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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상실 수업(인생 수업)
저-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캐슬러
출-이레
독정-2020.3.13.금
· 매년 건강검진을 받고 몸 구석구석을 검사해보지만 몸속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뿐이다. 아무리 건강에 유념해도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 자동차 트렁크 안에 들어가 놀다 죽은 아이의 부모는 자동차 회사에 안에서도 열수 있는 장치를 하라고 요구했다.
· 40년 전 그의 죽음이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를 사랑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가 슬퍼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상실을 가지고 있음의 의미다. 과거로부터 줄곧 내버려두었던 상실이다. 그는 토드를 향한 슬픔으로 옛날 함께 하던 집을 방문하고 앨범을 가져와 보며 40년 동안 쌓아뒀던 눈물을 전부 흘렸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쯤 자신이 모든 상실을 존중했으며,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넓어졌기에 이제 모두를 위해 슬퍼할 수 이을 것 같았다. 미뤄두었던 슬픔의 눈물을 마침내 모두 쏟아내자 비로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음을 감당해야 할 현실로 완전히 돌아와 가족을 위해 그곳에 존재했다.
· 생명이 없는 숲속에 어린 새싹이 머리를 내밀려 황폐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해보라. 슬픔의 치유 속에 우리는 전에 있던 황폐함을 부정하지 않는 채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소생되고 있는 것이다.
· 사랑한 이가 에이즈로 죽은 원인을 비밀로 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뚜렷한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노부인이 췌장암으로 죽었을 때 아들은 페렴으로 죽었다고 했다. 폐렴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암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 병으로 죽은 것을 창피스럽게 여겨서 숨기기도 한다.
· 부정적 사고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스스로 병을 키운다. 죽기로 운명 지어진 것이 현실이라면 질병은 승리한 것이고 인간은 항상 지기만 하는 것일까? 충분히 영적으로 승리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타협은 영적 성장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과 영혼의 존재, 삶이 다시 깊이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평화를 얻는 방법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을 배워햐 할 배위다.
·죽음은 항상 인간에게 꺼려져왔고 연속선 위의 하나의 점이며 영혼은 영원하지만 죽음은 항상 고통스럽고 벌을 연상케 한다.
· 신은 내가 수업을 통해 성장하도록 해야지 사랑한 이의 상실로는 아니지. 하지만 세월이 지나 삶을 되돌아볼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성장을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랜드캐년이 수백 년 동안 폭풍으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폭풍으로 창조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벌을 내리는 것은 신의 작품이 아니다, 인간은 삶의 모진 폭풍을 견뎌내는 믿을수 없는 힘을 가진 창조물이다. 누군가 폭풍으로 그랜드캐년을 막아주었다면 우리는 그 조각의 아름다움을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일은 지옥에서 사는 것이다. 슬픔은 모든 것을 과장시키고 자신을 행동의 노예가 되개 한다. 자신의 직관이 당신을 안내하도록 하라. 통제는 소금과 같기 때문이다. 소금의 적당량은 음식맛을 한층 돋우지만 과하면 망친다.
·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뭔가를 바꾸는 상상을 하는 동안 사랑한 이와 연결되고 마음속에 살아 있음을 느끼며, 잠깐 동안이라도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타협한다. 또 사랑에 대해 세밀하게 과거를 다시 쓰며 어떤 존재였고 누구였는가를 이상화시킨다. 그는 천사같고 완벽한 죽은 아내 모습을 창조해내며 결혼 생활을 이상화시켰다. 사랑한 이가 죽은 후 남겨진 이들은 종종 현실을 공상으로 바꾸어 죽은 이를 이상화시킨다.
남은 아이들을 위해 강해져라는 위로라도 가슴이 미어져서 태연한 척 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용감함을 끄덕 않고 버틴다는 의미와 혼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강함은 분명 상실감으로 전달될 수도 있지만 상실감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 죽은 어머니를 위해 감정의 문을 닫고 경기에 승리하라 해도 그는 제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축구 경기장이었지만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경기를 했지만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용감해야 할 이유도 없다.
· 사람들은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에 해를 끼치거나 방해가 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강해져라 하면서 슬픔을 표출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고통을 깔아뭉개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곪아터질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다룰 만큼 강해져야 하고,궁극에 슬픔은 이미 우리에게 존재하는 강함을 드러내준다.
