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215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승리에 찬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 중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박해와 고통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이 너무 더디오는 것 같고, 주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이 상당합니다.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기도할 때, 대충, 적당히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집요하게, 목숨걸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사제와 70여 명으로 구성된 최고의회격인 산헤드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대체로 회당을 지키는 율법 교사가 재판관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유산이나 금전 관련 소송이 발생했을 때, 공인 재판관들은 재판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무관심하고 심술까지 궂어, 과부의 재판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재판만 열리게 되면 이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였습니다. 과부는 뇌물을 제공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 번을 거절 당한다 할지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꺽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8,1-8 :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고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의로움의 말씀을 팔아넘기고 많은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악마의 손에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입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고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
[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본다. 기도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적다. 또한 ‘끊임없이’란 말이 ‘24시간 내내’가 아닌 그만큼 강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도 알고 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기도라는 글자의 의미보다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기도란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가 좁은 의미의 기도라 한다면,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의 약함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 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유혹 앞에서도 하느님을 의식하는 순간 건강한 갈등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의식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그 선택의 삶 속에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 이것은 해서는 안 되겠지요?”
“주님, 이것은 힘들더라도 해야겠지요? 도와주셔야 합니다.”
24시간 십자가 앞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은 가능하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그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고, 옳은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우리가 유혹에 지고, 죄를 짓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죄는 우리를 스스로 죽이는 길로 이끌게 되어있다. 그 죄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국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부담으로서가 아니라, 기쁜 동반자로서 그분을 의식하는 것이다. 곧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될 때, 지금까지 이해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의 의미, 기쁨과 고통, 진실과 거짓, 참된 행복과 같은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
[서울대교구 정월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하라>
데레사 할머니는 병원에서 암 말기 선고를 받고 더 이상 약이 없다는 처방을 받았다. 병원 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니 주님이 주신 약인 ‘신약’과 ‘구약’을 통해서 치유하리라는 믿음으로, 할머니는 성경을 읽으면서 꾸준히 기도하셨다.
누워서 두꺼운 성경을 읽다 보니 한번에 오래 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읽고 또 읽어서 한 일 년이 되었을 때에는 구약성경 마지막 장인 말라키서를 읽게 되었다.
말라키서 3장 20절 말씀인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를 읽는 순간 치유의 은혜를 입었다. 하느님의 성령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체험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허덕이다가 죽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이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문제나 고통의 원인을 자존감의 상실이라고 본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느님만이 인간 자존감의 원천으로서, 하느님은 당신의 한없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만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신다.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에 맛들이자.
=====================
[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
제가 사는 곳은 숲이 우거져서 새들이 많이 날아듭니다. 다람쥐도 살고 있는데 저희와 친숙해져서 겁 없이 다가오곤 합니다.
