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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시대 | 지역 | 내용 및 시대배경 |
(마곡족)
| 마고지나(麻姑之那) 12000~14000년전 |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 * 발해 동쪽 | '마고지나'의 문명은 우리 최고의 조상인 '마고'에 의하여 시작된다. 그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 12000년 전에 해당한다. 이때가 한웅천왕이 신시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최초로 세운 신시국가시대였다. 신시국가는 오늘날의 국가체제와 다른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국가체제이므로 초국가체제(超國家體制)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신시를 표방하고 나선 한웅천왕의 신시시대에 오가(五加)체제에서 우리는 마고시대의 초국가체제를 유추할 수 있다. 신시神市를 세워 동이의 최고 조상이 된 마고는 후손 중에서 여자 셋을 한 조組로 묶어서 사방으로 시집 보냈다. |
(풍이족)
| 한국 시대 BC7198 ~ BC3898 (9900년전) | 파미르 고원 | 한인 천제계열을 풍이라고 한다. 풍이는 뱀 아이콘을 사용한다. 한국을 건국하면서 12국으로 분화 해 나갔다. 구황족은 지금으로부터 9900년 전에 한인천제가 나와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했던 구한족(九桓族)을 이르는 말이다. |
| BC3898년 경 | 한반도
| 고시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 농사를 시작한 사람으로 나오는 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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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 배달국 5대 태우의 한웅시대 b.c 3528~3413
| ※ 중국은 자기네 조상이 된 복희를 산동성에서 낳았다고 썼고, 한국은 만주의 본국에서 태어나 밝검의 동생으로서 우사를 지내고 서쪽 산동성을 거쳐 (산동성에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수인씨의 치소였던 진(陳: 하남성)에 들어가 중국의 임금이 되었다고 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 | 1. 조대기: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번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하고 조식보정(단전호흡과 유사한 것이라 추정)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불로장생)의 술이다. 2. 밀기에 이르기를; |
| 8세 안부련 한웅 말기 BC3240~BC3167 | 강수(姜水) ( 지 도 click ) | "소전(少典)은 소호(少 )와 함께 고시씨(高矢氏: 한반도의 조상: 밝달나라 농업장관)의 방계(: 첩의 아들 또는 둘째아들 이하의 혈통)이다." (검불본기) |
| b.c 3218~3078 | 강수(姜水) → 열산(列山): 호북성 수현(隨縣)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川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이 강姜씨가 됨. 강씨의 마을은 지금 중국 보계寶鷄 남쪽 교외의 강성보姜城堡 일대)
|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온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검불본기) 소전의 한(韓: 汗: 소전나라 군주)의 아들 신농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列山)으로 이사했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을 편리하게 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한웅천왕시대에엔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가 있었다. 고시 다음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은 다의발한웅인 복희였다. 복희의 후대에 농사의 신으로 불리는 신농神農이 태어났다. 고시, 복희, 신농이 모두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들이므로, 가업을 세습으로 이어나갔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농사를 관장했던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시와 복희와 신농은 모두 농사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들을 고시의 후예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한웅천왕시대의 농관이었던 고시라는 이름이 단군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시례高矢禮로 그대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고시 집안이 맡았던 