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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자료사진: 가톨릭 신문
국문 초록
한국 천주교회의 고유한 달력인 큰 첨례표는 현재 1865~1866년, 1916~1970년의 것들만 남아 있다. 본 연구는 이들 중 1916~1933년을 한정하여 다룬 연구로 뮈텔 주교가 재임하던 기간이다. 이렇게 기간을 한정한 이유는 이 큰 첨례표들이 한 주교의 관할 아래 발행된 것들이어서 일관성이 있고, 조선 후기와 현대를 연결하는 시점이기에 신앙생활의 변화를 탐구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1916~1933년의 큰 첨례표는 뮈텔 주교의 관할 아래 작성되어 각 지역의 본당을 통해 보급되었다. 큰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제인지를 신자들에게 알려 신앙생활을 돕는 데 있었다. 1896년부터 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의 신자들은 여전히 음력 체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신자들이 은사를 어떻게 얻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은 보편적인 면과 그 시기만의 고유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보편적인 면은 신앙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천주교의 고유한 달력은 성경의 내용과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큰 첨례표에 반영되는 내용도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천주교회가 큰 변화를 겪을 때까지 큰 첨례표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들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이전 시기에 없거나 변화된 내용들이 반영되어 있고, 그 이후와도 구분되는 변화의 양상들이 반영된 고유한 면들도 가지고 있다.
1. 머리말
필자는 뮈텔 주교의 일기를 연구하던 중 그 안에 여러 시간이 중첩되어 있어서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뮈텔이 일기의 날짜를 기록하는 데 기본으로 사용한 양력(그레고리우스력)으로부터 천주교의 교회력,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는 음력, 심지어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는 율리우스력까지 다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1) 그 시간들은 그냥 흘러가는 무엇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는 뮈텔의 일기를 연구하는 데 기반이 되는 요소였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중 옛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였고, 뮈텔 자신이 작성한 바 있는 첨례표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첨례표는 옛 신자들 누구나 사용하던 달력이었으나, 현재 실물로 남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1916~1970년까지의 첨례표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행히 얻어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2) 그 안에는 흔히 알려진 한 장짜리 <첨례표>(이하 ‘큰 첨례표’)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을 위한 라틴어 전례력과 《매일 첨례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을 스캔 작업하고 보존 처리하기 위해 하나씩 넘겨보다 보니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과 종교, 사회적 현상을 한눈에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16~1970년까지 연속으로 남아 있는 큰 첨례표는 일제 강점기, 해방과 6 25 전쟁 기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거치면서 시대에 따른 변화가 일어났다.3) 본 연구에서 다룰 내용은 이 첨례표들 중 가장 앞선 시기인 뮈텔 주교 재임기에 작성된 것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1916~1933년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서 신앙 자유기로 넘어오면서 형성된 신앙생활의 내용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 있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 이 기간에 작성된 큰 첨례표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반적인 내용과 형식이 바뀌기 전까지 한 시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옛 한국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큰 첨례표가 천주교 전례력이 반영된 달력이고 보면 이와 관련된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조현범의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4), 조광의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과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에서처럼 천주교 전례력이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가지는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큰 첨례표가 부분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먼저 진행되었다.5) 이어 큰 첨례표를 직접 대상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2012년 김정숙이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를 통해 간략하지만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기의 첨례표 전체를 일괄하였고,6) 2013년 들어 방상근이 1866년 발행된 큰 첨례표를 주 대상으로 하여 <‘첨례표’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연구 · 발표하였다.7)
필자는 2013년 8월 대전교구 청소년교육회관에서 개최된 제3회 한국교회사연구자 모임에서 <1916-1970년 첨례표 연구>를 습작으로 발표한 바 있다. 그때의 연구는 1916~1970년 사이에 발행된 큰 첨례표 전체의 내용과 흐름을 파악한 것이었는데 이번의 연구는 그날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참조하여 수정 · 보완하고, 연구 대상 시기를 1916~1933년으로 한정하여 진행한다. 남아 있는 큰 첨례표들 가운데 박해 시대 이후 첫 번째의 것들이고, 한 교구장 주교의 책임 아래 발행된 것이어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큰 첨례표는 양력과 음력으로 병기된 주일과 축일의 날짜, 신자들이 지켜야 할 각종 재계와 은사를 얻기 위한 방법과 기호 표시 등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숫자와 기호, 날짜 등은 단순한 나열처럼 보이지만, 신앙생활의 내용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는 한 시대의 신앙 상태와 흐름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의 내용은 물론 당대 한국 교회의 모습도 함께 그려보려 한다.
2. 큰 첨례표의 제반 사항
1) 첨례표의 종류
흔히 ‘첨례표’로 통칭되는 옛날의 전례력은 세 종류가 있다.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성무일력》(Ordo Divini Officii, 聖務日曆)8), 신자들과 성직자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책인 《매일 첨례표》,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한 장짜리 <첨례표>(큰 첨례표)이다.
《성무일력》은 줄여서 ‘Ordo’9)라 불렸는데 전례 전반과 매일의 첨례에 필요한 사항들이 자세히 적힌 소책자로,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들을 위해 라틴어로 제작된 전례력이다. 필자가 실물을 통해 확인한 것은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1943년 《성무일력》과 내포교회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는 1961년의 것이다.10) 전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상하이 대표부에서 발행하였는데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가로 12cm, 세로 18cm, 150쪽 분량으로 1942년 7월 15일 홍콩 대목구장 발토르타(H. Valtorta) 주교의 인준을 받아 발행되었다. 후자는 1960년 10월 1일 홍콩 교구장의 인준을 받아 발행된 것으로 크기는 약간 작아지고 285쪽 분량으로 두꺼워졌으나 전체 구성은 동일하다. 책 제목이 Ordo Divini Officii Recitandi로 바뀌고 발행처는 홍콩 Catholic Truth Society로 되어있다.
