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광혜군.
임진왜란때 북쪽으로 피난가면서 선조임금이 광혜에게 실권을주어 의병을 일으키게하여 국난극복에 공을 세웠다.
광혜는 후궁의 둘째아들로태어나 기반이 약했다.
나중에 선조가 광혜보다도 9살이나 어린 왕비를 맞이하여
영창대군을 얻자..광혜의 세자위치를 뺏앗을려고 했다.
이때 북파 정인립과 이인점 그리고 궁녀 김개시가 광혜를 도왔다.
선조가 북파들을 귀양보내라고 하자
그다음날 선조는 갑자기 죽어버렸다.
#북파-조식선생의 제자들.행동하는 선비들. 임란의병활동을 계기로 등용.#
광혜가 즉위하자
방납법을 폐지하였다.
방납은 대리업자가 나라에 필요한 재물을 미리바치고
마을 고을에 그 값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백배까지 비싸게 백성들에게 물렸다.
방납업자들과 배후세력양반들의 반발이 세었다.
광혜는 임진왜란때 백성들과 동거동락하면서 서민의 삶을 알았기에 개혁정치와 올바른 국제판단을 할수있었다.
청.명전쟁이 일어나자
새롭게 기마군단(후금의 팔기군)으로 떠오르는 여진족 누르하치군대에
부패한 명나라는 계속 패하였다.
명의 압력과 사대주의에 젖은 조선의 모든 관료들의 압력때문에 광혜는 조선군 1만2천 군대를 요동으로 파견..
강홍립장군에게 광혜는 부탁했다.
전세가 불리하거든 몰살당하지말고 청에게 항복하여 살아남으라고..
그리하여 4백년이지난 오늘날 요동지방에는 조선의 박씨들이 많다고 한다.
광혜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왕권이 불안해지고
북파중 한측근이 서인과 남인을 숙청할려고 음해(문경세제 이판순사건,포도대장회유,용의자들에게 거짓자백)를
한것이다. 그리하여 각종사화가 일어나고 피바람이 불게되었다.
또 김개시(본래 천민출신 궁녀. 김개똥)가 왕의최측권 권력으로 왕의결정에 중대한 입김을 불어넣고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변심하였다.
즉 쿠데타움직임을 왕이 의심하지못하게 안심시키는것이었다.
수많은 상소가 올라와 쿠데타의 경고를 전하였으나
그때마다 김개시가 왕을 안심시켰다.
광혜는 풍수지리설에 현혹되어 궁궐을 많이지었다.
그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심해졌다.
1천명의 쿠데타군이 왕궁을 공격하여
김개시는 즉결처형하고
대북파도 대숙청하고
광혜는 덕수궁에 16년간 감금되어있던
인목대비에게 끌려가 30가지의 죄목으로 폐위당하게 된다.
광헤는 절해고도 제주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늙은 영감이라는 욕지거리를 들으며 19년을 살다가 죽었다.
광혜군의 묘소는 남양주에 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기에
천하의 성군이될 재목이 폭군으로 전락하게되었늘까?
첫째로 내우외환이 있었지만
결국은 최 측근 두사람때문에 망한것이다.(김개시,이이첨)
왕이되면 링컨처럼 측근이나 정적이나 따지지않고
그 일에 최적임자를 골라 각사명을 맡껴야 한다.
친구는 친구고 사명은 사명이다.
새로운 인재와 썪일수있는 분위기쇄신..
특히 왕이 되고나서 가장 수혈받아야할 피는
공신이나 측근의 피가 아닌..
그옛날 임진왜란때처럼 아직도 백성들과 고생하던 의인들을 찾아서 등용해야한다.
사람은 똥누고나면 달라지는 법..
인재활용에있었어도 자연의 흐름처럼 흐르고 새로와져야 할것이다.
인사가 만사..사람관리가 만사라는 뜻..
기존과 새물이 기차철로처럼 항상 같이 균형과 조화를 얼마나 자 이루어가게하느냐?
택견에 그 지혜가 담겨있다..위동네 아랫마을 상생공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