· 사람들은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니면,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쇼핑이나 낚시를 선택한다. 슬픔에 빠진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기보다 무작정 뭔가를 하려한다. 하지만 치유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슬픔을 완전히 겪어야 한다. 밖으로 나갈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그것을 지연시켜도 건너 뛸 수는 없다. 슬픔을 늦추기 위해서는 주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고통과 슬픔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 단지 슬픔 곁에 앉아 자신의 그 슬픔을 느끼게 하라. 분노와 실망에게도 이같이 하라. 하루 종일 울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라. 고통을 느끼고 난 후 찾아오는 해방감을 느껴라. 슬픔이 엄청난 힘으로 찾아올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피하기 마련이다. 강함은 살아남는 것이고 죽음은 나약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이 죽음을 맞을 때 예전에 사랑하고 알고 지냈던 고인이 된 영혼들이 환여 인사를 하며 자신 곁으로 올 거라 믿어 홀로 죽지 않는다고 믿는다. 육신은 코트.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입는 옷 한 벌에 지나지 않는다. 뒤에 남겨진 누에고치 껍질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한 이가 아니다. 그의 영혼이 사라져버렸음을 느낀다. 삶은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어 계속되고 죽음은 나비가 누에고치를 깨고 나오는 과정 속에 일어나는 따뜻함과 고요함이다. 사랑한 이는 이제 모든 것에 자유롭다.
죽어간다는 것은 탄생의 경험과 같다. 마치 애벌레의 성장이 나비의 날갯짓을 향한 자연스런 하나의 단계처럼 인간의 귀로 감지하기에는 주파수가 너무 높은 개의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한 이가 전하는 채널링 주파수는 인간의 귀의 역량 밖이라 들을수 없다. 하지만 사랑한 이가 우리 말을 듣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척 배가 우리 눈 한계선을 넘어 저 멀리 흘러가지만 여전히 바다 위에 떠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해변으로 이동할 뿐이다. 죽음은 봄이 다가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육신의 코트를 벗는 것과 같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고통스러웠던 것, 늙은 것.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잃은 것이다. 이 같은 이해는 순간 위안은 되지만 사랑한 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걸 알도록 도와준다. 문제는 슬픔 속에서는 1분이 1년처럼 느껴진다. 사후 세계를 알면 사랑한 이가 어떻게든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겨진 이가 그 때문에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랑한 이가 죽으면 함께한 기념일은 상실감으로 자리 잡는다. 정말 잊었는데도 잠재적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에 아이가 주로 문제를 일으킨다. 부인은 남편이 죽어 일년 후 친구들에게 이 메일을 보내어 남편 추모글을 받아 친구 네 명을 초대하여 남편 일화를 들려주며 이메일을 읽고 촛불을 켜며 한마디씩 했다. 그녀는 슬픔과 감사함이 더욱 깊어졌고 각자 생각을 표현하고 밖에 나가 멋진 밤을 보냈다. 당신의 일부는 사랑한 이와 함께 죽었다. 사랑한 이의 일부가 새로운 당신의 마음 안에 살고 있다.
· 관계 속으로 돌아올 시기와 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 새 배우자는 이해심이 많을 것이고 최소한은 자신의 여정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것을 은밀히 변화시킬 법을 생각해낼 것이다.
사랑한 이가 죽으면 함께한 기념일은 상실감으로 자리 잡는다. 정말 잊었는데도 잠재적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에 아이가 주로 문제를 일으킨다.부인은 남편이 죽어 일년 후 친구들에게 이 메일을 보내어 남편 추모글을 받아 친구 네 명을 초대하여 남편 일화를 들려주며 이메일을 읽고 촛불을 켜며 한마디씩 했다. 그녀는 슬픔과 감사함이 더욱 깊어졌고 각자 생각을 표현하고 밖에 나가 멋진 밤을 보냈다. 당신의 일부는 사랑한 이와 함께 죽었다. 사랑한 이의 일부가 새로운 당신의 마음 안에 살고 있다.
· 당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 상실의 새 세상으로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사랑한 이는 당신과 식사했던 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럴 때 조금만 더 잘 먹고 약간만 더 일해야 한다. 음식과 운동은 사랑한 이가 살아나도록 도와주지 못했다. 몸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하루가 필요할 것이다. 당신 자신을 돌보라.
