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시기를 빕니다.
얼마 전에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6년 부활절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 진화론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돌연변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의 결정적인 도약이 바로 부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일찍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하고 외쳤습니다. 우리 역시 이를 믿고 또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어디에나 죽음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속량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23) 죽음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날 억울하게 혹은 비참하게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쟁과 테러, 자연재앙, 전염병 등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며 죽고 있습니다.
일 년 넘게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광기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며 무고한 이들을 공포와 절망으로 내몰고 있고, 아울러 지구촌 전체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강진으로 하루아침에 많은 사람이 집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많은 희생자와 이재민이 속출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절규는 해외에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도 들립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절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와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에 대해 피해자들과 국민이 크게 울부짖고, 직장과 일터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점점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명, 반지하 셋방에서 매일 빚 독촉과 생활비에 시달리는 영세민들의 절규, 병실과 요양원에서 통증에 지친 환자들의 신음 등 고통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계속되는 이런 고통의 소리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규 앞에 부활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데, 이를 통해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아니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도대체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아직도 불의와 죽음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그리고 이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겠지만, 분명하게 변화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끝까지 견지하셨던 행동의 위력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다음, 당신의 부활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선포하시거나 유력한 사람에게 알리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울고 있는 여인을 찾아가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5) 하고 위로하셨습니다. 가련한 이의 눈물을 닦아주심으로써 그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절규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 절규를 기꺼이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곧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거기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주시고, 자비로 싸매주시고, 연대와 관심으로 치유해주십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사실 주님의 이런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은 부활 이전에도 쉽게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중에 누구보다도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받는 이들을 가까이하셨고,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엾은 마음으로 대하심으로써(마태, 9,36; 14,14; 15,32; 루카 7,13 등 참조), 그들을 곤경에서 구해주시고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따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주님이 늘 견지하신 마음이고, 이는 사람이 되신 주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세상 전체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 가엾은 마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증오를 물리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정말 변화된 것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앞으로도 계속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활기를 띠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부활이 명백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은 마음에서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거의 무능하거나 연약하게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이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서서히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마음이기에, 그 어떤 힘보다 더 강하고, 어떤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1코린 1,25 참조).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올해 우리 교구는 특히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초대하십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사회 안의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을 동반하고 돌보며 지원하기를”(「모든 형제들」, 64항)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상을 보고, 존엄성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직시합시다. 그들의 손을 잡아 우리의 가슴에 끌어주어, 우리가 함께 있음의 온기가 전달되고, 우정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게 합시다.”(「자비의 얼굴」, 15) 그러면 우리는 고통과 어둠을 몰아내는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사랑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아멘.
2023년 부활대축일에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