《성무일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쪽 번호가 별도로 표기된 전반부에는 전례 지침이 수록되어 있고, 다시 1쪽부터 시작하는 후반부는 매일의 전례에 필요한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11) 매일의 항목들은 양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는데 그 오른쪽에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혼용하여 음력 날짜가 병기되어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 모두 이 전례력을 사용하였다.
1967년부터 《매일 축일표》로 이름이 바뀐 《매일 첨례표》는 《성무일력》의 요약본과 같은 소책자이다. 《매일 첨례표》는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21년 이전부터 있었는데,12)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1935년 것부터 소장되어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발행된 것들은 가로 9.5cm, 세로 14.5cm 내외의 크기로 40여 쪽 분량이다.13) 맨 앞에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범례들이 나와 있고, 이어 양력을 기준으로 매일 전례에 필요한 항목들이 나와 있다. 부록으로 교구별 성직자들의 주소와 천주교회에서 발행된 책들의 목록이 실려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발행된 책들은 요일, 날짜, 숫자가 한자로 표기되었고 첨례를 설명하는 내용은 한글로 되어 있다.14) 해방 후부터 표지에 수록된 연도에만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다가 1960년대 들어 양력의 날짜 기록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였다.15)
큰 첨례표는 낱장으로 되어 있는 한 장짜리 전례력으로 《매일 첨례표》가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구분을 위해 ‘큰 첨례표’라 불렸다.16)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신자들은 흔히 집의 벽에 붙여놓고 사용하거나 접어서 휴대하였다. 큰 첨례표는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마다 날짜별로 전례 관련 사항을 세로글씨로 표기하였다.17) 각 단마다 양력과 음력 날짜를 위 · 아래로 병기하고 그 아래에 주일과 주요 첨례(축일)의 명칭을 써 놓았다.18) 《매일 첨례표》가 매일의 전례 전반과 그날그날의 성경 장절을 표시한 반면 큰 첨례표는 주일과 주요 첨례의 날짜가 언제이고 신자들이 지킬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안내하고 있다. 글자는 한글과 한자만 사용되다가 1954년부터 부분적으로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성무일력》은 뮈텔 역시 사용하고 있었고,19) 첨례표는 사목 방문 중에도 가지고 다녔다.20) 《매일 첨례표》는 그가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기간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그도 사용하였을 것이나 기록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례력은 미사와 성무일도와 같은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업무 수행이나 일상생활 안에서도 요긴하므로 꼭 필요한 것이었다. 뮈텔은 여행 중에도 일기를 썼으므로 그러한 필요성을 더욱 느꼈을 것이다.
2) 발행과 보급
현대에 이르러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에서 총괄하여 한국 교회 전체의 전례력을 발행한다. 하지만 과거의 전례력 발행은 각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직접 관할해야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이런 이유로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어 서울과 대구로 분리됨에 따라 두 교구는 각자의 첨례표를 발행하였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첨례표들은 서울대목구의 것으로 1933년까지는 뮈텔 주교, 1942년까지는 라리보 주교, 1954년까지는 노기남 주교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고, 1955년부터 ‘천주교회 감준’이라는 명칭으로 한국 교회 공통으로 발행되었다.
《뮈텔 주교 일기》에는 교구장이 어떻게 첨례표를 발행하는지 나와 있다. 뮈텔은 8월 중순에서 9월 초순 사이에 이듬해의 첨례표(calendier)를 자신이 직접 편집했다.21) 그가 해외에 나가 부재중일 경우 권한을 위임받은 부주교가 그 일을 대신하였다.22) 이때 교구장은 《성무일력》을 참조하여 자기 교구의 첨례표를 작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23) 파리 외방전교회 상하이 대표부에서 발행되는 《성무일력》이 먼저 출판되어 각 지역 교회로 보급되면 거기에 나와 있는 주일과 축일, 양력과 음력을 대조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 교구에서 지켜야 할 고유한 기념일, 즉 주교좌 성당의 봉헌일과 교구장 주교의 성성일 등을 첨가하면 교구의 고유한 첨례표가 완성된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는 1925년까지는 9월 초순에서 10월 초까지 인쇄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가 1926년부터는 9월 27일, 1930년부터는 10월 12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발행된 큰 첨례표는 11월 초부터 시작되는 가을 판공 이전에 각 지역 본당으로 보급되었다. 큰 첨례표의 맨 좌측 서지 사항 아래에 “賣捌所 各地方 天主堂”이라고 명기하고 있듯이 보급소가 각 본당이었는데 판공 기간 중에 관할 신자들에게 판매되었다. 가격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1935년의 첨례표 가격은 2전(錢)이었다.24) 후대에는 우편 판매도 실행되었는데 뮈텔 주교 재임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25)
3) 구성과 서지
1866년의 첨례표를 보면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은 한 장의 종이에 상 · 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음력으로만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뮈텔 주교 재임기처럼 상 중 하 3단의 첨례표로 형태가 갖추어지고, 양력을 병기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한 해가 1878년이므로 그 사이에는 조선에서 첨례표 인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6)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를 보면 1889년 ‘기축년 첨례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장. 한글. 32×45cm. 유럽식 연도로 시작되고 끝나는 이 달력은 조선의 월별로 구분되어졌다. 이 달력은 천주교의 행사를 조선식 날짜로 알려주고 있다. 이 특별한 표식들은 일을 하지 않는 날들인 대파공, 파공, 야소성심회, 성모성심회, 성의회, 매괴회, 전교회, 미입회(未入會) 등의 날짜들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달력은 수평으로 3부분 나뉘어 있다. 끝에는 우리, 주교, 블랑, 본감목 백준(本監牧白准)에 의해 인가되었다는 설명이 있다.27)
