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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_22_225p The widening horizon
What we have learned of the techniques and potentialities of mass propaganda cannot be simply obliterated. It is no more possible to return to the small-scale individualist democracy of Lockeian or liberal theory, partially realized in Great Britain in the middle years of the nineteenth century, than it is possible to return to the horse and buggy or to early laissez-faire capitalism. But the true answer is that these evils also carry with them their own corrective. 우리가 배워왔던 대중 선전의 기술들과 가능성들은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소규모의 개인주의 시대 로크의 민주주의 시대나 자유주의 이론 민주주의 시대로 돌아 갈 수 없다. 이런 것들은 19세기 중간 영국에서 일부 실현된 것이었다. 당연히 말이나 마차의 시대나 자유방임주의 초기의 발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정답은 이와 같은 폐단은 그것의 교정책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The remedy lies not in a cult of irrationalism or a renunciation of the extended role of reason in modern society, but in a growing consciousness from below as well as from above of the role which reason can play. This is not a utopian dream, at a time when the increasing use of reason at all levels of society is being forced on us by our technological and scientific revolution. 그 교정책은 비이성주의 숭배나 현대 사회에서 확대된 이성의 역할 폐기가 아니라 이성이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의 철두철미한 인식의 증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이성의 역할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은 기술적인, 과학적인 혁명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중이다.
Like every other great advance in history, this advance has its costs and its losses, which have to be paid, and its dangers, which have to be faced. Yet, in spite of sceptics, and cynics, and prophets of disaster, especially among the intellectuals of countries whose former privileged position has been undermined, I shall not be ashamed to treat it as a signal example of progress in history. It is perhaps the most striking and revolutionary phenomenon of our time. 모든 다른 역사에서의 진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진전은 비용과 손실이 있다. 지불되어야 할. 그리고 위험이 있다. 직면해야 할. 하지만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 특별히 한 때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다 점점 그 위치를 잃어가는 나라에 속해 있던 나라의 지성인들 사이에 많이 발견되는 냉소주의자들, 파멸의 예언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에서 진보의 눈에 띄는 예로서 간주하더라도. 아마 이런 것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눈에 띄고 혁명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Chapter 6_23_226p The widening horizon
The second aspect of the progressive revolution through which we are passing is the changed shape of the world. The great period of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in which the medieval world finally broke up in ruins and the foundations of the modern world were laid, was marked by the discovery of new continents and by the passing of the world centre of gravity from the shores of the Mediterranean to those of the Atlantic. Even the lesser upheaval of the French revolution had its geographical sequel in the calling in of the new world to redress the balance of the old. But the changes wrought by the twentieth- century revolution are far more sweeping than anything that has happened since the sixteenth century. 진보적인 혁명의 두 번째 측면은 우리가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15~16세기의 위대한 시기에 중세는 파산했다. 그리고 근대 세계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 시대는 신대륙의 발견이 눈에 띄며 세계사의 무게 중심이 지중해시대로부터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시대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이 더 작은 동란은 지리적인 연속성을 가져왔다. 신세계와 구체제의 균형을 새로 맞추는. 그러나 20세기 혁명에 의해 초대된 변화들은 훨씬 더 광범위했다. 17세기 이래로 일어났던 어떤 것들보다도.
After some 400 years the world centre of gravity has definitely shifted away from western Europe. Western Europe, together with the out-lying(외딴, 외곽) parts of the English-speaking world, has become an appenage(부속물) of the North American continent, or, if you like, an agglomeration(덩어리) in which the United States serves both as power- house and as control-tower. Nor is this the only, or perhaps the most significant, change. It is by no means clear that the world centre of gravity now resides, or will continue for long to reside,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with its western European annex. It appears to be the great land-mass of eastern Europe and Asia, with its extensions into Africa, which today calls the tune in world affairs. The 'unchanging east' is nowadays a singularly worn-out cliché. 400년 정도 후에, 세계의 무게 중심은 분명히 서유럽으로부터 멀어졌다. 영어권 국가들과 함께 서유럽은 북미대륙의 속령이 되어 왔다. 또는 당신이 다른 표현을 좋아한다면 미국의 발전소와 관제탑의 역할을 하는 국가군으로 변해 왔다. 하지만 이것만이 중요한 변화의 전체가 아니다. 결코 분명하지 않다. 세계의 중심이 영어권 국가에 있을지, 아님 오래 동안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듯 보인다. 동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팽창 등은 세계사와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동방’이라는 말은 요즘 아주 낡아빠진 표현에 불과하다.
