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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저널리즘 [ Yellow Journalism]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선정적이고 비도덕적인 기사들을 과도하게 취재, 보도하는 경향을 이름
1896년 허스트의 <뉴욕저널>에 실린 ‘노란 꼬마(Yellow Kid)’. 노란 꼬마가 등장하는 ‘호건의 골목길’은 두 신문사 간의 신문 전쟁에 있어 양보할 수 없는 만화였다. 1890년대에 뉴욕 시의<월드(World)>지와<저널(Journal)>지 간에 벌어진 치열한 경쟁에서 사용된 술수들을 지칭한 데서 생겨났다. 조지프 퓰리처는 1883년에 뉴욕의 <월드>지를 인수하여 화려하고 선정적인 기사와 대대적인 선전을 통해 미국 최고의 발행부수를 확보했다. 퓰리처는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고 믿는 한편,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만평과 사진을 화려하게 쓰고, 체육부를 신설해 스포츠 기사를 비중있게 다루었으며, 흥미와 오락 위주의 일요판도 처음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이른바 옐로 저널리즘을 탄생시켰다. 1895년 캘리포니아 광산재벌의 아들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뉴욕시로 옮겨와 경쟁지인 <저널>지를 인수하면서 퓰리처의 아성에 도전했다.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이그재미너(Examiner)>지를 대규모 발행부수로 대단히 성공적인 신문으로 만든 경력이 있었던 허스트는 선정주의와 홍보, 일요특집판 등을 이용하여 경쟁지들을 물리쳐 뉴욕시에서도 같은 업적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는 편집진의 일부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데려왔으며 또 일부를 퓰리처의 신문에서 스카우트해 왔다. 그 가운데는 <선데이 월드(Sunday World)>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끌던 연재만화 '옐로 키드(The Yellow Kid)'를 그린 시사만화가 리처드 F. 아웃콜트도 있었다. 아웃콜트의 변절 이후 <월드>지의 만화는 조지 B. 룩스가 그렸는데 두 경쟁지의 연재만화가 사람들의 열띤 관심거리로 등장하면서 두 신문 간의 경쟁은 옐로 저널리즘이라고 지칭되었다. 이러한 총력적인 경쟁과 그에 따른 판매촉진방법들은 두 신문의 발행부수를 크게 늘렸으며 또한 미국 여러 도시의 신문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옐로 저널리즘 시대는 20세기로 접어든 직후 <월드>지가 점차 선정주의적 경쟁에서 물러서면서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옐로 저널리즘 시대의 몇 가지 기법, 예를 들면 전단표제라든가 천연색 만화, 풍성한 화보 등은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옐로저널리즘 [Yellow Journalism]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굴든수프 살인사건
역사상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첫 번째 재판"은 그 자체로 피 냄새가 물씬한 자극적인 치정 살인사건이었다.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가 있었고, 그중 두 번째 남자(금발의 근육질 남자, 심지어 직업도 터키탕 마사지사였다)가 토막난 시체로 발견되고, 곧 여자와 세 번째 남자가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섹스와 폭력과 돈과 낙태가 뒤얽힌, 흥미진진한 사건이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치정살인사건은 인류 역사 이래로 수없이 되풀이되어왔다. (구약 성서에만도 벌써 다윗 왕과 밧세바, 우리아의 끔찍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이 그토록 유명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문 때문이었다. 독자 여러분: 실종된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실종된 친구나 친척, 지인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실종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그 정보를 <저널>에 상세하게 적어 보내주십시오. '출판용 아님'이라고 표시된 이 전언들은 엄격한 비밀을 보장하며 유지될 것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는 가장 믿을 만한 기자들에게만 맡겨질 것입니다. 