등산로가 옆에 있어 사람들의 소리,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아침마다 외쳐대는 ‘야훼’소리도 이곳 환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날아와서 아침의 단잠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수도원 가까이에서 새벽부터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망치질이 2주째나 되어 그 동안 아침잠을 설친 저는 이젠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나가는데 인기척이 있어 고개를 돌렸더니 제 방 옆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붙어서 처마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딱따구리는 인기척을 듣자 곧바로 달아났습니다. 그 뒤에도 딱따구리와의 실랑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돌을 하나 집어 들고 벽에 붙어 있는 딱따구리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딱따구리의 색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슬그머니 다시 돌을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귀찮게 구는 놈이라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용서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이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루카 18,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의로우신 하느님
제가 의롭다면
더욱 의롭게 하시고
제가 불의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의로우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깨끗하신 하느님
제가 깨끗하다면
더욱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더럽다면
가차 없이 쓸어내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깨끗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제가 자비롭다면
더욱 자비롭게 하시고
제가 매몰차다면
가차 없이 물리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비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온유하신 하느님
제가 온유하다면
더욱 온유하게 하시고
제가 거칠다면
가차 없이 꺾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저를 통해 드러내소서
살리시는 하느님
제가 살린다면
저가 더욱 살리게 하시고
제가 죽인다면
가차 없이 저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살리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제가 예 하며 따른다면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제가 아니오 하고 거부한다면
가차 없이 저를 팽개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함께 하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당신처럼 되라 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을 닮는다면
더욱 믿고 바라고 사랑해주시고
제가 당신을 지운다면
가차 없이 저를 버리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모든 것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기도의 길로…>
고운님들은 얼마나 감사하며 사시나요? 고운님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많을진대, 실상 감사가 너무 부족합니다. 항상 불만이요, 불평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만병을 치료합니다. 마음의 병도 치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저와 고운님들이 조금만 더 감사한다면, 우리 삶은 많이 변해 있었을 것입니다. ‘빈손’이 아니라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여, 천국 잔치에 들어가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머물러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지금 힘들어서 지쳐있는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이 좀 더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하느님의 자비가 있으시기를 기도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청하는 기도의 힘과 능력을 가르치시기 위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번거롭게 강력하게 청하는 과부의 말을 귀찮아서라도 들어 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자녀 된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이처럼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참으로 많습니다.
루카 복음 11장 9-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약속을 믿지 못해 그렇지요.
분명히 하느님께서 고운님들에게 약속은 매우 많습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간절한 기도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신부님, 우리가 기도한다고, 미사에 참례한다고 바뀔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이런 마음이 들까 봐 비유 말씀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라고 말입니다.
저는 몇 년 동안 영적 일기와 여러 가지 공부, 그리고 지금도 매일 영적 일기와 시편 밤 공부를 하면서, 몇 번이나 포기해 버리려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체념하고 싶은 유혹에 휘말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붙들고 기도했었습니다. 매일 성전 안에서 기도와 미사성제뿐만 아니라 성체 조배실에서, 어디를 가든 묵주 기도를 하면서 버티면서 준비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다 안식년에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기와 시편 공부를 할 수 있는 보너스까지 얹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찬송 받으셔야 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저 두레박 사제는 고운님들에게 고(告)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 있으면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중단 없는 기도만이 ‘하느님의 보호’라는 은총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은총 안에는, 그리고 거룩한 미사의 은총 안에는 바꿀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의 힘에 무장하고 굳건히, 꾸준히, 간절히 청하면 이루어짐의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기도했나요? 맘에 분노가 가득할 때 기도했나요? 어려운 시련 닥칠 때 기도했나요?’ 오늘 주님과 함께하시는 고운님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을 기도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7)
♧♧ 시편 61편 2절…
"하느님, 제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제 기도를 귀여겨들어 주소서."
* 제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여기서 말하는 ‘부르짖음’은 환희의 외침이 아니라, 비탄한 심정에서 피를 토할 듯이 큰 소리로 울부짖는 절규나 호소를 의미합니다. 한편 시편 61편의 저작 배경은 다윗이 궁정에서 추방된 때로 보여 지는데, 그것이 사울의 때인지 압살롬의 때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개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때(사무엘 하권 15-17장. 참조)로 추정됩니다.
다윗은 3절에서 이때를 ‘땅 끝에’에 있는 때라고 표현함으로써 당시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긴박한 처지를 감안한다면 다윗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제 기도를 귀여겨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들으소서.’와 대구를 이루는 뜻이 같은 구절입니다. 다윗은 같은 의미의 말을 반복함으로 하느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기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갈망하는 심정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시편 61편 3절…
"땅 끝에서 기진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 위로 저를 이끌어주소서."
* 기진한 마음으로...
‘기진하다...’라는 말은 ‘눌리다.’ ‘상하다.’ ‘다치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에 쌓여 있어 답답하며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윗은 지금 압살롬에게 쫓기어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피신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사무엘 하권 15장 22-23절.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현재 상태는 육신이 주리고 피곤할 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심히 기력이 없을 만큼 지쳐 몹시 고단한 상태(시편 107편 7절. 참조)라 할 수 있습니다.
