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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
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
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1.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
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
(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
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
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
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
처를 밝혀두었다.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
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
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
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
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
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梁書와 南史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모을 募」로 쓴 데
반해 통전에서는 「사모할 慕」를 쓴 것이 차이점이다. 「사모할
慕」와 「모을 募」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도 극히 비슷한 탓에
옮겨 적다 혼동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법흥왕 김원종의 성명이
慕秦≒募秦(모진)이라니… 지금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왔다. 이병도 박사는 그의 「삼국사기 역
주」에서 「어떤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고 있는 「모진」은 법흥왕의 성명
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법흥왕의 성을 모(MO)로 적고 있는 사
례가 국내 문헌에서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
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
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사진9-봉평신라비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
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
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
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
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
≒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
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
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
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
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
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
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
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
다.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
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
(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
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
명히 적고 있다.
2. 慕씨는 慕容氏
법흥왕의 성씨가 모씨라고 하더라도 慕와 慕容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모=모용으로
볼 수 있는 단서는 충분하다.
첫째 신라로 들어간 모용씨가 혼동을 피해 모씨라는 단성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모용씨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慕
容(모용)이요 또 하나는 「慕輿(모여)」이다. 모용황의 부하 장수
가운데 慕輿 (모여니)란 인물이 고국원왕의 모친과 왕비를 사
로잡아갔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을 비롯해 절충장군 慕
輿根(모여근)과 慕輿蓋(모여개) 등 「모여」란 성씨를 가진 인물들
을 모용씨 왕국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다.
慕輿씨 역시 慕容씨와 비슷한 위치의 귀족이었다. 같은 慕容씨가
漢字(한자)로 성씨를 표기하면서 慕容과 慕輿로 나뉜 데 대해 구구
한 억측이 많지만 나는 원래 선비족의 말이 한문으로 꼭 맞아 떨어
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해 본다.
어쨌든 慕씨의 성을 漢字로 표기하다 보면 「慕容」이 되기도 하고
「慕輿」가 되기도 했으니 혼동의 소지가 있다. 간단히 「慕」로
표기하면 더욱 분명한 성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글자 複姓(복
성)을 한 글자 單姓(단성)으로 쓸 수 있다.
또한 복성을 단성으로 표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 그 예
는 백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서」 백제조에 나오는 백제
의 8대 귀족 성씨 가운데 沙(사)씨는 원래 沙咤(사타) 혹은 沙宅(사
택)씨였고, 眞(진)은 眞慕(진모), 木(목)은 木
(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모두 단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복성은
부를 때나 표기할 때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복성이 아니라 단성을 쓰는 문화였다. 朴(박)-
昔(석)-李(이)-鄭(정)-孫(손)-薛(설) 등 유력 귀족의 성씨가 모두
단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성 「慕容」 또는 「慕輿」
를 단성 「慕」로 표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봉평 신라비를 토대로
할 때 법흥왕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미스터 모(MO)」였고 이는
慕容씨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법흥왕이 분명 신라 中
古代(중고대) 金씨 왕실의 嫡統(적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왕들도 성을 「慕」로 썼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국 역사
서에서 신라왕의 성씨를 金(김)으로 적기 시작한 것이 진흥왕 시대
부터라고 한다면 법흥왕이나 진흥왕 때 비로소 金씨 성을 썼다고
봐야 한다. 나는 법흥왕이 慕容씨 성을 金으로 바꿨다고 보는데 이
점은 뒤에서 다룬다.
3. 慕容씨 시조신화와 신라(가야) 시조신화의 유사성
慕容씨가 신라 지배층이었다는 또다른 증거로 慕容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시조신화-건국신화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은 慕容
씨의 시조신화다.
< 乾羅(건라)는 모용외의 12대 조상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금은
으로 된 갑옷과 안장을 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晋書
권108)
우선 乾羅(건라)란 이름이 新羅(신라), 加羅(가라)와 비슷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앞서 밝혔지만 선비족은 위대한 추장이나 조상의
이름을 「부족의 명칭」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호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新羅(신라)는 「새로운 乾羅(건라)」라고
풀이해보면 딱 떨어진다. 소설적 추리를 발휘하고픈 유혹을 받는
대목이다.