이렇게 상 · 중 · 하 3단의 형태를 갖추고 세로글씨로 인쇄된 첨례표의 형태는 1967년 세로가 길고 가로글씨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첨례표의 구성과 형태는 일정하지만, 크기와 지질은 일정하지 않다. 재질도 한지, 중질지, 미농지(기름종이) 등 다양한 용지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재질이라도 리그린의 함량이 차이가 있는 것도 있으며, 펄프의 조성이 각각 다르다. 연도별로 생산된 종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큰 첨례표의 내용 1 : 주일과 축일
1) 주간과 요일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은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제인지를 주지시키는 데 있다. 1896년 1월 1일부로 양력이 공식적인 날짜 계정으로 사용되었으나, 보편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여 일반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음력 체계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28) 여기에 조선 전래의 생활과는 리듬이 다른 7일 단위의 주일 개념이 천주교 전례에 사용되기 때문에 첨례표가 없으면 때에 맞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 달보다는 작고 하루보다는 긴 단위가 일주간이라면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주간 개념이 존재하였다. 음력의 한 달을 상순, 중순, 하순으로 구분하는 10일 단위의 주간과 5일을 주기로 오는 장날에 적용되던 5일 단위의 주간이 그것이다. 이렇게 주간 개념은 있었으나 주간의 하루하루에 이름을 붙이는 요일의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7일을 주기로 한 서양식 주일 개념과 그것을 세분하여 요일로 구분하는 것은 비신자들은 물론 신자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이 주간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살아간 최초의 인물로 홍유한을 꼽는다. 그는 조선에 유입된 천주교 서적을 통해 7일마다 주일(主日)이 온다는 것을 알고 1770년에 7일, 14일 등 7의 배수가 되는 날을 주일로 삼아 교회의 계율을 실천하였다.29)
홍유한이 양력을 알지 못한 채 음력을 바탕으로 주일을 계산한 것과 달리,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한 이후에는 양력에 기준을 둔 주일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중적인 달력이 보급되지 않았고,30) 더구나 양력 날짜를 쉽게 알 수 없었던 시기에 신자들이 그것에 맞춰 주일과 축일을 지켜나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음력과 양력이 병기되어 있는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에서도 역시 주일의 표시는 중요한 요소였다. 거기에는 한 해의 52(혹은 53) “쥬일”이 빠지지 않고 표시되어 있는데 현대의 전례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큰 첨례표에서 주일을 계산해 나갈 때 기점이 되는 날은 장림 1주일, 삼왕내조(주님 공현 축일), 봉재수일(封齋首日, 재의 수요일),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주일이다. 오늘날 ‘연중 주일’로 불리는 기간은 삼왕내조와 성신 강림을 기준으로 하여 ‘~후 ○주일’로 표시되었는데 명칭은 다르나 기준점은 동일하다.
큰 첨례표를 눈여겨보면 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요일 개념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일마다 ‘쥬일’은 표시되어 있으나,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오는 첨례나 재계를 설명할 때는 ‘영복날’, ‘통고날’, ‘첫첨례六’, ‘첫첨례七’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요일 개념이 희박하던 때에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요일을 인식할 방법을 고민한 듯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를 통해 계산하는 법과 주일을 첫째 날로 따져 숫자로 계산하는 법이었다.
1~7의 숫자로 요일을 세는 방법은 조선 후기 박해 시대 때에도 있었다. 《기해일기》를 보면 정하상 순교자가 자주 ‘첨례 육’을 지켰다는 내용이 나온다.31) 뮈텔이 작성한 첨례표에서 숫자식 요일, 즉 ‘첫첨례六’(첫 금요일)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부터다.32) 매월 첫 금요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에서 나왔는데 《뮈텔 주교 일기》에는 ‘첫 금요일’(1er Vendredi 혹은 Premier vendredi)33)이라고 나온다. 요일 개념에 익숙한 선교사들에게는 그대로 쓸 수 있는 용어였으나 동양의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서 사용되던 숫자식 요일 계산법으로 산정한 ‘첫첨례五’, ‘첫첨례六’, ‘첫첨례七’(첫 토요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첫첨례 오, 육, 칠을 지칭할 때만 사용될 뿐 다른 때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한국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일 계산법은 묵주기도식 방법이었다. 1916년 큰 첨례표부터 ‘통고날’, ‘영복날’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1950년까지 줄곧 사용되었다. 옛날의 묵주기도는 환희(환희의 신비), 통고(고통의 신비), 영복(영광의 신비)이 월-화-수, 목-금-토의 단위로 반복되었다. 따라서 ‘첫 영복날’은 영광의 신비를 처음으로 바치는 요일, 즉 수요일을 뜻하고, ‘둘째 영복날’은 토요일을 뜻한다. 1866년 첨례표에는 이런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을 보아 묵주기도식 요일 계산법은 박해 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요일 표기는 1896년 발행된 시헌력에도 등장하지만,34)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큰 첨례표에서 7요일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43년이다. 1942년과 이듬해의 일러두기를 비교해보면 1943년에 ‘둘째 통고날’(금요일), ‘첫 영복날’(수요일)이라고 부가적으로 요일을 사용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묵주기도식 요일 계산법은 1951년부터는 더 이상 첨례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아가 1967년부터는 아예 첨례표의 중심란에 날짜와 더불어 요일이 병기되기 시작한다.35) 이때부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고, 날짜 표기에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었으며, 첨례표가 ‘축일표’로 이름이 바뀌는 등 현대적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신자들 안에서 현대식 요일 개념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하나의 징표다.