* 땅 끝에서... 당신을 부릅니다.
당시 다윗의 위급한 처지에서 생각해본다면, ‘땅 끝’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하고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
‘바위’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시편 18편 3절, 62편 3, 7, 8절. 참조)
다시 말해,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란 비교급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 개념으로서, 너무도 지고하신 분이므로 도저히 인간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초월자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폭풍우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의 견고함처럼, 마침내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백성에게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피신처인 것입니다. 한편 팔레스티나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기 11장 9절)’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도처에 흔히 널려 있는데, 다윗이 ‘저로서는 못 오를 바위’라고 표현한 하느님을 그러한 바위에 비유한 것은 이스라엘인의 마음속에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적절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나무늘보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느리고 잠을 많이 자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솔직히 거북이보다도 느리다는 사실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보통 70㎝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나무늘보는 1분에 20㎝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기지 않습니까? 이렇게 느리다면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어 멸종의 위기를 겪어야 정상일 것만 같습니다. 나무늘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독을 내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느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 느린 점이 오히려 다른 동물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몸에 이끼까지 자생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 이끼가 자연스럽게 보호색 역할까지 하지요.
여기에 주식은 다른 동물이 잘 먹지 않는 나뭇잎입니다. 느리다는 것이 큰 걸림돌인 것 같았지만, 이 느림이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나무늘보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특징짓는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무늘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나갈 때 분명히 삶은 내 편이 되어서 큰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서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라고 포기한다면 결국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해나간다면 그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주님께서는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끊임없이 하는 기도였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더 잘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고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었지만 성가시게 계속 졸라 대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들어주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과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과의 비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불의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재판관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정의롭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의 청을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인생의 소나기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쉽다는 이유로...}
예전에 어떤 분께서 몸에 좋다면서 어떤 물이 담긴 물통을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약재를 우려서 만든 물인데 몸의 면역력을 키우는데 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맛이 궁금해서 물통의 뚜껑을 여는 순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고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약재 중에는 오징어 말린 것도 들어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린내가 심하게 났던 것이었습니다. 이분의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먹어야 하겠지만, 하루에 세 번 이상을 무조건 먹으라는 명령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힘든 물이었습니다.
이런 고충을 동창 신부에게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을 해줍니다. “먹지 마! 이 물 마시는 것보다 30초씩 손을 닦는 것이 더 효과가 있어. 30초만 소비하면 손의 나쁜 세균이 90% 이상 없어진다고 하잖아. 손만 잘 닦아.”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에만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이미 길은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단지 저 멀리에 있는 것, 그리고 남의 길만 바라보고 있기에 나의 쉬운 길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요?
건강을 지키는 손쉬운 방법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쉽다는 이유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이 서울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잘 움직이던 차였습니다. 공항 가는 날, 엔진 오일을 교체하라는 표시가 났습니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고 정비소에 갔습니다. 정비소에서는 엔진 오일이 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기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차량을 정비하는데 하루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차를 맡기고, 차를 빌려서 공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운전 면허증이 정비소에 맡긴 차에 있었습니다. 면허증 없이 차를 운전하는 건 불법 운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걱정이 가득한데 고마운 분이 나타났습니다. 저의 사정을 아시고, 공항으로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동창 신부를 공항에서 잘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차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혹시 모를 더 큰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고마운 이웃을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게는 천사가 많았습니다. 지난 여름입니다. 스위스 여행을 했습니다. 기차에서 지갑을 분실했습니다. 카드, 면허증, 신분증을 잃어버렸습니다. 현금도 잃어버렸습니다. 함께한 일행들은 저보다 더 걱정해 주셨습니다. 하루 지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도 여권과 스마트폰은 분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지갑도 얻을 수 있었고, 헤어질 때는 약간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천사인데 천사가 되어 주기보다는 천사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신자분들이 제게 부탁하는 것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혼인성사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축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면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별일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 드리는 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미안해서, 양심에 부끄러워서 하느님께 청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기다려준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탄력 좋은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오늘 아침성무일도 아침기도중 시편92장 첫 두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올바른 퍈결을 간청했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 사랑만을 간청합니다.