기자들은 사회 전체가 해결 여부에 관심을 쏟고 있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만 그 정보를 사용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는 실종자가 반드시 희생자일 것이라고 짐작하지 마십시오. <저널>에 사실 관계를 보내주시면, 살인자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널>로부터. 이건 경찰의 공고문이 아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신문 <뉴욕 저널>(이하 '저널')에서, 경찰이나 탐정, 자경단 역할을 앞장서 자처했던 신문사의 이름으로 내건 공고문이다. 사건의 시작은 1897년 6월 26일 엄청나게 무더운 여름날, 뉴욕의 이스트 강에 둥실둥실 떠내려온 붉은색 꾸러미부터다. 매우 무겁고, 화려한 붉은색과 금색 방수천으로 포장되었으며 밧줄 매듭이 단단하게 묶인 이 꾸러미 안에는 사람의 팔이 들어 있었다. 팔 두 개였다. 팔 두 개가 근육질의 가슴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처음엔 의대생들의 해부학 실습의 장난질로만 여겨졌던 이 주인 없는 팔은, 곧 26번가의 벨뷰 시체 공시소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증언한다. 사후강직이 일어나지 않은, 기이한 방식으로 잘린 팔. 공시소 감독관은 "이 몸 토막 임자는, 24시간 전에는 살아 있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곧 뉴욕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을 추적할지 말지 꾸물거리던 경찰보다 먼저 뛰어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자들이다. 다시 말해 <타블로이드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중심인물은 살인범으로 지목된 두 사람보다도, <저널>의 발행인 랜돌프 허스트와 <뉴욕 월드>(이하 '월드')의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다. 퓰리처와 허스트는 그리스의 그 익숙한 비극 이래 늘 되풀이됐던 부자간의 비극을 그대로 압축한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퓰리처는 우리에게 익숙한 '퓰리처상'의 그 퓰리처가 맞지만, 그 퓰리처 '이전의' 퓰리처의 맨 얼굴을 내보인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였던 가난뱅이 퓰리처는 남북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서부에서 돈을 끌어 모아 동부 뉴욕으로 건너와 신문사 건물을 세웠다.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였던 <월드>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인쇄실" 위로 거대한 금색 돔을 설치했다. 미국으로 이민오는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보는 광경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퓰리처의 금빛 건물이었다. 퓰리처는 시들시들했던 신문 <월드>을 사들인 다음, 최고의 기자와 편집자들을 끌어 모았고 "단조롭고 특징 없는 지면을 대담한 헤드라인과 선정적인 목판 삽화를 곁들인 지면으로 재탄생"시켰다. "선적 소식과 시장 동향은 이제 1면 기삿거리 취급을 받지 못했다." 퓰리처는 "여성 독자, 이민자 독자"를 주요 독자층으로 상정했고 "뻔뻔스럽게 자극적이고 요란한 언어, 감상, 최신 유행을 좇는 호기심 위주의 행사"를 쉴 새 없이 외쳐댔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유명해지자, 여성 기자 넬리 블라이에게 직접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지시하여 완수케 했고, 화성에서 운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화성에 사는 '독자들'이 볼 수 있게 거대한 광고판을 설치하려고 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컬러 만화 <옐로 키드>를 신문에 실었다. 이 만화가 인기를 끌자 "경쟁 신문사에서는 <월드>를 만화 저널리즘이라고 비웃었"고 그런 연유로 "옐로 저널리즘(황색 언론)"이라는 별명이 탄생했다.
