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의 유래가 시작된 멱라수
예로부터 태양의 기운운 가장 강하다고 하여 끝단(端), 낮오(午)자를 써서 단오라고 하였다.
중국 4대 명절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4대 명절에도 속하는 단오.
설, 한식, 단오, 추석이 우리나라 4대 명절이다.그런데 이 명절은 중국 전국시대의 한 충신을 기리기 위해 생긴 날이다. 중국은 거대한 대륙에 유구한 역사를 지녀서 충신들도 많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송나라 악비를 비롯하여 비간, 정백 우, 개자추, 정명, 굴원, 전위, 문천상, 원숭환 등 많은 충신이 있다.
<개자추가 죽은 면산>
그러나 이 중에서도 명절로 지켜지고 있는 인물이 '개자추'와 '굴원'이다.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임금에게 먹였는데 나중에 임금이 그의 공로를 몰라주자 산에 숨었다. 그런데 임금이 그가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다가 태워죽여서 이 날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불을 피우지 않아 찬 음식을 먹는다고 하여 '한식(寒食)'이 되었다.
<굴원>
'굴원(BC 343~BC278)'은 중국 초나라 때 시인이다. '이소'라는 작품집이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양쯔강 주변에 살면서 시를 지었고 임금에게 여러 번 발탁되었으나 반대 세력에 의해 여러 번 낙향한다. 그는 낙향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양쯔강에 비추는 달빛을 보고 노래했고 재주는 있으나 쓰임받지 못하는 현실,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 등을 노래하였다. 그는 초나라의 노래를 시처럼 노래한 '초사'. 그의 대표작 '이소'는 '초사'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 그는 시대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초회왕>
굴원이 살던 당시 초나라왕은 회왕이었다. 굴원은 회왕을 충성을 다해 섬겼다.
당시 중국은 전국 7웅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중 진(秦)의 세력이 가장 셌다. 진은 나머지 6국을 점령하기 위해 이간질을 한다.
초(楚)는 두번째로 세력이 강했는데 진나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굴원은 왕에게 나머지 나라들과 힘을 합치라고 했지만(합종) 진나라의 계략(연횡)에 실패한다.
BC 296년 경 진나라 왕이 초나라 회왕을 부른다. 초나라 회왕은 고민을 하는데 진나라에서 협박을 해대자 진나라에 가기로 한다. 굴원은 진나라에 가면 돌아오기 힘들다고 간언했지만 초회왕은 듣지 않고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에 굴원은 왕이 진나라에 가도록 한 영윤(승상, 영의정)과 싸우지만 다음 왕이 영윤의 편을 들어서 낙향하게 된다.
<멱라수>
그렇게 울분이 쌓인 굴원은 술과 친구하며 자연을 노래하며 시를 짓고 산다. 그러다가 BC 278년 5월 5일에 임금(초회왕)을 지키지 못한 회한과 자신의 초라한 모습. 재주는 있지만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양쯔강 지류인 멱라수에 빛친 은은한 달빛에 매료되어 그는 강에 몸을 던진다. 결국 그가 죽은지 50년 정도 뿐이 안되는 BC 221년 진나라는 6국을 점령하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초나라에서는 항우가 일어났고 한나라로 역사가 흐르면서 진나라에 저항했던 '굴원'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마침 홀수가 겹치는 날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굴원을 기리다가 그가 5월 5일에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날을 명절로 만들어 그를 기억하게 된다. 단오날에 "쫑즈"라는 쌀을 종려나무 잎에 싸서 쪄먹는데 굴원의 시신을 물고기가 먹지 못하게
밥을 호수에 넣었다는 풍습이 이어오고 있다.
<중국 속의 중국>(지은이 김성문, 펴낸곳 서교출판사)은 넓고 넓은 중국 땅 중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고, 김교각, 장보고, 최치원, 의천과 같은 선인들이 이렇게 저렇게 남긴 흔적이 또렷한 강남을 정치·경제·사화·문화·역사적 측면까지를 두루 새길 수 있는 내용이다.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그냥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들을 좇은 단순 기행문이 아니다. 강남에 체화된 흔적, 그 흔적에 체취처럼 배어있는 역사 이면의 전설이나 유래까지도 저자가 한두 번에서 수십 차례까지 직접 두발로 디디며 찾아 담아낸 내용이다.
