 굴뚝 청소부터 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 할 무렵이면 연중행사로 굴뚝 후비는 모습을 봤다. 선인들의 경험에 의한 지혜를 볼 수 있는 낡은 그림이다. 굴뚝의 기능은 배출이며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리적인 동력장치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진보하고 발달한 우리의 현시대에서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상호간의 평균적 소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부장적 시대의 하향식 소통은 이 제 막힌 굴뚝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부자지간이라고 해서 예외 일 수는 없는 일이다. 불현듯 큰 아이가 어렸을 때 일이 떠 오른다. 어린 녀석이 유치원에서 돌아 와 집에 있을 시간이면 늘 오락실에 가 살곤 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 하고 게임을 잘 한다기에 제 적성인양 대견한 생각이 들어 동전을 쥐어 주며 묵인했었다. 아비나 아들이나 철부지이기는 매 한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화장대 위의 동전이 하나, 둘씩 없어졌다. 불러 앉혀 놓고 호되게 닦달을 했다. 물론 종아리에 피 멍 자국이 서너 줄이나 남도록 혼 줄을 냈다. 어린 자식이 땟국 물 가득한 얼굴로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기도 하고 아비의 일방적인 다그침에 이 녀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다 해 봐” 설마 제까짓 녀석이 이 상황에서 무슨 대꾸를 할까 싶었다. 그러나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급소를 한대 맞은 꼴을 당했다. 안 가려고 해도 자제가 안 된다고 했다. 집에 와 있으면 천정에서 오락기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아른거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락실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제 힘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왜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억울한 투다. 아하 그렇구나! 내가 처음 당구를 배울 때 잠자리에 들어서도 천정에 대고 쓰리쿠션을 쳤었지!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가슴 뭉클한 사나이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한번 꼭 안아주고 지폐 한 장을 쥐어 주며 맘 편하게 오락실로 보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밝게 웃으며 거스름돈 구천구백 원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후엔 제 스스로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아이의 생각을 물어 보고 귀담아 들어주길 잘 한 것 같다. 아들녀석은 요즘도 ‘친구 같은 아버지’라고 제 친구들에게 얘길 하는 모양이다. 들어가는 곳이 있으면 나가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 기능의 우열은 가릴 수가 없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여긴다면 우리가 원하는 에너지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굴뚝에 공을 들여 멋을 내고 치장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늘 정갈하지 못한 후미진 곳에서 외부에 노출 된 채 껑충한 모습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한 낱 매캐한 연기나 뿜어내는 배출구에 대한 경솔한 업신여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 달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다. 나라를 이끌어 보겠다는 높으신 분들의 일성이 너나 없이 소통이다. 자연적 대류의 흐름처럼 아래에서 위로 원활하게 소통시킬 수 있는 뚫린 굴뚝과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지금 우리 집 굴뚝엔 뽀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 오르고 난로 위엔 빨간 밤고구마가 먹음직스럽게 잘 익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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