이상에서 살펴본 주일과 요일 개념의 정착 과정은 5일이나 10일 개념의 전통적 시간 단위 안에 7일 단위의 주간과 요일이라는 낯선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큰 첨례표가 신자들에게 왜 필요했는지를 말해준다. 기존의 시간 개념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고, 현대처럼 주간 개념으로 정착된 달력이 없던 시대에 살던 이들에게 큰 첨례표가 없으면 주일과 축일, 각종 재계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2) 축일과 고유 기념일
(1) 부활절 관련 축일
축일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의 핵심인 부활과 성탄 시기의 날짜와 재계를 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인들의 축일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하고 기간이 긴 것은 부활절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 기간은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관련이 있는 봉재 전의 3주일, 성신 강림 후의 몇몇 축일을 포함하면 그 기간이 네 달을 넘기 때문에 첨례표의 축일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 부활 주일은 춘분이 지난 만월 후 첫 일요일이어서 음력으로 계산되므로 해마다 그 날짜가 다르다. 따라서 봉재 기간의 첫날(봉재수일)도 매년 다르기 때문에 봉재 전 3주일(칠순 주일)도 시작 시기가 달랐다.36) 봉재 기간(사순절)이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면 ‘봉재 전 ○주일’은 봉재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에 해당한다.37)
봉재 기간은 지켜야 할 재계들이 가장 많은 때였다. 매주 금요일에는 대재(금식재)를 지켜야 하고,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도 대재를 지켜야 한다고 첨례표에 기록되어 있다. 평일에도 매주 금요일은 소재(금육재)를 지켜야 하므로 봉재 기간 금요일에는 소재도 적용되었으며, 더불어 봉재 기간에는 매주 ‘둘째 영복날’(토요일)에도 소재를 지키라고 첨례표 좌측 하단의 일러두기에 적혀 있다. 그만큼 희생과 극기가 강조되고 있었다.
부활 시기에 이르면, 지금은 부활 주일을 포함하여 8일을 ‘부활 팔일 축제’로 지내는데 첨례표에는 부활 주일 후 월, 화요일을 ‘일이부 첨례’로 지냈다. 한편 첨례표에는 성신 강림 주일 후 월, 화요일에도 ‘일이부 첨례’38)를 거행하도록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전례력에는 없는 축일이다. 이것을 보면 과거에는 부활 주일과 성신 강림 주일을 같은 비중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연중 시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표현할 때 ‘강림 후 ○주일’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성신 강림을 그만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반증이다.
현대와 비교해볼 때 예수 승천 첨례와 성체 첨례(성체 거동 포함)에 대한 비중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첨례표에는 승천 첨례 전에 ‘삼천기도’를 하라고 되어 있다. 삼천(三天)은 삼일(三日)을 뜻하는 중국식 표현으로 ‘삼일기도’를 말하는데 승천 첨례(당시에는 목요일) 이전 월, 화, 수요일에 거행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성체 첨례의 경우 성체 거동과 짝을 이루는데 첨례표에는 주일에 성체 거동을 거행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성체 거동을 사정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의무 축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지역별로 한 본당을 정하여 거행되는 성체 거동에는 주변 본당 신자들이 함께 동참하여 큰 축제를 이루었다. 뮈텔 주교 재임기인 1903년 처음으로 성체 첨례와 더불어 거행된 성체 거동은 그의 재임기는 물론 이후에도 지속되었다.39) 이전에는 파공 축일이었던 성체 첨례가 1902년부터 파공이 아닌 축일로 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에서는 매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40)
(2) 성탄절 관련 축일
양력 12월 25일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성탄절 관련 축일은 부활절에 비해 기간이 짧다.
큰 첨례표에 나오는 성탄 관련 축일은 큰 틀에서는 오늘날과 큰 차이가 없다. 1월 1일과 2일의 ‘예수 할손례’와 ‘찬송 예수 성명’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통합되고, 1921년 이전에는 없던 ‘성가 첨례’가 ‘성가정 축일’이라는 이름으로 날짜를 변경하여 기념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성탄 때부터 기념되는 ‘성탄 팔일 축제’가 큰 첨례표에는 없는데 이는 “성교회 원첨례표에는 일이부뿐 아니라 팔부첨례이나, 교우들이 쓰는 첨례표에 일이부를 두지 않음은 성탄 후 연3일에 다른 큰 첨례가 있기 때문이다”41)라는 《경향잡지》의 기사에서 보듯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3) 보편 교회의 축일
연례 축일은 특정한 성인과 천사, 중요한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는 고정된 기념일이다. 축일은 보편 교회 전체가 공통으로 기념하는 날이 있고, 각 지역 교회 안에서 한정적으로 기억하는 고유의 축일이 있다. 큰 첨례표에 나타나는 보편 교회의 축일과 현대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큰 첨례표와 현재의 전례력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축일은 명칭이 현대식으로 바뀌거나 그 날짜가 변경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마리아 관련 축일로 명칭이 바뀌거나 축소 혹은 폐지되었다. 성모취결례(2월 2일)는 주님 봉헌 축일로, 성모 영보(3월 25일)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성모 성의(7월 16일), 성모 설지전(8월 5일), 성모 입속로회(9월 24일)42) 축일은 폐지되었다.