역할이 오랜 동안 세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적제赤帝라는 신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같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복희 또한 부해復解로 불려지고, 신농을 염제炎帝라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 집이 대대로 불을 관장해 온 집안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신농이 복희와 같은 집안인 풍이 출신임을 밝혀 보았다. "뒤에 갈고한웅(밝달나라 10세한웅)이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空桑: 하남성 陳留)의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검불본기) * 중국기록(삼황기) |
* 출처 : 노중평 블로그 배달나라의 최고 학자요 사상가요 이론가인 제 6세 다의발多儀發한웅천왕(서기전 3418-3321 년)을 복희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대체하여(임진 90년에 즉위했다고 하였다) 그의 철학과 사상과 기술을 잠식하였고, 제 8세 안부련安夫連한웅천왕 때에 신농을 내세워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므로 하화족이 내세운 복희는 다의발한웅천왕(6대)이고, 신농은 안부련한웅천왕(8대)이다. | |||
※제양 (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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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백국과 황제국은 소전少典(임금으로서 제사 때 쓰는 축祝을 만드는 제관이라는 뜻)을 아버지로 두고 있었고, 여와국에서 보낸 두 여자 사이에서 각각 출생한 이복형제 사이였다. 유망이 장자였고, 황제가 차자였다. 그러므로 소전이 물려준 나라의 정통성은 유망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황제헌원과 비슷한 연대 b.c2692~2592 |
| 1. 유망과 황제는 이복형제사이 신농神農의 8대손으로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모계종족인 웅족熊族 출신이다. 웅족 여인 2인이 그와 관계하여 이복형제인 유망과 황제를 낳았다. 유망이 형이고 황제가 동생이다. 유망은 같은 웅족 출신인 단군왕검의 친족親族 조상이 되고, 황제는 원족遠族 조상이 된다. 두 집안은 황제로부터 우로 이어지고, 유망으로부터 전욱고양으로 이어지는데, 황제와 유망 대에 이미 두 집안은 철천지원수의 사이로 사이가 멀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황제가 형의 나라인 유망국을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 |
2. 유망과 황제는 장인과 사위 사이 (출처:금문의 비밀) 신농(유망)과 황제의 사이를 여러 전적에서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제간이 되었다가 배다른 형제간이 되는 등 형제 사이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다. 당시의 가족 관계가 특이한 양급제, 푸나루아 모계제로 누비사돈이 되다 보니 이런 관계를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낙빈기는 사마천은 자(子)라는 글자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위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지적하고, 소전의 아들은 신농(유망)이고, 황제는 아들은 아들이되 신농(유망)의 사위아들이라고 했다. | |||
| b.c2692~2592 | 산동성 곡부 | 배달나라에서 고시계열로 갈라져 나온 가계를 족보로 하여 황제세계黃帝世系를 창설하였다. 소전(少典)의 별고(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치우한웅이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병사를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동남쪽 女水의 남쪽 성)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垈: 산동성-안휘성)의 사이에 웅거했다. |
*누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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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망의 딸. 양잠기술을 한층 발전시킴. |
희화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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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망의 아들. 태양신. |
항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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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헌원의 딸. 전욱고양의 母. 소호금천씨와 남매지간. |