강남은 우리나라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상해, 남경, 항주, 소주, 영파, 양주, 소흥 등이 강남이다. 비단장수 왕서방, 한국인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장가계와 황산, 관음성지 보타산 등이 있는 곳이 바로 강남이다. '강남은 옛날부터 한민족에게 친숙한 지명이었다, 친구 따라 가는 강남, 제비가 가고 온 강남, 옛시조에서 님이 떠난 강남, 옛글에서 그리움으로 묘사되는 강남… 이러한 강남이 김교각 장보고 최치원 의천 등의 이력에서 알 수 있다시피 고대에는 한민족이 '누비고 다니던 마당'이었지만 중세 이후에는 한민족의 자취가 적막했다.' - 297.
강남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남아있고, 임시정부 인사들과 그 가족의 묘가 그대로 남아있다. 상해 강만구 만안로에는 살점이 떨릴 만큼 분노하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일본은 아직 반성하지 않고 있는 그 현장, 일본군들이 꽃다운 소녀들을 짓밟던 위안소 집중지역도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남아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의 상해에서 1945년의 중경까지, 27년동안 10번의 천도를 했다. 상해에서 13년, 항주와 가흥에서 17개월, 진강에서 3개월, 남경에서 21개월, 장사에서 7개월, 광주(광동성)에서 3개월, 유주(광서성)에서 4개월, 기강(사천성)에서 1년반, 중경(당시엔 사천성)에서 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행적 10군데 27년인데, 그중 6군데 20년의 자취가 강남에 남아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있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행로는 그야말로 유랑의 길이었다. 그나마 안착한 중경 임시정부 이전의 7~8년은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세월이라 할만 했다. - 217쪽
심청이 시집을 간 곳도 강남에 있고, 그네뛰기와 청포물에 머리 감기를 연상케 하는 단오가 시작된 곳도 강남이다. 단오는 호남성에 있는 멱라수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처럼 예기치 않았던 강남 여행은 이제현과 해월이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며칠 후, 이제현과 해월이는 충선왕의 주관 하에 평생을 정인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는 단출한 의식을 갖고 신방을 차렸다. 부덕(婦德)이 남다른 권씨 부인은 충선왕의 제안에 기꺼이 동의를 해주고 두 사람의 신혼 초례를 정성스레 준비해주어 지아비 이제현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마침내 첫날밤을 맞이했다. 어린 신부 해월이는 꽃다운 방년 18세였다. 그녀는 이슬 머금은 포도알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이제현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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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를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해월이, 살아가면서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소녀는 비록 여자이오나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해월이는 마치 갓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답구려.”
“저는 소원을 성취했기 때문에 선생님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걱정하지 마오. 해월이를 외롭고 힘들게 하진 않을 테니까.”
해월이의 착한 마음씨는 향기로운 감로수처럼 이제현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녀는 오렌지 같은 봉긋한 가슴, 잘록한 허릿매, 아담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덜 익은 풋사과 같은 그녀의 육체는 태초의 이브가 되어 이제현의 품에 살포시 안기었다. 두 사람은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밤의 장막을 걷고 열반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이윽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는 탄성의 소리를 내며 해월이는 18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이제현에게 바쳤다.
해월이는 발해만 너머 이정기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주를 그리며 자랐지만, 이날 이후 그녀는 푸른 서해 너머 정인의 고향인 개경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외롭고 고독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청주지방의 촌장 이세웅은 마치 고구려 주몽(朱蒙, 동명성왕)의 두 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버지로 알려진 연타발(延陀勃)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이후 이세웅은 소금매매사업으로 일으킨 부를 고려 부흥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고 만권당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한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 고려에서 구할 수 없는 서양과 중국의 고금(古今)의 많은 진서(珍書) 8,000권을 구입해서 충선왕의 이름으로 고려에 기증하였다.
이제현은 우리 역사상 누구보다도 중국 땅을 두루 돌아다닌 인물이다. 이 소설에 소개되는 시를 제외하고도 그가 유람한 곳으로 그의 시에 보이는 곳만도 셀 수 없이 많다.
