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역사의 길
차(茶)의 메카인 비봉루(飛鳳樓)의 비사(祕史) 2
비봉루는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이다. 팔작지붕과 겹처마 오량가로 구성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누하주는 장초석으로 8각으로 위에 비스듬히 가공하였고, 3익공계의 공포형식을 하고 있는데 출목이 있다. 층량은 대들보 위에 얹혀 있으며 머리에는 용두장식을 하였다. 동편에 서실겸 차실로 사용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 사방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외부에 유리창을 부착하였으며, 누각이나 누하주는 짧다. 대청 방 2칸으로 구성되어 한옥과 일본식의 절충형으로 겹집 평면과 부속 공간이 다양한 형태로 섞여 있다.
은초 정명수 선생의 비봉루는 문화 사랑방이었다.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문화계와 예술계 인사들이 찾아왔고 진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시를 지어 낭송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기도 하며 종합 예술의 장을 만들면서 문인과 예술인들이 차담을 나누며 교류하는 차실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차 모임이 형성되면서 교육자와 예술가 그리고 기업인으로 구성된 ‘진주차례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던 차인 중에 아인 박종한(亞人 朴鐘漢,1925~2012)선생이 있었다. 삼천포에서 태어나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 차 문화 운동의 선구자이며 1954년에 진주시 인사동에 학교법인 ‘하천학원荷泉學園’을 설립하고 1966년엔 대아고등학교를 설립 인가를 받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그는 교육을 위한 새로운 철학을 창안했는데 그것이‘오민교육五民敎育’이었고, 1974년에 『오민교육五民敎育』이란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교장실에 ‘차례실’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차를 마시게 하고 차 예절을 가르쳤다.
아인 박종한선생은 조선 명종(1545~1567), 퇴계 이황의 뒤를 이어 대제학을 지낸 박충원(朴忠元)의 14세손이며, 밀양박씨 연안공파 8세손인 하천(荷泉)공 박병집(朴炳集)의 손자로 1925년 3월 15일(음력)에 태어났다.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 졸업하고 1943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1년간 머물렀는데, 최소해(당시 부산 제 2 상업학교 졸업)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면서 재일동포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그는 최소해에게 반진단 결성을 제의했다.
귀국하여 1943년 8월, 박종한(朴鍾漢, 당시 19세), 최소해(崔小海, 당시 19세)가 주축이 되어 서병도(徐炳道, 당시 19세), 김대성(金大成, 당시 19세) 등에 의해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부산시 대신동 김대성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반진단(般震團)’이라는 항일단체를 결성하였다.(반진단이란, 최남선의 <조선역사>에서 생각을 얻었으며, 그 의미는 돌릴 ‘반(般)’, 발해 ‘진(震)’으로 ‘진으로 돌린다’는 의미 즉,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이라고 하며 광복에 대한 숨은 뜻을 일반인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반진단은 부산이 일제 군수물자의 대륙수송 교두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부산항을 폭파하고 수탈과 핍박을 자행하는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경남 진주 요시노보통학교(진주중안초등학교 현 진주초등학교) 교사였던 박종한과 조선운수주식회사에 근무하던 최인환이 무기 구입을 위한 자금을 대고, 서병도․ 최소해가 무기를 구하는 역할을 하였다. 44년 11월 부산항의 폭파계획을 세우다 조직원 이름이 적힌 연판장이 발각되어,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중 압송되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고 혹독한 고문을 받다, 45년 8.15 광복으로 구사일생으로 출옥하였다.
* 돌릴 ‘반(般)’, 발해 ‘진(震)’으로 ‘진으로 돌린다’는
반진단 (般震團)
본질로 돌아 가야 된다는 의미네.
민족의 정책성이 이상하게 굽어가고 있으나
제대로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역사를 모르면 바른 것 알수 없으니
반민단이 다시 만들어 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