Chapter 6_24_227p The widening horizon
Let us take a quick look at what has happened to Asia in the present century. The story begins with the Anglo-Japanese alliance of I902 - the first admission of an Asiatic country to the charmed circle of European Great Powers. It may perhaps be regarded as a coincidence that Japan signalized her promotion by challenging and defeating Russia, and, in so doing, kindled the first spark which ignited the great twentieth-century revolution. The French revolutions of 1789 and 1848 had found their imitators in Europe. 현 세기에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이야기는 1902년 영·일 동맹으로 시작한다. 이 때가 아시아 국가의 첫 번째 유럽강대국들이라는 매력적인 열강으로 진입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일본이 그들의 상승을 나타낸 것이. 러시아에 도전하고 격퇴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위대한 20세기 혁명의 불길을 처음으로 당긴 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48년의 혁명은 유럽에서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었다.
The first Russian revolution of 1905 awakened no echo in Europe, but found its imitators in Asia: in the next few years revolutions occurred in Persia, in Turkey, and in China. The First World War was not precisely a world war, but a European civil war-assuming that such an entity as Europe existed-with world-wide consequences; these included the stimulation of industrial development in many Asian countries, of anti-foreign feeling in China, and of Indian nationalism, and the birth of Arab nationalism.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provided a further and decisive impulse. What was significant here was that its leaders looked persistently, but in vain, for imitators in Europe, and finally found them in Asia. 1905년 첫 번째 러시아 혁명은 유럽에서 어떤 반향도 일깨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다. 몇 년 후에 페르시아, 터키, 중국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차 대전은 정확히는 세계대전이 아니었다. 유럽 내전 - 유럽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 이었다. 물론 전쟁 결과는 세계적이었다. 이것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산업 혁명을 촉발시켰다. 중국에서는 반외세 감정을, 그리고 인도에서는 민족주의의 시작을 가져왔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더 크고 더 결정적인 충격을 제공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들은 끈기 있게, 그러나 소용없게도 유럽에서 모방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에서 그들의 모방자들을 찾았다.
Chapter 6_25_228p The widening horizon
It was Europe that had become 'unchanging', Asia that was on the move. I need not continue this familiar story down to the present time. The historian is hardly yet in a position to assess the scope and significance of the Asian and African revolution. But the spread of modern technological and industrial processes, and of the beginnings of education and political consciousness, to millions of the population of Asia and Africa, is changing the face of those continents; and, while I cannot peer into the future, I do not know of any standard of judgement which would allow me to regard this as anything but a progressive development in the perspective of world history. 유럽은 변하지 않고, 아시아는 변화 과정에 있다. 나는 이 익숙한 이야기를 현재 다시 계속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는 아직 어떤 위치에 있지 않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혁명의 범위와 중요성을 평가해 볼 위치에 있지 않다. 현대 기술과 산업과정의 확장과 교육과 정치적 각성의 시작의 확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백만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그 대륙의 모양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꿰뚤어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을 세계 역사의 전망에서 진보라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고.