소호금천씨 | BC2474-BC2468 |
| 황제헌원의 아들. |
| b.c2613~2436 | ??? | 양羊은 황제의 이복형 유망의 장자인 희화의 아들로 소호금천의 뒤를 이어 제위(BC2467 ~2420)를 이었던 사람 전욱고양이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울 때, 조선을 대표하는 종족이 오가五加였다. *단군(양가)은 5가의 대황제로서 중앙에 위치하며...동양철학의 핵심 (한한한의 비밀과 사명에서 발췌) http://cafe.daum.net/oriental * 우양리설화(우가와 양가) : 우가와 양가가 앙숙. 잉어문제로 싸움. 착한 노인이 잉어를 놔주라고 하나, 우가가 말을 듣지 않음. 노인의 꿈에 마을이 물에 잠기는 꿈. 아무도 믿지 않아 홀로 피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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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진본기(秦本紀)> ...전욱의 예손(裔孫)을 여수(女修)라 하는데 하루는 여수(女修)가 옷을 짜는데, 현조(玄鳥)가 알을 떨어뜨려 여수(女修)가 이를 삼켜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大業)이 성장해 성인이 된 후에, 소전(少典)의 자녀인 여화(女華)에게 장가들었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았는데... |
진(秦) 나라의 시조 | |||
| 요임금 시대 b.c2357~2258 순임금 시대 b.c2255~2208 b.c2357~2231 |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출생. 곡부시의 언(偃:奄)이 활동지
(요약표) | 이(李) 씨 성은 본래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조이(鳥夷) 부락"의 "고요(皐陶:화락하게 즐길 요)"가 "혈연의 시조"임. 고요(皐陶)는 요(堯)가 염황이(炎黃夷:염제, 황제) 연맹 수령이 되었을 때에 이관(理官)으로 임명되었으니, 곧 사법(司法)을 관장한 장관(長官)이다. 즉 고요는 요, 순 시대에 법관인 대리(大理) 벼슬을 맡아 요임금과 순임금을 훌륭히 보좌하였습니다. 마침내 관명(官名)족으로 "이(理)" 성(姓)이 되었다. 전설에, 고요(皐陶)는 선악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일종의 특이한 외뿔 짐승 해태( :論衡에 선악을 아는 외뿔짐승의 羊이라 하였다)를 길렀는데, 이 짐승의 판단으로 시비선악을 잘 내려 순이 정권을 이양 받은 후에도 대리(大理) 직에 있어 천하의 죄악을 잘 평정하여 사람들은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직업에 종사했다 한다. |
전욱고양의 부락이 8개 씨족으로 분파.고요는 그 중 하나인 정견(庭堅)의 수령.(실제 대동방의 계보에 정견이라는 후손이 있음) | |||
중국 족보사료에 의하면 고요(咎繇:皐陶)는 동이부족 수령이 되어, 활동 중심지가 지금의 산동성 곡부(曲阜) 시(市)인 언(偃:奄)이었다고 말한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세기(世紀)>를 인용해 고요(皐陶)에 대해 설명하기를,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곡부(曲阜)는 언(偃) 땅인데, 고로 제순(帝舜)이 이로 인해 사성(賜姓)을 내렸으니 왈 "언(偃)"이다" 이는 「좌전(左典)」가운데 설명한 바 있는, "천자가 태어났으므로 사성을 내렸다(天子因生而賜姓)"이다. 고요(皐陶)가 죽은 후, "그는 육(六)에 장사지내졌다" 「사기(史記)」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설명하기를, "안휘 수주(壽州) 안풍현(安豊縣:合肥바로 위) 남쪽 130리에 옛 육성(六城) 동쪽에, 우(禹)는 그의 어린 자식을 육(六)에 봉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이를 기념해서인지 수주에 우왕묘(禹王廟)가 세워져 있다) 이후로 육(六)은 다시금 일개 "언(偃)" 성(姓)의 소국(小國)이 된다. | |||
초나라 세보 중에.. 목왕 3년 기원전 623년 강(江)1)을 멸했다. 목왕 4년 기원전 622년 육(六)2), 요(蓼)3)를 멸했다. 육(六)과 요(蓼)는 고도씨( 皐陶氏)4)의 후예들이 세운 제후국이다, 1) 강(江)/ 영(嬴)씨 성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식현(息縣) 서남 2) 육(六)/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六安市)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3) 요(蓼)/ 지금의 하남성 고시현(固始縣)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4) 고도씨(皐陶氏)/언(偃) 성의 동이(東夷) 족의 부족장. 순 임금때 형벌을 관장장하는 벼슬에 임명하고 우(禹) 임금 때는 그이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그 뒤를 잇지는 못했다.(따라서 고도씨=고요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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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분하 1. 황하의 지류
