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인드라망/ 이 선
차 한 잔 들고 창가로 가면
맞은편 101동이 성큼 다가온다
먼 나라에서 내려오신 함석지붕들
푸른 하늘 모래알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자글자글 삼매에 빠졌다
꼼꼼하게 써 내려간 경문들
구절구절 기왓장마다
흐르는 법문이 팔만이겠다
이렇게 우리 마주 보는 거울이듯
모든 동과 세대들
주고받는 선문답이 무량이겠다
구구절절 날아드는 비둘기들
벽에 갇힌 창문들도 틈틈이 귀를 열고
질서정연하게 밖으로 향해 있다
한 치 흔들림 없는 수평의 감각으로
층층이 견뎌내고 있을 천장들
모두 하나같이 바닥으로 존재할 터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
아래층에서 받쳐주듯
위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
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
누겁의 업장을 녹이듯
하루하루 달게 받들어 모시는 일
삼키고 삼켜도 끊어오르는 솥단지 삼독을
식어 버린 한 모금의 찻물로 달래는 지금은
녹음이 독물처럼 퍼져나가는 상심의 계절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들
수미산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 2020년 제26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 이선 시인
- 1962년 충북 음성 출생
- 한국방송통신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 충북대 대학원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 심사평 》
따뜻한 삶의 모습 형상화…놀랍도록 참신해
지용신인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더해가는 것 같다. 올해 응모자는 300명을 훌쩍 넘었고 응모작품은 한 사람이 열편 스무 편도 응모한 경우를 포함해서 2000편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요즘 날로 더해 가는 시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당선의 영예를 놓고 겨룬 작품은 염종호의 ‘금강초롱’, 윤계순의 ‘그늘들은 가볍다’,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이었다.
염종호의 작품은 아주 정밀한 시적 장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내딛는 시창작 주체의 치열성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관습적인 창작 방법을 탈피하여 과감하게 ‘나’만의 시세계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다. 윤계순의 작품은 ‘느티나무’와 ‘그림자’의 대조를 개성적으로 형상화한 시적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느티나무 그늘이 일렁거리는 모습을 온갖 사건 사고를 보도하고 비평하는 일간지의 페이지와 비교하는 재치 있는 수사가 너무 작위적인 비유라는 점이 아쉬웠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이선의 ‘아파트 인드라망’은 신인이 지녀야할 독창성과 새로운 시창작 방법을 고루 갖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햇볕 밝게 비치는 아파트의 지붕과 창문들의 풍경을, 엉뚱하게도 제석천의 궁전 위에 펼쳐진 보배구슬 그물인 ‘인드라망’으로 순간적으로 기막히게 변용시키고 있다. 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따뜻한 삶의 모습이 곡진하게 형상화되고 있는 놀랍도록 참신한 작품이다.
우리 삶이 아무리 고되고 험난할지라도 시인은 ‘저 멀리 하늘가 햇살 비추이는 아파트’를 고즈넉이 바라보는 일이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아래층에서 받쳐주듯/윗층 이웃들 고단한 몸 뉠 수 있도록/내 생의 천장 높이 받드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지녀야할 시 의식의 첫째 자리가 되는 것이다.
- 심사위원: 오탁번(시인) 유종호(문학평론가)
◆ 시창작 Tip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시 속에 장치한 것이 좋은 시다. 감정이 노출된 시는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좋은 시에서는 시인의 목소리가 숨어버리고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 작용만 일어난다.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하고,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