The changed shape of the world resulting from these events has brought with it a relative decline in the weight, certainly of this country, perhaps of the English-speaking countries as a whole, in world affairs. But relative decline is not absolute decline; and what disturbs and alarms me is not the march of progress in Asia and Africa, but the tendency of dominant groups in this country-and perhaps elsewhere-to turn a blind or uncomprehending eye on these developments, to adapt towards them an attitude oscillating between mistrustful disdain and affable condescension, and to sink back into a paralyzing nostalgia for the past. 이와 같은 사건들로부터 일어나는 세계의 변화는 모양은 무게감에서 상대적 저하를 가져왔다. 이 나라(영국)에서. 그리고 아마 영어권 국가들에서 상대적인 무게감의 저하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대적인 쇠퇴는 절대적인 쇠락이 아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놀라게 하는 것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의 진보의 진군이 아니라 이 나라에 있는 주류들의 경향이다. 맹목적으로 눈을 감고 또는 애써 이해가 안 가는 듯이 발달에 대해 바라보는 자세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진행되고 있는 진보들에 대해 의심스러운 경멸이나 다정한 저자세(제법인데?)를 취하는. 그리고 과거에 대해 무분별한 향수에 젖어 들어가는
Chapter 6_26_229p The widening horizon
What I have called the expansion of reason in our twentieth-century revolution has particular consequences for the historian; for the expansion of reason means, in essence, the emergence into history of groups and classes, of peoples and continents, that hitherto lay outside it. In my first lecture I suggested that the tendency of medieval historians to view medieval society through the spectacles of religion was due to the exclusive character of their sources. I should like to pursue this explanation a little further. 내가 이성의 확대라 부르는 20세기 혁명의 시대에 역사가에게 특별한 결과를 가진다. 왜냐하면 이성의 확대는 본질적으로 어떤 그룹이나 계급들이 역사에 나타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역사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첫 강의에서 제시했다. 중세 역사가들이 중세 사회를 종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 경향을 띤 것은 그들의 자료 소스의 배타적인 성격 때문이었다고. 나는 이 설명을 좀 더 하고자 한다.
It has, I think, correctly, though no doubt with some exaggeration, been said that the Christian church was 'the one rational institution of the Middle Ages'. Being the one rational institution, it was the one historical institution; it alone was subject to a rational course of development which could be comprehended by the historiaSecular society was moulded and organised by the church, and had no rational life of its own. The mass of people belonged, like prehistoric peoples, to nature rather than to history. Modern history begins- when more and more people emerge into social and political consciousness, become aware of their respective groups as historical entities having a past and a future, and enter fully into history. It is only within the last 200 years at most, even in a few advanced countries, that social, political, and historical consciousness has begun to spread to anything like a majority of the population. 중세의 교회는 중세에 있어서는 유일한 합법적 제도였다고 하는 것은 물론 다소간의 과장은 있지만 사실 정당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유일한 합리적 제도였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적 기관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발달의 합리적인 과정에 종속된다. 역사가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세속 사회는 교회에 의해 형성되었고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합리적인 삶은 없었다. 대중들은 전사시대 사람들과 같이 자연에 속했다. 역사에 속했다기보다는. 근대 역사는 시작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정치적 각성에 들어가고 그들의 각 그룹들이 역사적 실체로서 자각할 때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자각을 할 때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많아야 200년밖에 안 된다. 소수의 발달된 국가들에서 조차도, 정치적 역사적 각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된 것은?
Chapter 6_27_230p The widening horizon
It is only today that it has become possible for the first time even to imagine a whole world consisting of peoples who have in the fullest sense entered into history and become the concern, no longer of the colonial administrator or of the anthropologist, but of the historian. This is a revolution in our conception of history. In the eighteenth century history was still a history of elite’s. In the nineteenth century British historians began, haltingly and spasmodically, to advance towards a view of history as the history of the whole national community. J. R. Green, a rather pedestrian historian, won fame by writing the first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단지 요즘 최근이다. 처음으로 가능해진 것은. 전 세계를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더 이상 인류학자나 식민지 통치자들의 시각이 아닌 역사가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은. 이것은 역사라는 개념에서 혁명이다. 18세기까지는 아직 엘리트 역사 시대였다. 19세기에 영국 역사가들은 망설임과 산발적으로 역사를 전 국민 사회라는 관점으로 진전했다. 그린은 약간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역사가인데 그는 명성을 얻었다. 영국 사람들의 역사를 처음으로 서술해서.
In the twentieth century every historian pays lip service to this view; and, though performance lags behind profession, I shall not dwell on these shortcomings, since I am much more concerned with our failure as historians to take account of the widening horizon of history outside this country and outside western Europe. Acton in his report of 1896 spoke of universal history as 'that which is distinct from the combined history of all countries'. He continued: 20세기에 모든 역사가는 이 견해에 대해 립 서비스를 한다. 그리고 물론 실행은 말보다는 늦어지지만 나는 이런 단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실패에 대해 더 많이 관심 있기 때문이다. 우리(영국)의 역사가들이 이 나라의 밖이나 서유럽 밖의 넓어지는 지평선의 확대를 보는 것을 실패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더 걱정스러운 것이다. 1896년 액튼은 말하기를 보편적인 역사란 모든 나라의 역사를 합쳐놓은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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