· 편지 쓰기는 홀로 사는 세상에서 외로움의 훌륭한 친구가 된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담기 위해 슬픔의 여행 안에서 편지를 써라, 편지쓰기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체화시킨다. 이따금 말하지 못한 말을 남겨놓아 문자로 된 말은 사랑한 이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전달문이 된다. 죽음은 의사소통의 끝이 아니며, 가슴 안에 할 말이 담겨져 있다면 사랑한 이는 그들 가슴 안에서 그것을 느낄 것이다. 사랑한 이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에게 편지를 쓰라.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그들은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하라. 자주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편지가 멀리 떨어진 무덤까지 내려 여행을 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그 사람이 쓴 글씨에 남겨진다.
재정문제를 둘러싼 감정은 문제를 더 악화시키지만 돈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돈으로 뭘하는가와 어떻게 인지하느냐가 돈을 좋게도 나쁘게도 느끼게 한다. 사랑한 이가 죽고 얻는 보험금이나 부는 썩어빠진 돈처럼 느껴진다. 술 취한 운전사가 몬 자동차에 아들을 잃었을 때 자신의 분노를 ‘음주운전반대 어머니회’를 조직 결성으로 풀었다. 아들이 살해된후 다른 미아들 찾는데 자신의 슬픔을 소모시켰다. 인간은 자신이 할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인하고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 아빠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자식이 아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섭섭하다고 했다. 아들도 “엄마, 난 매일 밤마다 아빠를 생각했는데 저도 엄마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했다. 그러고는 아빠의 죽음이후 지금까지의 슬픔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며 웃고 울며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흔히들 아이는 생일이나 축제에 고인을 생각하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아이는 생각하고 있다. 겉으로는 아닌척해도. 어른이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고 죽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고 받아들인다.
그가 열 살 되어 쇼핑하러 갔다가 우연히 옛 선생님을 만났는데 냉냉하게 인사하고 여자 친구에게 밖에서 기다릴게하고 나가자 옛선생이 “내가 저 아이 6학년 때 선생님이야. ”하자 그 여자 친구가 말했다. “선생님이 누구신 줄 알아요. 그는 선생님을 무척 존경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원망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 슬픔이 아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가 좋으며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것보다는 자주 일어나는 것이 더 낫다. 어른들은 ‘너한테 이게 더 나을 거야. 나중에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내가 이해한 거라곤, 죽음은 끔직한 것이며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난 심지어 공동묘지도 갈 수 없었다고요. 마지막 테이프를 털었다.
<널 두고 가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널 두고 가지 않으려고 애쓰고 애쓰고 애썼지만 결국 난 가야만 했다. 내가 널 생각하듯 너도 날 이따금 생각하겠지. 학교에서 또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바쁜 날, 어느 날 문득 이유 없이 불현 듯 머릿속에 내가 떠오르겠지.그 순간내가 넔ㅇ각하고있다는 것만은 알아다오, 살아가다 보면 너가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겠지만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난 네 심장만큼이나 가까이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니까.“
비디오 테이프나 비디오 카매라는 상실을 극복하는데 강력한 효과를 갖는 도구가 되었다. 간단한 편지는 슬픔에 잠겨 있는 아이에게 이 세상 전부가 된다.
· 당신은 회사 다니고 당신은 연 극을 가르쳤다. 혼자서는 연극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고 배우와 감독 작가들을 만나지도 모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내의 세계이므로 당신은 그 안에 설 자리가 있다. 그녀가 사라지면 당신은 그 세계에 낄 수 없다.
· 삶은 우리가 얼마만큼 조심했느냐와 상관없이 본래부터가 위험하다. 네 살 아들이 음료수를 건했다. 소다 음료수를 흔들어 뿜어대며 즉어워했던 전날 일이 떠올라서 운전중인 아빠에게 주려고 흔들어 캔을 딴 순간, 거품이 솟구쳐 아빠는 순식간에 운전대를 놓쳐 자동차가 강둑 위로 추락해서 가족은 모두 죽었다. 아이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소다 음료수를흔들어 벌어진 일이라고 공포에 떨었다.
집에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아이들이 그 심부름을 하러 밖애 나가지 않았다면? 건강검진을 평소에 받았더라면? 다시 묻자. ‘푸른 잎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
슬플 때 가장 참기 힘든 게 뭐냐면, 떠난 이에게 뭘 말해줘야 할지 모르는 거야.
