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亡國)을 맞은 1910년 8월, 도쿄육군중앙유년학교엔
조선인 40여명이 유학 중이었다. 대한제국이 세운 무관학교 1-2학년에 다니던 이들은 1909년 통감부 압력으로 학교가 문을
닫은뒤 국비로 유학 온 스무 살 안팎 청년들이었다. 육사(陸士) 예비 과정인 중앙유년학교에 들어온 지 채 1년이 안 된 이들은 절망했다. ‘전원 자퇴하고 귀국하자’---, 격론이 벌어졌다. 연배가 높은 지석규가 말했다.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뒤 중위가
되는 날 군복을 벗어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궐기하자.’
‘대한제국의 유복자’로
알려진 이들은 1914년 5월 졸업한 일본 육사 26기생(13명과)과 이듬해
졸업한 27기생(20명)이다. 일본군에 배속된 이들에게 3-1운동은 충격을 줬다. 지석규(26기), 이종혁(27기)은 부대를 탈출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철호(26기)도 1918년 중위로 승진하자 예편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석규(1888~1957)는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청천의 본명이다.
‘비극의 군인들’은 구한말부터
일제말까지 일본 육사에 몸담은 조선인 141명의 생애를 추적한 노작(勞作)이다. 원로 국사학자 이기동(77)
동국대 명예교수가 1982년 낸 책을 38년
만에 대폭 수정했다.
*혁명 꿈꾼 日육사 11기생
1895년 유학을 떠난 11기생 21명은 갑오개혁 때 실력자로 떠오른 박영효가 직접 뽑은 국비 유학생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비 지급이 중단되고 친일파로 몰렸다. 1899년 11월 졸업한 이들은 도쿄 1사단에서 견습사관을 마치고 1900년 7월 대한제국 참위(소위)로 임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국 지시도 없고 봉급도 보내주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일부는 비밀결사 혁명일심회를 결성,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모의했다. 귀국한 회원 8명은
곧 체포됐다. 장호익 등 3명은 1904년 3월 러일전쟁 발발 직후 사형당했다.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청년 이승만은 감방 창문으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처형 직전 만세를 세 번 외친 장호익의 당당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강제병합 이후 뜸하다. 1933년부터 다시
이어졌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학교를 찾아다니며 입학을 권했다. 채병덕과
이종찬이 1933년 4월
49기생으로 4년제 육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50기생 이용문-지인태가 들어왔다.
채병덕과 이종찬은 조선인 사관생도 모임인 ‘계림회’를
만들었다.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육사에 유학한 계림회원은 72명이다. 만주국 장교와 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정일권
등 24명을 포함한 숫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1939년 소련군과 노몬한에서 공중전을 벌이다 전사한 지인태, 인도네시아 팔렘방 비행장 공습 중 불시착해 자결한 최명하, 오키나와로
출격한 최정근 등이다.
*6.25
한 달 만에 전사한 채병덕 소장
광복을 맞은 계림회 회원들은 미 군정 아래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응준과 채병덕이 육군본부 총참모장을 잇달아 맡았고, 이용문은
채병덕 아래 육본 정보국장이 됐다. 김정렬은 초대 공군본부 총참모장을 맡았다. 육군과 공군 모두 계림회 출신들이 장악했다.
6.25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것도 이들이었다. 6.25전쟁 발발 닷새 만에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채병덕 소장은 그해 7월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용문
준장은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 토벌 중 비행기 사고로 산화했다. 박범집 장군은 1950년 11월 고향인 함흥 부근 상공에서 작전을 지휘하다 비행기가
추락했다. 전쟁 초 한강 다리 폭파 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까지 일본 육사로 간 조선인의 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시베리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이갑(15기), 일본군 기병 중위에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변신한 김경천(23기), 전범 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한 홍사익 중장(26기),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왕족
이우 (45기)---영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중위 진급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겠다고 결의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조차 실천에 옮긴
사람은 소수였다. 이기동 교수는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창군(創軍)과 6.25 전쟁에서 기여한 몫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2020.8.8.토요일, A16면,
“광복을 위해 배우자”---日육사출신 한국인의 고뇌와 배신”을 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글을 발췌인용).