▲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만화 <옐로 키드>. <뉴욕 월드>에 실렸던 이 만화는 곧 <뉴욕 저널>로 옮겨간다. (출처 http://cartoons.osu.edu/) <월드>의 프리랜서 기자로 일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퓰리처와 정반대 위치에 있었다. 그는 미국 본토박이였고, 캘리포니아의 상원의원을 지낸 광산왕의 아들이었다. "딱 보기에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신문을 이용해 돈을 버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빠른 속도로 흡수했고, 퓰리처로부터 빼먹을 것을 다 빼먹고 나자 10년 뒤 <저널>을 사들여 환골탈태시켰다. 수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다수의 컬러 만화가 실렸고, "좋은 헤드라인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센트라는 가장 저렴한 가격을 매겼고, 뉴욕 시민들을 설레게 할 엄청난 양의 광고를 실었다. "잉크와 펄프로 만들어진 놀이동산"에서 뛰노는 그는 "의족을 단 도둑이 양철 지붕 위에서 발작을 일으킨 것만큼이나 요란하게" 도시를 침략했고, <월드>와 스승 퓰리처가 서서히 둔하고 멍청한 공룡처럼 보이게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오죽하면 굴든수프 살인사건을 시민들에게 해결해보라며 현상금을 내걸었을 때, 어떤 시민은 이것이 허스트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겠는가. "신문사에서 의사를 통해 적당한 시신을 입수해, 이 사건이 가능한 한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극적인 효과를 노리며 시신 토막을 여기 저기 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허스트는 매우 유쾌해하며 이 파격적인 추리를 신문에 실었다. 굴든수프 살인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저널> 등의 신문사들은 빠르게 발전해갔다. 일요일자 부록이 아니라 평일에도 컬러 삽화가 실렸고, 속보 기사에도 컬러를 사용하게 됐으며, 처음으로 법원에 전화선을 설치해 목격자 증언을 식자공에게 실시간으로 들려줌으로써 "증인들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듯 동시에 활자화"되었다. 시민들은 신문을 통해 살인사건의 실시간 정보를, 말이 되든 안 되든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온갖 시시콜콜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선정적인 신문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피에 굶주린 사람들의 열광이 신문을 부추겼다. 신문은 시민-구경꾼들에게 당대의 허구적 영웅 셜록 홈즈가 되어보라고 부추겼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치 굴든수프 살인사건의 당사자인 양 착각했으며, 그 살인사건에 실제 연루된 범인들은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재창조하며 현실과 허구를 섞어버렸다. 그렇게 신문(과 범죄)은 뉴욕 대도시 시민들의 '일상'이 되었고 판단의 준거가 되었으며 (영화가 대중화되기 전) 최고의 오락거리가 되었다. 굴든수프 사건이 끝나갈 때쯤 허스트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것이 "현대 언론의 진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라고. "행동-이것이 새로운 언론의 지표다. 경찰이 이스트 강 살인 사건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생각할 때 <저널>은 스스로 탐정단을 조직했다. 신문은 선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에 바로 잡아야 한다." '황색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고 해서 19세기 말부터 "신문이 더러워졌어"라고 비웃을 일은 전혀 아니다. 범죄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읽을거리는 이미 19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부터 싸구려 주간지 '페니 드레드풀스'와 싸구려 소설 '다임노블'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월드>나 <저널> 같은 신문들의 '속보'가 가능해졌다는 것, 그러니까 범죄를 선정적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좀 더 정교하게 발전했을 뿐이며 그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 <뉴욕 저널>에 실린 살인범들의 초상. 다만 예전에는 이것이 1페니짜리 '싸구려'였지만, 19세기 말에는 퓰리처와 허스트라는 신문 재벌들끼리의 사생결단이, 범죄가 돈벌이가 된다는 걸 알아차린 이 재벌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저널리즘의 선정적 속성을 아주 빠르게 변모시킨 것이다. <타블로이드 전쟁>의 결말에 나오다시피, 20세기 말의 저널리즘은 이미 19세기 말에 완성되다시피 했다. 1830년대 선정적인 신문들의 살인사건 보도기사만 보고 에드거 앨런 포가 <마리 로제 미스터리>를 썼던 것처럼, 19세기 말 신문들은 추리소설을 모방하며 팩트를 픽션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말들의 전쟁, 타블로이드 전쟁. (이 와중에 입을 열 수 없는 머리 없는 시체만 딱하게 됐다) 그렇게 피 냄새는 잉크 냄새로 바뀌었다. 20세기가 시작되었다. 루퍼트 머독이 신문사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테드 터너가 처음으로 방송국을 산 것도 네드 브라운에게는 익숙한 일로 여겨졌다. 전에도 그런 일을 보았던 것이다. 허스트가 충격적인 범죄를 집중 취재한 방식, 곧 중요한 내용이 있건 없건 모든 각도에서 끝없이 뉴스를 업데이트해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바로 텔레비전 뉴스 채널의 24시간 보도의 전신이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9106