2. 길림성 북동부의 판링산[盤嶺]에서 발원하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흘러 헤이룽장성에서 샤오펀강[小芬河]과 합류한다(백과사전) | 교극에게서 제곡고신帝 高辛이 태어난다. 제곡고신이 BC2420년에 전욱고양의 뒤를 이제 제위에 오른다. 홍제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제곡고신의 폭정을 이기지 못한 소풍蘇豊이 홍제 8년에 귀순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여 불함산弗咸山 북쪽의 숙신肅愼 땅에 살게 하였다. (蘇氏上上系) 단군왕검의 장인이 되는 단국의 2대 홍제 때인 기사 8년(BC2390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 綏芬河 동쪽으로 쳐들어온다.(이고선의 조선기) 이때 의려장이 되어 수분하 동쪽에서 제곡고신의 군대를 퇴치하였다. 홍제는 그 공을 치하하여 소성蘇城에 봉하고 하백河伯을 삼았다. (소씨상상계) 홍제가 풍에게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발견하는 기록이 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일찍이 사성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제곡고신 때에 와서 홍제가 다스리는 단국 배달나라를 침범하는 기록 이 나오므로, 이때 중원에는 제곡고신의 영토와 단국 배달나라의 경계를 가르는 경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북경의 북쪽을 횡으로 가로질러 가는 거대한 만리장성의 존재가 이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홍제는 <한단고기>에서 신시 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으로 기록한 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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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333~2240
| 1. 영변의 묘향산 2. 만주의 심양시 3. 송화강 하얼빈 ( 계 보 ) | 熊心國(?~BC2333)과檀國(BC2457~2333)이 청구국(BC2706~2598)의 뒤를 이어 배달나라를 대표하게 되었다. 단국 출신의 단군왕검은 14세 되는 해에 웅심국의 웅녀에게 장가들어 비왕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단국의 태자를 겸직하고 있었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선포하기 전에 조선은 이미 웅심국과 단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국의 世系는 천일태제(BC2457~2400), 지일홍제(BC2399~2334), 태일성제(단군왕검BC 2333~2241)의 3대로 이어진다. 한인천제시대에 기성己姓을 창설하여 황하일대에서 구한족의 하백임무를 수행해 오던 곤오昆吾족(한인천제의 61세 손)이 황제-제곡고신으로 이어지던 시대에 세력이 약화되어 하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홍제에게 귀순(홍제8년 BC2392)하였다. 이해에 제곡고신이 단국과 고신국의 경계인 황하의 지류 수분하綏芬河를 넘어 단국을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고 하백임무수행의 능력을 회복하고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하였다. <扶蘇譜序>, <朝鮮紀> 웅심국왕이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고 단군왕검은 웅심국을 인수하였다. 또한 단국의 홍제가 붕어하면서 단국의 제위에도 올라 무주공산이 된 배달나라를 승계하였다. 이해가 무진원년인 BC2333년이었다. 그는 당시에 하백인 비서갑(한인천제의 62세손)의 딸 하백녀와 혼인하여 하백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를 해명할 수 있는 기록이 李固善의 「朝鮮紀」에 있다. 단군왕검은 그의 장인 지일홍제가 붕어하자 무진원년(BC2333년)에 단국檀國을 승계하고 나라 이름을 한웅천왕이 나라를 세울 때 썼던 배달나라倍達那羅라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경인 23년(BC2311년)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쳤다. |
*구자일씨 자료 기원전 2830년, 13세 사와라 환웅 때에, 배달국의 왕비족이었던 웅녀 여왕의 후손 려(黎)가 단목국(檀木國) 왕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단목국은 만주 심양시 북쪽 철령시 단산자문화지입니다. 460년후 단목국 왕검 단웅(檀熊)이 웅씨왕녀에게서 아들 단군(檀君)을 얻으니 기원전 2370년입니다. 치우환웅의 배달국(만주)이 산동 청구국으로 떠난 뒤, 만주에는 대국 단목국의 소국 웅씨국(웅심국), 소국 웅씨국의 소읍 영변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군은 14세에 웅씨왕의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웅씨 왕국 왕검에 올랐습니다. 단군은 묘향산에서 성장하여 모후인 웅씨왕녀를 보필하다가 24년 뒤에 오녀산성에 들어가 웅씨왕검에 오른 것입니다. 