분도회 수도자들은 오늘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녀 제르투르다는 서울 분도 수녀원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성녀는 만46세까지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이였습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닌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영적 삶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과 기쁨의 표지가 됩니다. 참으로 가톨릭 교회가 뼈대있는, 뿌리 깊은, 살아있는 전통을 지닌 훌륭한 가문임을 보여주는 참 좋은 증인들이 성인들입니다. 사실 좋은 환경에서 나온 성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시궁창에서 피어난 연꽃들처럼 거의 모두가 시련과 고난의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 참 자랑스런 성인들입니다.
제르투르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고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 불리어 졌으며,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습니다. 참으로 분도회 삶의 기본과 일상에 충실했던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가로 분도회 영성의 모범과도 같은 성녀였습니다.
하여 13세기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로 인정받아 ‘독일의 데레사’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성녀는 탁월한 영성의 깊이로 ‘위대한’ 이란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신비가 제르투르다였습니다. 1302년 11월16일, 만46세 선종 시 임종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아, 신랑이 오신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한 삶이었는지,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자신의 영적정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이한 성녀입니다. 참으로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예수님께 대한 항구하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성녀 사후 주님은 한 신비가에게 나타나시어, “제르투르다는 자유로운 나의 영혼이다” 말씀하셨다는 일화도 전해 집니다.
참으로 성녀에게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과 사랑의 일치였음을 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역시 단 하나의 소원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 주는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우리라면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참으로 집요하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특별한 비법은 없습니다. 참으로 결코 포기함이 없이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는 것 하나 뿐입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기도의 원리도 간절함과 항구함 둘입니다.
과부의 간청의 명분과 원의는 뚜렷했고 정확했습니다. 다른 무슨 부당한 청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로 이 말마디만 무려 4차례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었지만 과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청에 마침내 항복하여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참으로 올바른 원의라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청, 올바른 소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겠습니다. 명분히 뚜렷하고 올바라야 복음의 과부처럼 간절하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과부의 기도입니다. 탄력좋은 용수철처럼 좌절로 결코 무너지지 않고 즉시 튀어나와 간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개들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지칠줄 모르고 따르는 탄력 좋은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되겠습니다. 성인성녀들의 특징도 영적 탄력 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뜻대로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평생공부에 항구하여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비전을 변화시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저절로 따르는 내적변화입니다. 이런 사랑의 갈망을 담아 매일 평생 간절히 항구히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참으로 우리 수도자들에게 맞는 순수하고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과부처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감상이나 기분이나 마음이 아니라 한결같이 깊고 올바른 지향에 따른 의지적 행위이자 평생 나와의 싸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소원하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내뜻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어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 ‘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주님을 닮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내적변화에 이탈의 삶이요 무엇보다 보는 눈이 바뀌어 집니다. 모두가 좋고, 새롭고, 놀랍게 보일 것입니다. 저절로 문제들은 해결이 아니라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런 내적변화의 기적같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에 나타나고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그들은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처럼 보입니다.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내외적 기적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말마디도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웁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탄력좋은 기도에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화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드러맞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기도도 믿음도 증발되고 실종되어 생각없이, 영혼없이, 영성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 같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뜻대로 간절히, 항구히,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이 담긴 행복기도 한 연을 강론을 끝맺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찬미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가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다양한 주제들 너머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 재판관과 과부, 두 사람을 등장시키십니다. 재판관은 힘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에 강자인 반면, 과부는 가장 약하고 힘 없는 존재를 대변합니다. 그런 과부가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졸랐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루카 18,3.5.7.8)이라는 말씀은 이 대목 안에 네 차례나 나옵니다. 이는 졸라대는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판결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이 과부는 대담한 배팅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양쪽 입장과 정황을 듣고 공정히 판단해서 내려야 하는 "올바른 판결"이 꼭 재판 청구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비유 속의 그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는데,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어련하시겠냐고 하십니다.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면 하느님도 사람도 안중에 없는 재판관도 버틸 재간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밤낮으로 부르짖는" 청원 앞에서 당신 귀를 활짝 여시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초대에 충실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바를 주님께 지치지 않고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고민이 깊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진의를 꿰뚫어 보시기에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고 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올바른 판결"이 지금 당장 기도한 이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셔야 합니다. 실망하고 돌아설 그의 반응까지 각오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올바른 판결"을 뒤집으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곧 진리시니까요. 그분은 감언이설로 포장해 우리 환심을 사려고 하시기보다, 당신이 우리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이들이 쏟아붓는 온갖 오해와 실망과 비난을 묵묵히 들으시며 감내하십니다.