‘황색 저널리즘’은 어떻게 탄생했나? 미국에서 1880년대와 1890년대는 도시의 팽창이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진 시기다. 1840년 인구 25만이 넘는 도시는 1개, 1860년 인구 5만이 넘는 도시는 16개에 불과했지만, 1890년엔 인구 25만이 넘는 도시가 11개에 이르고(그중 3개 도시는 100만 이상) 전 인구의 3분의 1이 도시에 거주했다. 인구 8천 명 이상의 도시는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으며, 도시 인구는 5천만에서 7천 6백만, 점유비로는 전체 인구의 22.7%에서 32.9%로 증가했다. 역사학자 아서 쉴레진저(Arthur M. Schlesinger, Sr., 1888~1965)는 1878년부터 1898년까지를 ‘도시의 발흥(the rise of the city)’ 시기로 보았다.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 퓰리처와 <뉴욕월드> 도시의 발흥은 대중신문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일간지의 총 발행 부수는 1850년 75만 부에서 1890년 830만 부로 급증했다. 그렇다면 이들 신문의 성격은 어떠했던가? 1900년까지도 평균적인 미국인의 학교교육 연한은 5년 미만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눈높이를 맞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언론사에서 1830년대에서 1850년대 초까지를 ‘페니 신문(penny press) 시대’, 1860년대 후반부터 1900년까지를 ‘뉴 저널리즘(new journalism) 시대’라고 한다. ‘뉴 저널리즘’은 1)신문 가격이 싸고, 2)진보적ㆍ개혁적이고, 3)읽기가 쉬웠으며(외양은 물론 내용도 통속적), 4)뉴스 기능을 강조하는 등의 특성으로 이전의 저널리즘과 구별되었다. 특히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기자(reporter)의 발달이 이루어져, 이 시기를 가리켜 흔히 ‘기자의 시대(Age of Reporter)’라고 한다.
이 ‘뉴 저널리즘 시대’의 선두 주자는 단연 <뉴욕월드(New York World)>를 발행한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였다. 퓰리처는 특권계급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독자들의 호기심도 충족시키는 이중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이와 관련, 데니스 브라이언(Denis Brian)은 [퓰리처: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 혹은 신문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여자들은 그가 경멸하는 이른바 귀족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굉장한 저택과 화려한 생활, 약점, 재산 등에 대한 기사를 그림과 함께 실음으로써 자신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고도 여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는 귀족들의 어떤 점도 미화하지 않았고, 그들 중 일부를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퓰리처는 뉴욕의 일간지 발행인 중에서 최초로 별도의 체육부를 만들었으며, 살인 사건 보도에 있어 살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현장 스케치 그림을 싣는 등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이는 자신이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공상에 빠진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행이 되어 다른 신문들도 퓰리처의 방법을 그대로 베끼게 되었다. 퓰리처는 재벌을 비난할 때에도 흥미 위주의 비교 기법을 선보였다. 예컨대, 2억 달러에 이르는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William H. Vanderbilt, 1821~1885)의 재산을 금으로 바꾸면 350톤은 된다면서 이것을 들어올리려면 힘센 사람 7000명이 필요하고, 운반하려면 말 1400마리가 필요하다고 표현하는 식이었다. 여기에 밴더빌트의 저택에서 겨우 몇백 피트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것이 공정한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특권층에 속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번 퓰리처는 노동자들도 궁극적으론 부자가 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신문은 ‘아메리칸 드림’을 미화하는 동시에 그 드림을 이룬 부자들을 공격하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냈다. 또 다른 퓰리처 연구자인 조지 주어젠즈(George Juergens)는 그런 ‘정신분열증적인 보도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뉴욕월드>는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을 해적이라 공격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반사회적이고 천박하다고 공격하면서, 그들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성공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미화했다. 