또 乾羅의 신화는 신라 박혁거세의 개국신화와 김알지 천강신화와
유사하다. 하늘에서 사내아이가 든 알이나 금궤짝이 내려오고 백마
가 알을 지키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의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慕容씨의 시조 신화가 담담하다면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
화는 내용이 극적인 차이가 있을 뿐 하늘에서 내려오는 현상, 백마
의 출현, 흰색 분위기(흰닭이나 흰말의 등장), 몸통을 금은 갑옷으
로 보호한 乾羅와 금 상자(금 알) 속에 보호된 사내아이 등 신화의
모티브가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 신화는 모용씨와
무관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혁거세 신화가 후대에
창작-채록됐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나오지 중국 正史書
(정사서)에 기록된 사례가 없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시조신화가
일찍부터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마도 신라
金씨(모용씨) 왕실 내에 「시조 백마 天降 신화」가 전승돼 오다
진흥왕 시절 「國史(국사)」를 편찬할 즈음 개국시조 박혁거세와
金씨 왕실의 조상 김알지 설화에 적당히 배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가야 수로왕의 下降설화도 신라 김알지 설화
는 물론 모용씨 시조 乾羅설화와 유사성이 높다.
4. 모용씨 步搖冠과 신라-가야 금관
모용 부족 명칭의 유래에 관련해 모용부의 한 추장이 걸을 때 관의
장식이 흔들리는 것을 좋아해서 부족사람들에게 그런 관, 즉 步搖
冠(보요관)을 쓰게 하니 걸을 때 흔들린다는 뜻으로 「步搖」라 했
으며, 이 보요가 와전돼 「모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모용 부족
기원설로는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모용 부족이 보요관을 즐겨
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린 것으로 보아 새 깃이나 나뭇가지 등의 길다
란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가야의 금관 또는 금동관
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鳥羽冠(조우관)이나 樹木型 立飾들은 걸음
을 걸을 때 흔들리게 돼 있다. 모용부의 큰 특징이 보요관을 착용
한 데 있다면 신라와 가야의 관모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할 근거가
충분하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묘에서 발견된 장신
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
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
-왜국으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신라 金씨왕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金씨왕, 나아가 5세기 초
일본열도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하는 왜국왕들도 선비족 모용씨의
일파로 보고 있다. 서기 42년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首露王(수
로왕)이 下降해 155년을 다스렸다는 가락국기 기록은 신화로 본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이란 일본의 옛 책에는 수로왕으로 보
이는 임나(=가야) 임금의 성명을 「牟留知(모류지)」로 적고 있으
니 신라 법흥왕의 성명 牟卽智(모즉지)와 통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
출판사)」에 나오니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慕容씨에서 金씨로의 創氏改名
이제는 慕容씨가 언제 어떻게 해서 金씨로 성을 바꿨는지 알아볼
차례다. 서기 521년 법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정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을 모(慕, 募)로 적고 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524년 봉
평신라비에 법흥왕의 성을 牟(모)로 적고 있다고 할 때 적어도 524
년까지는 신라왕의 성이 「慕」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64년
진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측은 왕의 성을 金으로 적고 있으
므로 「慕」에서 「金」으로의 성씨 변화가 일어난 때는 524~564년
사이 40년간으로 좁혀진다.
법흥왕 시절일 수도 있고 진흥왕 在位기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
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
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에서 든 필자의 책 2부 참고).
모용씨에서 金씨로의 성씨 변화는 엄청난 사건인데 전혀 기록이 없
다는 데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
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
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
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
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
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
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
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
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
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
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
(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
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
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이 때문에 金
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
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
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1천4백년 이상 기마족
의 기억을 망각한 채 철저히 농경민족으로 바뀌고 말았다. 핏줄 속
에 흐르는 기마족 특유의 진취적인 유전인자를 애써 억눌러 가면
서…
http://andongkimc.kr/php7/board.php?board=ankim79&page=451&command=body&no=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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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
주말에 또 비소식이 있네요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주말 오후에는 전국이 흐리고
자정부터 내일까지 비또는 눈 소식
나들이 하실분들 참고를 하세요
시작하는 지금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