폐지된 또 하나의 축일은 5월 3일의 심획십자성가(尋獲十字聖架)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를 땅속에서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축일은 그 십자가 조각을 의미하는 보목(寶木)과 연결되는데 그것을 공경하는 신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이 소팔가자에서 쓴 편지에 보목을 보내주기를 청하는 내용이 있고,43) 1921년 뮈텔이 홍콩 방문 중 성 금요일에 보목을 공경하는 의식을 거행한 기록이 있다.44) 지금도 국내의 몇몇 곳에는 보목으로 알려진 유물들이 있으나 보목을 공경하는 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45)
보편 교회의 축일은 실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인식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옛 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세자 요한 첨례 때면 장마가 온다”, “베드로 바오로 첨례 때는 늦은 모를 심기에 적당하다”, “몽소승천 때에 김장 배추 씨를 심는다”는 등의 표현은 신앙심의 표출을 넘어 현실적 절기 인식의 방법이었다. 특히 6월 29일 ‘베드로 · 바오로 첨례’를 전후한 시기는 모내기를 할 수 있는 가장 늦은 절기로, 이때 모를 심지 못하면 한 해의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비신자들도 신자들에게 그 첨례가 언제 오느냐를 묻곤 하였다고 한다.46)
농사에 필요한 절기들은 태양력으로 계산이 되기 마련인데 음력을 기준으로 생활을 하는 대중들에게 그것을 헤아려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때문에 해의 길이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식물이 자라나는 현상들을 보아 농사의 때를 짐작하곤 하였는데 양력으로 고정되어 있는 축일들은 절기 인식에 유용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매년 발행되는 큰 첨례표에 축일의 날짜와 그에 해당하는 음력 날짜가 표기되므로 큰 첨례표는 실생활 안에서도 유용했던 달력이었다.
(4) 지역 교회의 축일
첨례표에는 한국 교회에서 고유하게 지키는 축일들이 표시되는데 뮈텔이 작성한 첨례표에는 4개의 고유 첨례가 있었다.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첨례날에 봉헌식을 가진 명동 주교좌 성당은 축성 기념일을 그 첨례날로 정해야 했으나, 뮈텔이 주교의 직권으로 저성 첨례(11월 1일) 팔부 축일이 끝나는 다음 주일로 정하였다. 성신 강림이 대축일이어서 축성 첨례를 위한 고유 기도를 성무일도에 넣을 수 없어서 매년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과 이 때문에 프랑스의 동료 선교사들과 성무일도와 축일을 함께 기념할 수 없기 때문에 정교조약에 따라 프랑스 내의 성당들이 공동으로 축일을 지내는 날을 택하여 정하였다.47) 뮈텔은 교구장으로서 선포한 규정에 따라 그 이듬해부터 1914년까지 매년 11월에 성당 축성 첨례를 기념하였다.48) 하지만 1915년부터 봉헌식이 거행된 5월 29일을 축일로 정하고 기념하기 시작하였다.49) 결국 프랑스 교회와 그곳의 동료들에 중점을 두어 축성 축일을 지내던 것을 한국 교회 내에서 의미가 있는 날로 택하게 된 것이다.
9월 21일 ‘본 감목 승품일’은 뮈텔이 주교로 성성된 날을 기념하는데 주교 성성일의 표시에 있어 부교구장 주교의 경우는 제외되었다. 1921년과 1927년 5월 1일에 각각 서품된 드브레 주교와 라리보 주교의 성성일은 첨례표에 표시되지 않았다.50) 뮈텔은 부주교가 임명된 후 대부분의 일을 위임하였는데 교구장으로서 꼭 담당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였다. 특히 사제 양성에 관련된 일, 예를 들어 신학생들의 시험을 직접 주관하거나 서품식을 거행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위임하지 않았다. 첨례표에 표시된 교구장 주교만의 승품 기념일은 그 교구의 최고 장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9월 26일 ‘조선 치명 복자 79위 첨례’는 1927년부터 기념하였다. 뮈텔 주교는 자신이 신부일 때부터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5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축일로 제정되어 1927년 9월 26일에 처음 거행되는 이 첨례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기에 최대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51) 순교 복자들의 여러 그림을 걸어 장식하고 용산의 신학생들이 전원 참석하는 가운데 특별 강론, 성체 강복, 유해 친구로 이어졌고, 샤를르 구노가 한국 교회 순교자들을 기리며 작곡한 <순교자 찬가>52)를 제창하였다. 뮈텔은 1926년부터 이 노래를 명동 고아원의 성가대 아이들과 용산 신학생들에게 연습을 시켜 즐겨 부르게 했고, 이후 순교 복자 축일에는 빠짐없이 부르게 했다.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첨례는 보편 교회의 축일이며 동시에 한국 교회의 주보성인 축일이었다. 파공을 지킬 축일은 아니지만, 용산 신학생들을 명동 주교좌 성당으로 다 오게 하고 주교 대례 미사로 거행하며 축일을 지냈다.