이 신문은 발행될 때마다 거의 매번 자기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모순이 바로 매력의 일부였다. 이 신문은 자신을 만들어낸 사회의 이상주의와 어리석음을 반영했을 뿐이며, 그것은 그 신문이 사람들의, 사람들을 위한 신문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자극적인 신문이 고귀한 사회적 목표에 봉사하는 법” 퓰리처는 “선정적인 신문이 고귀한 사회적 목표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뉴욕월드>의 기자들에게 자제력은 결코 미덕이 아니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어떤 인물도 신성불가침이 아니며, 도가 지나친 질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갖도록 압박했다. 기자들의 무례함에 대해 항의가 들어오면 퓰리처는 기자들이 워낙 열정이 넘쳐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곤 했다. 유대계 헝가리인으로 17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퓰리처는 개혁적이었지만 인종적 편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아일랜드인, 독일인, 헝가리인을 제외하곤 그는 외국인들을 혐오했다. 그는 영국의 왕족과 귀족들에 대해서도 거친 독설을 퍼부어댔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은 더럽고 불결한 악취 속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으며, 프랑스인에 대해서는 볼테르, 루소, 위고를 찬양하는 구제불능의 멍청이들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야만인’이라고 무시했다. 그럼에도 브라이언은 퓰리처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퓰리처와 같이 지적이고, 경험 많고, 전체적인 시야를 지닌 사람이 이처럼 편협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 시대에 아일랜드인은 독일인을 경멸했고, 독일인은 이탈리아인을 경멸했으며, 이탈리아인은 유대인을 경멸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아마도 그들 모두를 경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그러나 퓰리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이탈리아인 노동자들을 대신해 사회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이상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었다.” 퓰리처는 언젠가 자신의 친구에게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외국인이니까 결코 대통령이 되지는 못할 걸세. 하지만 난 언젠가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런 신조하에 퓰리처는 18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1837~1908)의 승리, 1886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아브람 휴위트(Abram Hewitt, 1822~1903)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언론 권력자로 우뚝 섰다.
퓰리처는 1887년부터 넬리 블라이(Nellie Bly, 1864~1922)라는 23세의 여기자를 앞세워 ‘잠입 취재’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 그녀는 기자가 직접 위험한 사건에 개입하거나 모험적인 행사에 참여하여 그 경험을 토대로 보도하는 이른바 '탐정 저널리즘(detective journalism)' 또는 '스턴트 저널리즘(stunt journalism)'의 원조가 되었다. 블라이는 정신병자 연기를 해 정신병원에 환자로 들어간 뒤 열흘 동안 생활하면서 그곳에서의 인권 유린을 취재해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고, 더불어 병원 예산이 57%나 늘어나는 당국의 조치가 취해졌다. 다음 해에 블라이는 고객으로 위장해 거물 로비스트를 찾아가 어떤 법안을 매장시켜 달라고 요청한 다음, 로비스트에게서 뇌물을 줘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얻어내 그걸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또한 절도를 저질렀다는 허위 혐의를 만들어 교도소에 수감된 뒤, 그곳에서 벌어지는 여성 수감자 학대를 폭로하는 기사를 씀으로써 당국이 여성 간수들을 채용하게끔 만들었다. 꼭 위장 잠입 취재를 하지 않더라도 센세이셔널하게 폭로할 거리는 많았다. 평소 편두통에 시달려온 블라이는 7명의 의사를 찾아가, 그들의 진단과 처방을 비교ㆍ평가하는 기사를 썼다. 흥미롭게도 7명의 진단과 처방이 모두 달랐다. 이 기사는 의사들의 실명을 밝힘으로써 그들에게 망신을 주었다. 