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강설
9.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多言多慮하면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다언다려
轉不相應이요 더욱 더 상응하지 못하는 것이요
전불상응
도(道)라는 진리는 말을 듣고 이해하거나 생각으로 궁리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言語道斷 心行處滅) 경지에서 터득되어지는 것이 도이기 때문에 말과 생각으로서 접근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말과 생각으로서 도에 접근하려 한다면 더욱 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도는 아는데도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 데도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알고 모르는 지식의 대상이 아닌 도를 이론적 논의나 사변적 논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絶言絶慮하면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절언절려
無處不通이니라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무처불통
말 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나아갈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도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식심(識心)의 분별이 사라진 경계에서 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 기호에 맞추고 비위에 맞추는 취사심(取捨心)에서는 도를 만나지 못한다.
어느 산이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더 올라갈 길이 없이 사방이 허공으로 트여버리듯이 이치의 궁극에 이르면 모든 것이 도(道)로 통해진다.
“대도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 차별에서는 말이 필요하고 생각이 일어나지만 절대의 무분별에서는 말이 없고 생각이 끊어지는 것이다.
歸根得旨요 근본에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귀근득지
隨照失宗이니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는다
수조실종
근본에 돌아간다는 것은 경계를 따라가는 식심을 자기의 본성자리로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선문(禪門)에서 자주 쓰이는데 객관 대상을 찾아 분별을 일으키는 식심을 쉬게 하고 고요히 내면의 자성을 응시하라는 말이다.
<능엄경>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뜻은 귀가 소리를 듣는 경우 이근(耳根)이 성진(聲塵)을 따라가는 것인데 성진(聲塵)인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주체 곧 듣는 성품(聞性)을 듣는다는 말이다.
수조(隨照)란 일어나는 식심(識心)을 따라 객관 경계를 향하는 번뇌망상의 움직임이다.
이것이 횡행하면 근본을 망각 도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 지안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