4. 큰 첨례표의 내용 2 : 일러두기와 각종 규정
1) 일러두기의 내용
큰 첨례표에서 주일과 축일의 표시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이 신앙생활을 위해 신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과 그에 따른 은사를 표시해 주는 것이다. 별도의 일러두기와 기호를 통해 큰 첨례표 전반에 걸쳐 관련 내용들이 표시되어 있다.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첨례표의 맨 아랫단 좌측에는 일러두기난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신자들이 지켜야 할 중요 내용들이 적혀 있다. 1916~1933년 큰 첨례표는 발행되는 해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으나 큰 틀은 계속 유지되는데 대사 관련 규정, 파공과 대송, 사순절과 대림절의 재계, 단식재와 금육재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전 시기와의 변화를 비교하기 위해 현존하는 첨례표 중 서로 가장 가까운 시기인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를 비교해보면 위와 같다. 두 큰 첨례표는 서술과 순서상의 다름은 있으나, 전체 내용은 비슷한데 그 가운데에서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1866년 큰 첨례표에는 모내기 철에 오는 성체 첨례, 세자 요한 첨례, 베드로 · 바오로 첨례 세 날에 주어진 파공 관면이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뮈텔 주교 일기》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성체자들이 많았다. 교우들은 첨례표에 따라 오늘 성 요한 세자 첨례를 지킨다. 파공 첨례는 아닌데 그런 사실을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공연히 그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뮈텔 주교 일기》 1912년 6월 24일).
위의 기록들을 참조할 때 1866년에 이미 주어진 성체 첨례, 요한 세자 첨례, 베드로 · 바오로 첨례의 파공 관면 규정이 박해 시대 이후에는 한 동안 적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912년 6월 이전에 파공 첨례가 아닌 것으로 다시 규정이 바뀌었고 1913년부터는 큰 첨례표에 그 바뀐 내용이 적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1916년 큰 첨례표에는 세 첨례 날에 △표, 즉 파공이 아닌 첨례로 표시되어 있어 바뀐 규정이 반영되어 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1916년에 이르러 파공 규정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1866년의 일러두기에는 파공 관면이 있는 첨례라 하더라도 주일인 경우에는 관면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1916년에 이르면 주일 오후부터는 관면이 적용된다고 되어 있다.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다른 부분들도 비교해보면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첫째, 1866년에는 주일 외의 다른 요일 표기가 없다. 1916년 큰 첨례표에는 이 시기부터 고유하게 나타나는 묵주기도식 요일 표기가 있고, 1921년부터는 ‘첫첨례 육’과 같은 숫자식 요일 표기도 등장하는데 1866년에는 그런 요소들이 없다. 둘째, 1866년에는 없던 ‘성체 거동’ 표시, 지역 교회의 고유한 축일 표시, 성 요셉 축일의 ‘동국대주보’라는 표시 등이 1916년에는 나타난다. 이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가시적인 변화이다. 성체 거동의 경우 1903년 6월 용산 신학교에서 처음 거행되었는데 이것은 박해 시대에는 거행될 수 없는 축일이었다.53)
2) 대사 관련 규정
죄에 따른 벌, 즉 잠벌을 면하기 위한 보속을 대신할 수 있는 대사(大赦)를 얻는 것을 옛 신자들은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교회에서 규정한 기도나 선행 등을 합당한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인데 큰 첨례표에서 제시하는 첫 방법은 표시(보람)54)가 있는 첨례에 참례하는 것이었다. 그 첨례들은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성모 승천의 4대 대축일이다.
은사회에 가입한 사람은 그 회의 표시가 있는 날에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대로 기도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표시(보람)와 은사회는 ♡ - 예수성심회, ♥ - 성모성심회, □ - 성의회 보람, ⧾ - 매괴회, ❇ - 전교회, ㊉ - 성가회(혹은 ⏅) 등이 있었다. 은사회(恩赦會)는 이름 그대로 은사를 얻기를 바라면서 자유로이 가입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가입할 의무는 없었지만 아무나 가입할 수도 없다고 규정하였다.55)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었고, 단지 은사만 얻을 목적으로 가입하여 좋지 않은 표양을 보이는 것을 경계하였다. 큰 첨례표의 은사회 표시는 1967년 ‘축일표’로 이름이 바뀌고 가로쓰기 양식의 새로운 첨례표가 발행된 이듬해인 1968년부터 없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사 교리가 약화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3) 파공과 대송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파공과 대송 규정이다. 주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육체노동을 삼가는 파공(罷工) 규정은 ◎ - 대파공 축일, ○ - 파공 축일, △ - 파공 아닌 축일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파공 축일(◎)은 어떤 이유에서건 일체의 육체노동을 금하는 날로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성모 승천의 4대 대축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공 축일(○)은 모든 주일과 예수 승천 축일,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 축일, 모든 성인의 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날은 부득이한 경우 오후에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데 오전에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하고 본당 신부로부터 관면을 얻거나, 성사 때 미리 관면을 얻은 경우에만 허락되었다. 집안사람의 경우 가장이 대표로 관면을 받았고, 공소의 경우 신자들을 대신하여 회장이 관면 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관면을 받거나, 아예 판공 때 본당 신부가 1년 동안 관면 받을 사람들에게 손을 들라고 하여 그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고 한다.56) 파공 아닌 축일(△)은 주일이 아닌 일반적인 축일로 파공의 의무는 없으나, 경건하게 지내도록 권고하였다.