그 해, 2333년 단목국에 들어가 구환족(九桓族)을 통일하고, 대표 왕검인 [진한]으로 등극하였습니다. 단군은 마침내 부왕인 단웅의 나라 단목국도 차지한 것입니다. 이 때 신인 왕검이라고도 했고 진한(辰韓)도 [신한]이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신인 왕검이 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습니다. 이 아사달 단목지허는 단군왕검보다 2000년전에 환웅 여기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구이족의 수장인 단군이 된 것입니다. (요나라 때 묘비로서 필자에 의해 고증 되었음) 비왕으로 24년이 지나서 웅씨왕이 전사(戰死)하자 신인 왕검이 대신하여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 왕검은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思達)에 조선을 세워 개국하였고 국토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진한(辰韓)은 스스로 통치하셨다. 왕검의 진한(辰韓)은 요나라 기록에서 고리국고지(藁離國故地) 한주(韓州)입니다. 지금의 요녕성 창무시 평안보유지(彰武市 平安堡)이고 이는 필자에 의해 고증되었습니다. 평안보유지는 환웅의 홍산문화를 뒤엎은 고대산문화(高臺山 文化) 영역이며 동시에 대릉하 동쪽에서 청동기가 가장 먼저 발달한 곳입니다. 현재 강이름은 류하인데 고대는 거류하, 대료수였으며 여기에 단군이 돌아가신 진한의 유궐(柳闕)이 있었던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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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b.c2255~ 2208) 하나라 (b.c2100~1800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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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皐陶)에게는 장자 백익(伯益)이 있었는데, <제왕세기>에 설명하기를, "백예는, 순(舜)왕을 위해 가축을 많이 길렀으므로, 가득 차 넘칠 "영(瀛)" 씨 성(姓)을 사성(賜姓) 받았다" 이로써 가히 알 수 있듯이, 백익(伯益)은 잘 훈련된 조수(鳥獸)로 인해 순(舜)으로부터 "영(瀛)" 성(姓)을 사성(賜姓) 받았으며, "영(瀛)" 성(姓)은 부락의 수령이 되었다. 하나라 우왕을 보좌하여 치수사업에 성공 함. *황씨의 시조라고 함.(안원전 홈페이지 참조) 15세 백이조伯夷祖께서 우禹임금을 도와 치수에 공이 크다 하여, 여국呂國 의 제후가 되었고, 여씨 성을 받고, 다시 강성을 강씨로 내려, (족성 강을 씨칭 강으로 바꾸었다는 뜻인데, 족성은 유망계열의 모계족성이고, 씨칭은 황제계열의 씨칭이 된다) 姜, 呂 두 성을 모두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염제성조는 창성시조(성은 모계혈통), 백이성조는 씨시조(씨는 부계 혈통)이다. |
*우왕 | 하나라b.c2100~1800추정 |
| 하나라 건국자 |
| 은 말기 |
| 고요(皐陶)의 후예는 역우(歷虞), 하(夏), 상(商) 26세 기간에 이관(理官)이 된다. 고인(古人)이 관명(官名)으로 씨(氏)를 삼은 것에 따라, 고요(皐陶) 및 그 자손은 이(理) 씨가 되었다. 관(官)으로써 씨(氏)를 삼은 이(理)씨는 문제의 이정(理征)이라는 사람 때 이르러, 상(商)의 맨 마지막 왕인 폭군 주(紂) 왕의 이관(理官)으로 임명되어, 상(商) 주(紂)가 혼용혼용무도(昏庸無道)하여 여색에 빠지자, 여러 차례 나아가 간언하고, 법을 지켜 아첨하지 않았으나 이미 혼음(昏淫)해진 주(紂) 왕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죽을 화(禍)를 만났다. 요약 => 고요의 자손들이 하, 은 때까지 벼슬이 이어져 오면서 벼슬이름으로 리(理)씨를 삼았는데 은(殷)의 마지막 왕 폭군 주왕 때에 후손 징(徵)이 바른말을 직간하다 죽음으로 그의 처 설화부인이 아들 이정(利貞)을 데리고 산속으로 피신하던 중 오얏 나무 열매를 먹고 목숨을 부지했다 하여 성(性)을 발음이 같은 이(李)로 고쳤다 함. |
| 춘추시대.서주말기b.c 571 生 | 초국 고현(허난성[河南省] 鹿邑縣)출생 | 춘추 전기의 동이족 국가 초(楚)국 고현(苦縣) 인.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 |
| 진(秦) (b.c221-206) | 농서 | 진(秦)나라 농서지방을 유수(留守)하여 농서백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부터 농서이씨라 부르게 됨. 한(漢) 무제시대 때 위만조선을 토평할 때 농서이씨의 후손 이진(李震)이 참전공을 세워 낙랑태수가 되었는데 그 후손인 천보(天寶)가 흉노토벌의 공을 세워 양산후 겸 낙랑태수로 봉해져 후손들이 양산(楊山)이씨가 되었고 동생 천록(天祿)이 양산에서 사로(斯盧)로 이전하여 진한(辰韓)의 사로후에 봉해지고 그가 전에 살던 지역이름을 따서 양산촌(楊山村)이라 하였다 합니다. 신라 유리왕때는 6부촌장에게 성을 사성할 때 양산촌장 알평에게 본래의 성씨인 李씨를 사성하여 지금의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되었다 합니다. |
* 출처: 한민족뿌리찾기 한알회 . 노중평 홈페이지. 한단고기. 규원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