<황화(黃河)>, <맹진(孟津)>, <표모묘(漂母墓)>, <금산사(金山寺)>, <보타굴(寶窟)>, 송나라와 거란의 경계에 있는 강인 <백구(白溝)>, 한무제가 무고에 속아 태자를 죽이고 세웠다는 <망사대(望思臺)>, 자객열전의 주인공 예양이 숨었다는 <예양교(豫讓橋)> 등 이제현은 발자취가 이른 곳마다 모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의 고사를 두루 소재로 삼아 시를 써서 중국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렇듯 이제현은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암흑시대의 아픔을 시로 달랬으며, 원나라의 탄압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정신’을 되살리고, ‘고려의 자존심’을 세우려 무던히도 노력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자기보다 200년 먼저 이 땅에 살다간 이제현을 가리켜 이렇게 평했다.
“옛부터 일컫는 이른바 불후(不朽)라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과 공(功)과 언(言)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가 공까지 갖추기 어렵고, 공이 있는 자가 언까지 갖추기 어렵다. 고려 5백년 동안에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 가지를 겸비하고 시종(始終)이 일치하며 높이 솟아 나와서 아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이제현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이제현 사후 약 500년 뒤에 출현한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도 촌티가 나던 동국(東國)의 시 작품이 익재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에 대해서도 내놓을 만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제현은 참으로 우리나라 2천 년 이래의 대가로서 그가 쓴 시의 화려하고 명랑하며 전아한 품은 우리나라 시의 딱딱하고 꺽꺽한 폐습을 깨끗이 벗어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이제현을 높이 칭송했다.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곳을 읊은 이는 오직 이제현 한 사람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킨 한말(韓末)의 김택영(金澤榮)은 이제현의 시를 이렇게 평했다.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한시 사상 제일의 대가이다.”
원나라 정쟁에 휘말린 충선왕,
티베트로 귀양 가다
해가 바뀌어 경신년(1320, 충숙왕7)이 되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시종하여 절강성의 보타산(普陀山)에 강향한 공을 인정받아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일을 보던 밀직사(密直司)의 종2품 벼슬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차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충선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더욱 승승장구한 것이다.
그러나 1320년 4월. 원나라의 인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 황실에서는 또다시 황제 자리를 놓고 분열과 갈등이 생겼다. 당연히 충선왕은 원나라 왕위 계승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원의 무종(武宗)은 동생인 인종(仁宗)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인종이 세상을 뜨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로 약속을 받았는데, 인종은 이 약속을 깨고 자신의 아들(영종英宗)에게 양위했다.
인종은 충선왕의 쿠데타 동지이자 후견인이었는데, 그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충선왕은 강력한 지지 기반이 사라져 바람 앞의 등불처럼 미약한 존재로 전락했다. 충선왕은 무종 편에 섰고, 인종의 아들 영종은 즉위 후 무종 세력을 배척했다. 당연히 충선왕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원간섭기’에 원나라 궁정에서 환관의 권력은 고려 국왕을 능가했다. 이러다 보니 고려에서는 출세를 위해 성기를 거세하는 것이 유행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거세하고 형이 아우를 거세하였다. 일단 거세하면 썩은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사람도 고려 조정을 우습게 보았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고려의 노비 출신 환관이다. 그는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후 고려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며 충선왕을 중상모략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충선왕은 임백안독거사를 미워하여 1320년에 원 황태후에게 청하여 장형(杖刑)을 치고 고려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백안독거사는 충선왕에게 원한을 가졌고, 승상 팔사길(八思吉)을 많은 뇌물로 매수해서 충선왕을 중상 모함하고 나선 것이다.
그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의 왕위쟁탈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예전에 불경 공부를 한 적이 있는 남경(南京)의 금산사(金山寺)로 급히 피신을 했다. 그런데 충선왕이 금산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영종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연경으로 끌려가 10월에 형부로 넘겨져 머리가 깎인 채 석불사(石佛寺)라는 절에 유폐되고 말았다.
1320년(충숙왕7) 12월.
충선왕은 연경에서 1만5천 리 떨어진 토번(吐藩, 티베트) 살사결(撒思結) 지방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이었다. 유배의 표면적인 원인은 고려 간신의 무고였으나, 실질적 이유는 원 영종이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인 충선왕을 제거하려 했던 데 있었다.
