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에 담근 사랑
2024년 8월 10일 점심밥상에 아주 특별한 반찬이 올라왔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시원한 물에 송송 썰어서 잠겨 있는 오이지다. 고추 따는 날 조송암 원로장로의 고추밭에 심방했을 때 오이밭에서 직접 따서 심방 기념으로 받은 여나무개의 오이로 만든 찬거리였다. 오이지는 어릴 때부터 즐겨 먹던 추억의 음식이라 친근한데 여기 산골마을로 온 지 3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밥상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 오랜 세월 헤어지다 만난 절친처럼 반가웠다. 그날의 오이지 식탁은 그때 그 사람들까지 모두 청하여 함께 나누었던 별식이 되었다. 내 어릴 적 여름 날이면 매일 차려진 오이 밥상에 둘러앉았던 내 어머니요, 이제는 초로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내 형제들이다.
어머니(金連姬 권사) 또래의 단골 오이 장사꾼 아주머니가 내 집을 들르는 날은 보통 오이 1접(100개)을 들이는 날이다. “하나에다 둘이요 ~~ 스물아홉에다 하나를 더하니 서른이라 ~~ 마흔아홉이라 이제 마지막으로 쉰 개라.” 그 아주머니는 오이 개수를 세면서 자신이 작곡한 곡조에 이 가사를 붙여 구성지게 부르면서 2개씩 하나로 오십까지 센다. 그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 새 1접이 채워진다. 그리고 “옜다 하나 더”라고 후렴까지 부르며 두 손으로 한 움큼의 오이를 덤으로 주었다. 꼬부랑할미 같은 오이, 동네 처녀들과 바람난 삼식이처럼 잘 생기고 건장한 몸매를 자랑하는 오이, 밥 한 끼도 제 때 얻어먹지 못해 비실한 오이, 시집간 내 누이처럼 어여쁜 오이, 나이에 비해 꽤 늙어 보이는 오이 등등 천차만별의 오이가 낡은 대야에 쌓여있다. 여름철 뜨거운 태양 볕을 받고 자라난 오이는 모양과는 관계없이 비타민C와 칼륨이 많고 수분이 풍부하여 체내의 나트륨 배출효과에 좋으며 특히 피부건강에 이만한 게 없다. 아예 미인들은 얼굴에 붙이고 살 정도로 인기 만점이다. 백오이, 가시오이, 청오이, 취정오이, 노각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맛이 각각 다르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우리 6남매의 여름식탁을 채우셨다. 잘 익은 보리고추장에 찍어 먹는 생오이를 비롯하여 오이소박이, 오이무침, 오이냉국은 한 여름 내내 우리 식구의 보양식이었다. 그 중 오이지는 잊지 못할 특식이었다.
오이지는 뜨거운 소금물에 약 3~4일 정도 담가놓은 오이가 노름 푸르게 변색되어 있으면 완성이다. 이 오이지를 송송 썰어서 소금기를 뺀 후 시원한 물에 넣고 깨소금과 소파를 송송 썰어 띄우면 시각효과까지 더하여 집 나갔던 입맛도 돌아온다. 하얀 쌀밥에 오이지를 그 고추장에 썩썩 비비면 전주비빔밥이 부럽지 않다. 아삭거리는 오이는 씹을 때 뇌에 자극이 되어 뇌 건강에도 좋고, 적당하게 짠 국물은 땀 많이 흘리는 여름철에 일부러 먹어줘야 할 천연 포카리 음료수다. 이처럼 오이지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여름철 보양 음식이다.
또한 송송 썰어 수분을 모두 짜내어 할머니 주름처럼 쭈글쭈글 해진 오이지는 고추장, 참기름, 기타 양념을 넣고 어머니의 손맛을 가미하여 골고루 버무린다. 마침내 오이지는 무침으로 화려하게 변신하고 미식가의 입을 즐겁게 해 준다. 오이가 풍성하게 출하될 어느 해 여름철 우리 식구는 오이 8접(800개)을 먹은 적이 있었다. 1인당 100개를 먹은 셈이다. 정말 여름에는 오이만 먹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머니의 손맛이 듬뿍 담긴 오이지이다 보니 이 맛은 머리에 깊숙이 각인되었고 평생의 음식이 된 것이다. 여름이 오면 내 몸은 벌써 오이지에 반응한다. 지역마다 음식 문화가 다른 탓이겠지만 산골마을에서는 오이 반찬이 일반화되지 않은 듯 산골 목장지기로 몇해 보내고 이제야 식탁에서 만났으니 남들은 그 반가움을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전수받은 아내의 오이지 손맛은 십수 년 전에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며 추억 여행까지 떠나게 했다. 이내 어머니의 그리움은 코끝을 자극했고 오이지 국물 맛 그대로 맑고 투명한 이슬이 눈가에 갈쌍하는 듯했다.
딸 셋에 아들이 하나였던 어머니는 여느 부모처럼 아들선호 사상이 깊어 아들 하나로 만족하지 못했다. 둘째 아들을 원했지만 하늘은 무심하게 딸만 연년생으로 주셨다. 또 낳아봐야 딸이려니 싶어 어머니는 아들 하나만 둘 팔자로 여기고 포기하셨다. 그리고 7년이 지나자 늦은 나이에 이삭을 낳은 사라처럼 늦둥이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도화동(道禾洞) 고향 마을은 이 아들 출산에 동네잔치가 벌여질 정도였다고 하니 어머니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된다. 무자득남(無子得男)의 기쁨이 온몸을 채웠고 애지중지(愛之重之),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이 아들을 붙안고 부육(傅育)했을 터 그 귀중함은 더 말해 무엇 하랴? 특별한 사랑을 받은 막내는 어머니의 빈자리가 컸고 세월의 지우개가 훑고 지나갔어도 그 자국은 선명하게 남았다. 인생살이가 힘들 때면 떠오르는 어머니의 잔상(殘像),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며 불철주야(不撤晝夜), 주이계야(晝而繼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신 그 모습이다. 대장부처럼 기도하신 어머니의 믿음으로 이만큼 목회여정을 달려올 수 있었다고 막내는 목회 끝자락에 서고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날 오이지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까지 맛보았으니 이제 자녀손들에게도 그 사랑을 주는 게 아비의 도리라 싶어 그 막내는 다시 마음을 다진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소금물에 절이고 있는 오이
오랜만에 만난 오이지
태양초 고추장과 함께 하는 오이지비빔밥
어머니 손맛 그대로인 아내의 오이지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