신의 부름이 어떤 이에게는 한가로운 일요일마냥 예견되었다는 듯 다가온다. 또 예기치 않은 노크 소리를 내며 다가와 정신없이 만들기도 한다. 밤에 남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남편의 장례식을 계획하러 장의사 사무실에 있을 상상을 할 예지력을 지닌 사람은 없다. 지금도 내가 잠을 자고 아이는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착각이 든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슬픔은 멀쩡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잃었을 때 가장 큰 상처가 된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의 증거다.
끊임없는 연속 위의 이 선은 생전과 사후를 구분 짓는 표시다. 그가 있는 시간과 그가 없는 시간을 나누는 선으로 우리 허락 없이 그어진 선이다. 우리를 그와 분리시켜 놓은, 단지 우리만 빠진 채 그에게는 계속되는 존재의 세계다.
백년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임종을 앞두고 모두가 모였으며 마을에 종이 울렸다. 시신을 놓을 차가운 나무판을 설치했다. 관을 짜기 위해 나무를 모았다. 몸에 입힐 옷을직접 바느질했다. 사랑한 이의 시신을 장례식장 안에 안치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명복을 빌었다. 서로다 아는 사이였다. 참석한 이들은 그에 대한 일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들은 화려하게 펼쳐졌고 추모식 사회자는 떠난 그 사람을 잘 알기에 그 상실을 넓은 눈으로 보게 해준다. 친구와 가족 모두가 묘지 앞에서 추도식을 했다. 차차 병원으로 장례식이 옮겨가더니 요즘 코로나가 왕관을 들고 다니며 누구 몸속에 바이러스를 심을까 돌아다니는 지금은 장례식을 위해 종을 울릴 수도 없고 모일 수도 없다. 기품있는 검은색 영구차로 고인을 운반하지 않는다. 아주 가까운 가족만 모여 영안실에서 장의사와 망자의 옷을 입히고 관에 넣어 모든 장례식을 치른다. 불에 태워도 코로나 균이 무서워 재도 휘날리지 못하게 않게 단지 속에 재를 모아 넣어야한다. 사람들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치유될 것이고, 고통 받았던 상실 주위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세울 것이다. 다시금 완전해지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이 슬픔의 선물은 회상, 고통, 절망, 비극, 희망, 재참여, 치유의 시간을 가져온다. 상실을 미리 예감하는 감정에서 다시 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들쑥날쑥 감정의 주기를 끝마친다. 모든 걸 말끔히 잊는 게 아니다. 상실이 다시 찾아온다는 의미도 아닌, 탄생과 죽음의 주기를 완전히 따르므로 삶을 충분하게 경험하는 의미다. 상실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슬픔과 애도의 힘이 우리를 치유하고 잃었던 그 사람과 함께 살아 갈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기적이다. 곧 슬픔의 선물이다.
<닥터 지바고>
그에게는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다. 투명한 피부의 소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침국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며칠을 함께 보낸 어느 날 아이는 내게 이 밤이 지나면 떠날 거라 했다. “날 기다리는 천사가 있어.”
그 여행에의 두려움이 없었다. 마치 태양의 일몰 같았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며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듯 했다. 수용소 허름한 건물 안을 지날 때 벽에 낙서가 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반복적으로 나비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세상 어디에서든 나비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음의 수용소만은 아니었다. 25년 후 나는 그곳에 왜 그렇게 많은 나비 그림이 있었는가가 궁금했고 그 나비가 변형의 상정이며 죽음이 아닌 삶의 영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정은 환자의 침대 곁에서 이루어지기 보단 한 번도 환자를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에 의해 사무실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한때 알고 있었던 의학계의 상실에 마음이 울적해진다. 나 또한 누군가처럼 오랜 세월 동안 꽃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창문으로 밖이 내다보이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바람직한 죽음의 광경을 보았다. 그 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몇년 동안 통로에 갇혀 죽어서 이 지구를 떠나도록 허락되지도 않고, 다시 문으로 돌아가 삶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허락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슬픔을 예감하는 고통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내 환자들을 더 공감하게 되었다. 삶은 하나의 서취이고 죽음은 그 성취의 일부분이다. 죽음을 앞두고 부드러움과 다정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 이상도 아니다.
위로해주는 말들을 주의깊게 듣고 효과 있는 것은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모두를 기쁘게 해줄 수는 없다.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랑하는 이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사물에 휩쓸리지 마라.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도록 하라. 필요하다면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라. 원한다면 언제든 어디서든 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