대송 규정은 대파공과 파공 축일에 부득이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하지 못하는 경우 교회가 규정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대신함과 동시에 파공의 의무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대송은 기도서에 있는 주일경과 축일 기도문을 찾아서 바쳐야 하는데, 글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 십자가의 길을 바치거나 주님의 기도 33번씩 두 번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57)
4) 혼인 제한, 단식재, 금육재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사순절은 금욕이 강조되는 기간이므로 지켜야 할 재계가 많은 기간이다. 두 기간에 공통으로 지킬 규정은 화려함과 기쁨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혼인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림절에는 시작하는 첫날(장림 제1주일)부터 삼왕내조 축일(1월 6일)까지, 사순절에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제2주일(사백주일)까지 교회 내 혼인이 허락되지 않았다.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관련 내용을 보면, 1866년에는 “장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는 혼인의 음식과 의복의 화려히 하는 이를 엄금하노라”라고 되어 있고, 1916년에는 “장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 혼인의 즐거운 잔치 화려함을 성교회에서 엄금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두 내용을 보면 대림과 사순 시기에 혼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의복과 음식을 피하라’는 의미로 해석되나 실제 적용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선 본당에서는 이 시기에 혼인 미사를 거행하지 않곤 한다.
단식재(대재)의 규정은 일러두기난이 아니라 주일과 축일이 적힌 난에 “대재”라고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단식재를 지킬 날은 사순 시기의 매주 금요일과 예수 성탄 전야 때였다. 교회법에서 정하는 단식재는 본래 사순 시기 주일 외의 모든 날, 사계 때와 성령 강림 전날과 성모 승천 전날, 모든 성인의 날 전날과 예수 성탄 전야 때였으나 조선 교회에서는 교황의 관면으로 간소화되었다.58)
금육재(소재)의 규정은 복잡하고, 큰 첨례표에 나와 있지 않은 평일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주의사항란에 별도로 그 규정을 적어 놓았다.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 의하면 사순절에는 본래 모든 날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나, 교황의 배려로 조선 신자들은 “봉재 안의 주일날과 각 주일의 첨례 이와 삼과 오에 소재 관면”을 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와 삼과 오”는 주일부터 따져 둘째, 셋째, 다섯째 되는 날을 말하므로 월, 화, 목요일을 말한다. 다만 성 목요일에는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위의 표는 금육재 규정들을 정리한 것인데 매주 금요일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지켜야 하고, 사순절과 사계(四季) 때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사계는 춘계(봉재 후 1주간), 하계(성신 강림 주간), 추계(성가 광영 주간), 동계(장림 3주간)를 말한다. 이 규정은 1917년 세계 교회의 규정이 완화됨에 따라 사순절 매주 수요일의 금육재 규정은 없어졌다.59)
이 밖에도 큰 첨례표에는 성 요셉 성월(3월), 성모 성월(5월), 예수 성심 성월(6월), 복자 성월(9월), 매괴 성월(10월)의 첫날에는 ‘초일’, 마지막 날에는 ‘종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음력에 익숙한 신자들에게 양력으로 계정되는 성월이 언제 시작되고 마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또한 매월 초에는 요일 개념이 희박한 신자들을 위해 첫첨례 오(첫 목요일), 첫첨례 육(첫 금요일), 첫첨례 칠(첫 토요일)을 표기해 줌으로써 신심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5. 맺음말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사용된 첨례표는 세 종류로 성직자들이 사용하던 《성무일력》, 신자들과 함께 사용하던 《매일 첨례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첨례표>(큰 첨례표)가 있었다. 이제까지 다룬 내용은 현존하는 큰 첨례표 중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하여 보급한 1916~1933년까지를 대상으로 한 연구였다.
이 시기의 큰 첨례표는 각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직접 작성하여 관할 본당을 통해 보급하였다. 뮈텔의 경우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한 《성무일력》을 참조하여 서울대목구의 큰 첨례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매년 9월 초순을 전후하여 완성한 것을 10월 중순에 인쇄하였다. 이 큰 첨례표들은 상 · 중 ·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아랫단 하단에 일러두기난을 두었으며, 음력과 양력을 혼용하여 세로글씨로 인쇄되었다. 그 이전 1866년의 큰 첨례표가 상 하 2단에 음력으로만 표기된 것과 비교할 때 형식상 다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 구성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제인지를 신자들에게 알려 전례 생활을 돕는 데 있다. 1896년부터 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의 신자들은 여전히 음력 체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례력은 조선에서 사용된 바 없는 양력 7일의 주간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첨례표 없이 때를 맞춰 전례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큰 첨례표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사항은 신자들이 어떻게 재계를 지키고 은사를 어떻게 얻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맨 아랫단 하단에 별도로 표기된 일러두기에는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파공과 대송 규정, 단식과 금육 규정, 사순절과 대림절에 지켜야 할 내용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례 참석에 따라 얻는 대사 규정과 은사회(신심 단체)에 참여하여 얻는 대사 규정을 알림과 동시에 관련 축일의 하단에 별도로 표시도 해두었다. 이러한 모습은 전례와 성사의 준행과 그에 따른 은사에 집중되어 있는 당시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은 변하지 않은 보편적인 면과 그 시기만의 고유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보편적인 면은 신앙과 신심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천주교 전례력은 성경의 내용과 교리, 그에 따른 신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이와 관련된 사항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큰 첨례표에 반영되는 내용도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천주교회가 큰 변화를 겪을 때까지 뮈텔 재임기를 포함한 전후 시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들은 고유한 면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1866년 큰 첨례표와의 비교에서 보았듯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전 시기에 없거나 변화된 내용들이 반영되었고, 뮈텔 재임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시기 이후에도 변화의 양상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큰 첨례표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본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지는 못하였지만 이는 그 시대를 거치며 변화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살피는데 요긴하므로 심층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1916년부터 1970년까지의 큰 첨례표를 차례로 넘겨봤을 때 시대의 변화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단순화된 가시성은 큰 첨례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당대에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들을 그 시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단순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한 시대의 상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1916~1970년 큰 첨례표의 경우 매년의 사항들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일제 강점기, 해방과 6 25 전쟁기, 현대에 이르도록 연속으로 남아 있는 흔치 않은 자료여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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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는 1917년 혁명이 있기 전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였다.
