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광한루의 야경을 찍고 남원시내를 관통하는 요천을 건너 켄싱턴 리조트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일요일 아침 일찍 다시 광한루를 찾았다.
밤에 보는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10여년전에 한번 와본적이 있는데 그동안 많이 정리를
해 놓은것 같다.
광한루소개 (홈페이지 인용 : http://www.gwanghallu.or.kr)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더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
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정원의 양식은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
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
광한루의 입구인 청허부
청허부는 광한루원의 정문이다. 이 건물은 1971년 최봉채 남원군수가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로 건평 약 11.83평에 맞배지붕 솟을 삼문형식으로 지어졌는데 광한루원이 천체우주를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로서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옥경인 광한청허부를 상징하므로 옥경을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청허부라 했다.
현 정문은 1970년도 당시에는 남원시장(해방 전까지는 전북에서 제일 규모가 큰 시장이였다)과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우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 차 역사적 가치와 춘향이의 얼이 깃든 광한루원 주변을 정화하고자 민가와 시장을 철거하고(당시 시장에 큰 화재가 일어나 폐허가 됨) 그 자리에 청허부를 세우고 정문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북문대신 이 문을 정문으로 대체하였다.우아한 곡선과 자연스런 풍우판 등을 가진 청허부는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나라 전통 건축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주는 곳이다. 정면의 중앙에는 일중(一中) 김충현이 쓴 청허부란 현액이 걸려 있는데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의 「광한 청허지부」에서 따온 것으로 이 문이 월궁의 출입문임을 상징하고 있다.
완월정은 4월말에 있을 춘향제를 위해 공사중이었다.
완월정은 1971년에 신축된 수중누각으로 1963년 채기묵 남원군수의 재임(1962년 4월 5일~1963년 5월 31일) 당시부터 연차계획을 세워 경내를 확장하고 주변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증설된 건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이 완월정은 인간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한 것으로 (달을 맞이하여 달과 친해진다는 의미)달이 뜨는 동쪽을 id하고 있는데 전통양식의 누각으로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완월정은 1969년 기존 호수를 확장하여 인공 방장형 호수를 축조한 후 수중누각으로 신축한 것인데 2층 누각이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다. 동학농민동기(1894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원성의 남문인 완월루가 지금의 제일은행 네거리에 있었다.
남원성의 사대문은 향일루(동문), 망미루(서문), 공진루(북문), 완월루(남문)인데 그 중 남문의 누각인 완월루의 완월을 따서 완월정이라 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호두각형 건물인데 의정부 육조중 형조의 건물이 이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450년된 팽나무
영주각
영주각은 광한루와 더불어 누원내 신선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으로서 <용성지>의 누정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되어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영주각은 단층 누각 형태로 기단부는 화강석 장대석을 정밀 가공하지 않고 설치했으나 부분적으로 자연미도 보인다. 1층 하부의 석주는 화강석으로 일정하지 않은 방형으로 가공해서 초석받침위에 세웠고 초석위로 장귀틀과 동귀틀을 끼워 우물마루를 설치하였고 초석 위에 흠을 파서 귀틀장선을 끼웠다.
상층 우물마루에는 누간을 두지 않고 기둥에 흠을 파서 여모중방을 끼우고 머름을 낮게 설치하였으며 후면에 목조계단 5단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양서를 하나 내고 위에 쇠서를 구성하여 이익공의 형태를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고 주심도리와 주두에는 첨자를 끼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외진 기둥 주두위에 얹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연목과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 귀의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고 기둥머리 이하에는 석간주 가칠하였고 상부는 모로 단청으로 마감되었다.
영주각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편액과 영주각에서 바라본 광한루의 풍경을 노래한 4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난간은 설치되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하였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하였다.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오작교
선조15년(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이 어린곳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처녀가 아닌 사람이 다리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광한루와 오작교는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져 있어, 춘향이가 단오날 그네를 뛰는 것을 광한루에 올라앉아 이도령이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의 다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광한루원<廣寒樓苑>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춘향관
서울의 4대궁궐보다 격식은 못하지만 훨씬 더 정감이 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역시 우리 제일의 누각이네요.
우리나라 4대누각이라네요.
광한루의 풍경을 잘 담으셨네요.
잘 보고 물러납니다.
빛이 조금 부족했지?
잘봤네요..유담형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