① 일제 치하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영하 30~40도 혹한에서도 훈련 감행,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이 열악해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추운데서 철저하게 독립이란 정신 속 교육훈련, 식사와 관련한 일화, 이석영 이사장 1913년 5월
통화현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 설립했을 때 생도들 사기진작 위해 돼지를 크게 잡아서 학생들에게 특식, 기름기를
먹은게 없어, 모든 학생들이 배탈고생, 학교 자급자족으로, 신흥무관학교는 본교가 있고 여러 개의 분교로 체계적 운영, 본교 2년제 고등군사반, 고급간부 양성,
분교 초등군사반, 독립군 군인 양성, 한참 때
한 기수가 600명 정도, 입대연령 10~50대까지, 1920년까지
3~4000여명의 졸업생 배출,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중심적, 나자구 무관학교, 미산무관학교, 일제의
방해로 1920년에 신흥무관학교 폐교, 독립운동가들은 서간도와
만주에서 중국인들의 텃세! 문화차이와 토지매입의 법률적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1911년 6월에 추가가 마을에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매입, 거기서 신흥강습소 개설, 중등과정 교육과 군사과 훈련, 처음부터 독립군 육성목표,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로부터 출발, 유년필독 교과서, 우리 말과 지리,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함양, 일본육사 출신 교관,
김경천, 지청천 엘리트 교관들, 국내 많은 젊은이들의
신흥무관학교 지원 촉매제 역할 (KBS 역사저널 그날 46회, 신흥무관학교에서 발췌인용).
②
대한제국의 유복자로 알려진 이들은 1914년 5월
졸업한 일본 육사 26기생(13명과)과 이듬해 졸업한 27기생(20명)이다. 일본군에 배속된 이들에게
3-1운동은 충격을 줬다. 지석규(26기), 이종혁(27기)은 부대를
탈출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철호(26기)도 1918년 중위로 승진하자 예편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석규(1888~1957)는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청천의 본명이다.
③
1895년 유학을 떠난 11기생 21명은 갑오개혁 때 실력자로 떠오른 박영효가 직접 뽑은 국비 유학생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비 지급이 중단되고 친일파로 몰렸다. 1899년 11월 졸업한 이들은 도쿄 1사단에서 견습사관을 마치고 1900년 7월 대한제국 참위(소위)로 임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국 지시도 없고 봉급도 보내주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일부는 비밀결사 혁명일심회를 결성,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모의했다. 귀국한 회원 8명은
곧 체포됐다. 장호익 등 3명은 1904년 3월 러일전쟁 발발 직후 사형당했다.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청년 이승만은 감방 창문으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처형 직전 만세를 세 번 외친 장호익의 당당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④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강제병합 이후 뜸하다 1933년부터 다시 이어졌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학교를 찾아다니며 입학을 권했다. 채병덕과 이종찬이 1933년 4월 49기생으로 4년제 육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50기생 이용문-지인태가 들어왔다. 채병덕과
이종찬은 조선인 사관생도 모임인 ‘계림회’를 만들었다.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육사에 유학한 계림회원은 72명이다. 만주국 장교와 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정일권
등 24명을 포함한 숫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1939년 소련군과 노몬한에서 공중전을 벌이다 전사한 지인태, 인도네시아 팔렘방 비행장 공습 중 불시착해 자결한 최명하, 오키나와로
출격한 최정근 등이다.
⑤
6.25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것도 이들이었다. 6.25전쟁
발발 닷새 만에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채병덕 소장은 그해 7월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용문 준장은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 토벌 중
비행기 사고로 산화했다. 박범집 장군은 1950년 11월 고향인 함흥 부근 상공에서 작전을 지휘하다 비행기가 추락했다. 전쟁
초 한강 다리 폭파 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⑥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신팔균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면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신변 위협을 우려하여 서로의 이름에
하늘천(天)을 붙인 가명을 쓰기로 한다. 신팔균은
신동천으로, 김광서는 김경천으로, 지석규는 지청천으로 바꾸었으나
지씨 성이 희귀성이라 모친의 성을 딴 이청천이란 이름으로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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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서 일제 시대까지 일본 육사로 간 조선인의 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시베리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이갑(15기), 일본군 기병 중위에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변신한 김경천(23기), 전범 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한 홍사익
중장(26기),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왕족 이우 (45기)---영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중위 진급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겠다고 결의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조차 실천에 옮긴 사람은 소수였다. 이기동 교수는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창군(創軍)과 6.25 전쟁에서 기여한 몫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⑧
청산리 전투(1920.10.21~26)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대활약,
10여차례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 세계 전쟁사에 찾아보기 힘든 대첩, 청산리 전투=김좌진,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 직소계곡 600여명 독립군 매복 일본군 유인 매복지역 10미터까지 접근 총공격, 20여분 교전후 결과 일본군 200명 사망, 독립군 승리, 대한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출신군인들이 주도
⑨ 성재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고, 지청천 장군은
상해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외손자가 독립기념관관장, 김경천, 홍범도 장군의 말년이 비극적이라는데 가슴 아프다. 이제 대한민국도
잘 살게 되었으니 모든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을 최고로 도와주어야, 김좌진 장군 아들, 김두한, 김두한 딸, 김을동
前국회의원, 김을동 아들, 탤런트 송일국, 송일국씨는
대학생들 데리고 자비로 만주 청산리 전투현장 답사하는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