한때 고려와 원나라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충선왕에게 닥친 기막힌 운명, 그것은 ‘원간섭기’ 고려 국왕의 비극적인 운명이기도 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땅 티베트로 유배길을 떠나는 충선왕의 행렬은 초라하고 처참했다.
유배된 충선왕에게 미래가 없어 보이자 많은 신하들은 그를 버렸다. 재상 최성지(崔誠之) 등은 호종을 거부하고 도주해 버렸다. 오직 직보문각 박인간(朴仁幹)과 대호군 장원지(張元祉) 등 18인이 함께 유배지까지 시종하였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납살(拉薩, 라싸-티베트의 수도)에서 서쪽으로 450㎞ 더 들어간 황량한 고산지대인 살사결(지금의 사캬사원)이었다. 연경에서 남쪽에 위치한 탁군으로 내려온 뒤, 서쪽의 도시들인 석가장(石家莊), 정주(鄭州), 서안(西安), 난주(蘭州), 타사마(朶思麻), 납살을 거쳐 살사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의 참담했던 고난의 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충선왕은 얼음 틈에 끼여 졸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도적떼와 수도 없이 맞닥뜨려야 했으며, 혁선(革船, 가죽배)으로 강을 건너고 소달구지에서 노숙하며 강물에 미숫가루를 타 마시며 반 년 만에야 유배지에 닿았다.
한편, 이제현은 충선왕이 금산사에서 체포되었을 때 고려에서 원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황토점(黃土店)이란 곳에서 ‘충선왕이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귀양 갔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충절을 노래한 <황토점> 3수를 지었다.
어지러운 세상 일로 인한 근심 차마 듣기 민망하여 다리 위에 말을 세운 채 문득 할 말을 잊었네.
어느 때나 태양은 아픈 마음 비춰줄까
곳곳의 푸른 산 눈물 흔적에 가리웠네.
잔도(골짜기 다리)를 태운 장량(張良,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이 어찌 신의를 저버렸으리요
목숨 걸고 은혜 갚은 영첩(靈輒,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처럼 일찍이 보은의 길 알고 있네.
아아! 아무 방법 없어 마음 아픈데, 이 몸에 날개 달 방도라도 있다면
구름 낀 하늘에 날아올라 대궐에 가서 한 번 외쳐보련만.
이제현은 황토점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충선왕이 유배당한 사실이 너무도 눈물겨워 연경으로 가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제현은 한동안의 칩거를 깨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연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눈 쌓인 황토점 산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이제현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연경에 도착한 이제현은 만권당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권씨 부인과 해월이가 실의에 빠진 이제현의 말벗이 되어줬지만, 잔뜩 찌푸린 겨울 날씨처럼 점점 참담해지는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했다.
만권당도 옛적의 북적이던 시세(時勢)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학문을 연마하던 원나라 석학들은 가을날 오동잎 떨어지듯 하나 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권당은 어느새 절간처럼 고요해 졌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게 다가왔다. 건조하고 매서운 북서풍이 세차게 불어왔다. 황사의 발원지인 고비사막에서 날아온 뿌연 모래 가루가 연경을 온통 은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겨울이 깊어지자 만권당 정원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나무 꼭대기에는 은회색 서리가 내려앉았다. 황량하게 변한 만권당 하늘에 떠도는 까마귀는 까악- 까악- 우지짖고, 밤이면 부엉이가 괴괴이 울었다. 날아드는 모든 새들의 지저귐소리는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서곡처럼 구슬프고 처량하게만 들렸다.
미래를 위한 발탁, 34세의 지공거(知貢擧)
단오(端午)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 때부터다.
굴원(屈原,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시인)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고려에 전해져서 단오가 되었다.
해마다 단옷날에는 녹음방초가 우거진 만권당의 어은이라 불리는 연못가에서 시회(詩會)가 열리곤 했다. 충선왕이 시제(詩題)를 내면 이제현과 중국학자들이 돌아가며 시작(詩作)을 읊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시회가 끝나면 음식을 장만하여 고려 인삼주로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충선왕은 이처럼 학문을 좋아하고 서화에 조예가 깊은 풍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