퓰리처는 1889~90년에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를 신문 판매에 적극 이용했다. 1873년에 출판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대영제국의 모든 자신감과 과도한 면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퓰리처는 블라이에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직접 하면서 기사를 써보내라고 했고, 독자들에겐 실제로 여행에 걸린 시간에 가장 가까운 답을 내놓은 사람에겐 공짜 유럽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 결과 거의 100만 통의 응모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덩달아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인기도 높아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72일 6시간 11분만에 세계일주를 마친 블라이는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72일간의 세계일주 기록은 몇달이 지나지 않아 깨졌지만, 훗날 블라이는 미국 우표에 여성 언론인 4인방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뉴욕 브루클린엔 그녀의 이름을 딴 놀이공원이 생겼으며, 영화 <슈퍼맨>의 열혈 여기자 로이스 레인(Lois Lane)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이런 일련의 잠입 취재 폭로 기사와 이벤트 연출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신문 부수는 쑥쑥 늘어났다. 이즈음 퓰리처는 시력을 거의 잃어 죽을 때까지 시각 장애인으로 지내게 되지만, 마키아벨리를 뺨칠 정도의 책략으로 자신의 신문을 완전히 장악해 계속 주도권을 행사해 나갔다. 퓰리처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란 재미없는 신문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893년 발행 부수가 50만을 넘어서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던 퓰리처에게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1951)였다.
허스트의 <뉴욕저널>과 황색 저널리즘의 시대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광산업자의 아들인 허스트는 처음에 퓰리처의 <뉴욕월드>에서 기자로 훈련을 쌓은 뒤, 1887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를 인수해 선정적이고 개혁적인 색깔로 1890년까지 재정적으로 성공적인 신문으로 만들었다. 허스트가 철도 회사의 무법적인 권력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인민의 대변인으로 변신해 개혁운동에 앞장선 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상업주의 전략이었다. 그의 신문 철학은 독자들의 입에서 “원 세상에!(gee-wiz)”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1896년 허스트는 <뉴욕저널(New York Journal)>을 인수해 퓰리처의 <뉴욕월드>에 도전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때에 ‘대중신문’의 모든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두 신문이 벌인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비롯된 저널리즘을 가리켜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고 하는데, 1896년에서 1901년까지 전성기를 누린 황색 저널리즘은 ‘영혼이 없는 뉴 저널리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황색 저널리즘’이란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허스트의 주특기는 ‘사람 빼내가기’였다. 그는 돈으로 퓰리처의 <뉴욕월드> 기자들을 빼내간 건 물론이고 <뉴욕월드>에 첩자까지 심어놓았다. 그래서 퓰리처는 기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암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허스트는 1896년 퓰리처의 <월드>지 일요판인 <선데이 월드>에 대항해 <선데이 월드>지의 제작진을 몽땅 비밀리에 돈으로 매수해 <선데이 저널>을 창간하였다.
<선데이월드>지에 게재된 인기 만화 ‘노란 꼬마(Yellow Kid)’의 작가 리처드 펠튼 아웃콜트(Richard F. Outcault, 1863-1928)도 <선데이저널>로 가 ‘노란 꼬마’를 그렸다. 아웃콜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만화 시리즈 ‘호건의 골목길(Hogan's Alley)’을 만든 사람으로, 이 만화의 주인공은 반짝이는 눈동자에 웃을 때면 앞니가 빠진 자국이 드러나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이 아이는 노란색 잠옷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노란 꼬마’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선데이월드>는 새로운 만화가를 고용해 계속 ‘노란 꼬마’를 그리게 함으로써 두 신문 사이에 ‘노란 꼬마’ 경쟁이 붙었다. 두 신문들 간의 상호 공격적인 PR로 당시 뉴욕 시내 어디에서나 ‘노란 꼬마’를 볼 수 있었다. <뉴욕프레스>의 편집국장 어빈 워드맨(Erwin Wardman)은 끔찍한 사건과 스캔들을 이용하는 두 신문의 방식을 가리켜 ‘황색 언론(yellow press)’이라 불렀는데, 이게 바로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신문들은 ‘열쇠구멍 저널리즘(keyhole journalism)'이라는 말도 들을 정도로 선정성 경쟁을 벌였다. <뉴욕월드>지가 선정적인 문장과 편집을 사용하게 된 건 역마차, 전차, 버스 통근자들의 욕구에 맞춘 결과였다. 이 신문은 판 크기를 줄이고 제목 활자를 크게 하는 동시에 그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자 했다. 