사실 "올바른 판결"은 청한 이가 "올바른 판결"이라고 믿고 수긍하고 받아들일 때 완성됩니다. 그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히 잘못된 응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여기가 바로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올바른 판결"은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에 비추어 딱 알맞는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판결은 모두 올바르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하실 수 없으신 하느님이시니까요.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하는 것은 체념이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수용과 믿음의 증언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건 그렇지 않건, 또 그렇지 않아 보이건 하느님의 응답은 늘 옳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오늘 복음 대목에서 "기도"가 언급되기는 했지만 문맥상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즉 종말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지요. 그리고 여기서 잠시 기도 이야기를 하시는 듯하더니 결론에서는 다시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언급하십니다. 그날의 관건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마다 부족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모자라고 결핍된 것을 채워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과 하나 될 그 때를 위해 우리를 완성에 이르도록 차곡차곡 이끄시지요.
제1독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온 피조물의 본성"(지혜 19,6)까지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물이 마른 땅이 되고 홍해는 장애물 없는 땅이 되고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이' 되었지요. 이처럼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본성을 뒤집어 흔드신 일시적 혼돈의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 백성의 구원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 즉 진정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복원시키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런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의 간절한 청에 "올바른 판결"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이 응답이 당장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꼭 알맞는 맞춤형 응답임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이런 믿음으로 주님의 응답을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해 드릴 때 비로소 이 세상에 그분의 진심이 통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이 믿음을 견지하는 이는 복됩니다. 이미 진심이 통한 그와 주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닮은 꼴이 된 그의 존재가 곧 구원일 테니까요.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불안과 초조, 슬픔 등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귀하고 행복한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초조, 슬픔 등을 하느님께 맡기고 잊어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라는 화살기도를 자주 드립시다. 하느님께 의탁만 하면 유아적 신앙이며 무책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며 믿고 의탁함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감성적 이성적으로 아는 것도 하느님의 빛으로 조명되어 재구성하기 위해 ‘무지의 구름’과 ‘망각의 구름’을 통과 해야 합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_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올바른 판결>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다."
하느님 믿고 따라 살면 막막하다고 여기는
일이 예상치 않게 술술 풀리게 됩니다.
마른 땅이 기름지게 되고
바다가 갈라져 걸어가게 하며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땀 흘리며 노력하고 애써 두드리고
두드리며 할 수 있는 최선을 합시다.
우리 주님은 귀먹지 않으셨으니 ~
다 들으시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맘 아십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 4)
기도도
낙심한 마음도
하느님을
향합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억울함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들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이름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 삶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고 보니
가장 향기로운
마음 또한
기도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끝내 우리를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지체 없이 우리에게
오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기도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올바른 재판관이신
주님을 알고 있는
믿음이 올바른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관계임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