퓰리처와 허스트의 신문 전쟁, 승자는 누구인가 이 두 신문의 ‘황색 저널리즘’ 경쟁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6년 쿠바에 파견된 허스트 신문의 삽화(揷畵) 기자 프레데릭 레밍턴(Frederic Remington, 1861~1909)이 쿠바에 전쟁이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으므로 귀국하겠다고 했을 때에 허스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림만 그려 보내면 전쟁은 내가 만들어내마(You'll furnish the pictures and I'll furnish the war).” 스페인 전쟁이 ‘허스트의 전쟁(Hearst's war)’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만약 1895년에 일어난 쿠바 폭동 사건 당시에 허스트가 발행 부수 경쟁에서 퓰리처계의 신문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1865년에 창간된 <더 네이션(The Nation)>은 1만 부를 넘지 않는 잡지였지만 영향력은 컸다. 이 잡지의 편집인 에드윈 고드킨(Edwin L. Godkin, 1831~1902)은 황색 언론을 맹렬히 비판하곤 했다. 스페인 전쟁이 선포되기 두달 전인 1898년 2월 24일자에 고드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언론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지난 주에 이 두 신문이 한 행동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사실을 전반적으로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지어내고, 심지어 이런 지어낸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엉터리 없는 제목을 달고,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이들 신문의 이슈가 사회 전체로 전파되고 있다. 단순히 더 많은 신문을 팔기 위해 인간이 이런 잘못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그러나 황색 저널리즘은 저지하기 어려운 대세였다. 1900년경 미국의 도시 지역에서 발행되던 신문의 적어도 3분의 1 가량은 극도의 황색 저널리즘 경향을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이 먹고 사는 밥은 광고가 아닌가. 1890년대는 광고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1880년대 퓰리처에 의해 처음 시도된 일요판 신문의 경우는 광고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건물의 한쪽, 운행 중인 전차, 종이 가방, 종이 성냥에까지 광고가 등장했다. 특히 1892년에 발명된 종이 성냥은 3년도 안되어 광고매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00년대 초엔 ‘경품(giveaway)’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했다. 미국 저널리즘 상업주의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퓰리처와 허스트의 신문 전쟁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허스트는 끝내 황색 언론인으로 머물렀지만 퓰리처는 정반대로 점차 선정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1901~1911) 동안 퓰리처의 <뉴욕월드>는 미국 언론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문이 되었고, 언론인들 사이에선 ‘신문인의 신문(The newspaperman's newspaper)’으로 불리울 정도로 변모했다. 퓰리처는 1903년 컬럼비아 대학에 언론대학원을 세우라며 2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돈을 기금으로 삼아 1917년 ‘퓰리처상(Pulitzer Prize)’이 만들어진다. 컬럼비아대 신문방송학과가 주도하는 선정 위원회가 수여하는 퓰리처상은 이후 언론ㆍ문학ㆍ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를 자랑하는 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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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싸워라.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 항상 모든 당파의 선동가들과 싸워라.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 항상 특권 계층과 공공재산의 약탈에 항거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는 안된다. 항상 대중의 복지에 헌신하라.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항상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에 의한 것이건 약탈적인 빈곤에 의한 것이건,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걸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조지프 퓰리처 조지프 퓰리처는 ‘퓰리처상’을 만든 미국의 신문인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세인트루이스에서 <포스트 디스패치>사로 시작하여 언론사 경영에 성공하였다. 이후 뉴욕으로 가 <뉴욕 월드>를 매수,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등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상업성과 정론언론의 사이를 넘나드는 신문사 경영으로 현대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었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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