2) 필자는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와 이영춘 신부의 도움으로 이 첨례표들을 빌려 스캔 작업을 하여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료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오숙영 수녀가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한 자료라고 한다. 귀중한 자료를 보존하고 공개해 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3) 1916~1939년 기간에는 큰 변동이 없다가 일제가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린 이후인 1940~1945년에는 ‘황국신민의 서사’와 ‘국가축제일’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기념일이 강제되어 큰 첨례표에 실린다. 1945~1953년은 해방과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인쇄용지의 질이 크게 저하되고 내용도 일부분 간소화되었으며, 전쟁 후인 1954~1966년 기간에는 1939년 이전처럼 회복세를 보이면서 1961년부터 칼라 인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이후 발행된 1967~1970년의 큰 첨례표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보이는데 ‘첨례표’라는 이름이 ‘축일표’로 바뀌고, 공의회 이후 대사 교리가 약화되면서 1968년부터는 은사회 표시가 없어지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4)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9.
5) 조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 - - -,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6)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 대구대교구, 2012년 12월호.
7) 방상근, <‘첨례표’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신앙의 해’ 기념 심포지엄 -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8) 이 책의 원제목은 Ordo Divini Officii로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을 위한 소책자여서 한국어로 번역된 바 없어 여기서는 편의상 《聖務日曆》으로 번역하였다. 1915년 《경향잡지》 기사에 “성교회 원첨례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라틴어 첨례표를 지칭하는 듯하다(《경향잡지》 329호, 305쪽).
9) 1909년 8월 라리보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문서번호 1909-131).
10) 내포교회사연구소의 《성무일력》은 1998년 선종한 유인성 신부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11) 1943년 《성무일력》의 경우 앞부분은 로마 숫자로 되어 있고, 뒷부분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였다.
12) “…천주 대전에 공로를 더 세우리로다. 큰첨례표와 매일 첨례표에 다 자세히 설명하고 가르쳤으니…”(《경향잡지》 479호, 1921년 10월, 436쪽). 중국과 그 인근 지역 모두에 대소재 관면 규정을 적용한다는 내용 중에 ‘매일 첨례표’에 대한 언급이 있다.
13) 이와 같은 크기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매일 첨례표》는 1935, 1936, 1937, 1941, 1944, 연도 미상 1권, 1947, 1949, 1950, 1957, 1955년 판이다. 함께 소장되어 있는 1959년과 1962년 책은 가로 11cm, 세로 16.5cm로 30쪽 내외의 분량이다.
14) 1941년 《매일 첨례표》에만 예외적으로 양력의 날짜들이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되었다.
15)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한 책 중에는 1962년 《매일 첨례표》부터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었으며, 책을 보는 방식도 현대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기존의 검은색이 아닌 녹색으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쓰기 방식은 여전히 세로쓰기를 유지하였다.
16)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58쪽.
17) 1866년 이전에 발행된 첨례표들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음력으로만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18) 큰 첨례표는 가로, 세로 모두 3단으로 나뉘어 총 9면이 되도록 접힌 흔적이 있는데 판매할 때부터 그랬는지, 보관 과정에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19) 1909년 8월 라리보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문서번호 1909-131).
20) “혼배 보례 6건. 견진자 4명, 노자 성체 1명. 길들은 강당에서부터 이 환자의 방까지 거적 또는 짚거적이 깔려 있었다. 40명의 고해자 중 병자 2명은 자기 집에서 고해를 했다. 첨례표를 잊고 왔기 때문에 그것을 보내 달라고 서울에 편지를 썼다”(《뮈텔 주교 일기》 1918년 12월 4일). 이 부분의 원문을 보면 “les calendiers”(첨례표들)이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하는데 두 종류 이상의 첨례표를 가리키는 듯하다.
21) “첨례표를 편집했다. 두세 신부가 점심 식사에 왔다”(《뮈텔 주교 일기》 1907년 9월 3일) ; “계속 더운 날씨이다. 1915년 첨례표를 편집했다”(《뮈텔 주교 일기》 1914년 8월 19일) ; 오늘 아침에 미사 참례자들이 매우 많았다. (음력) 18일이어야 하는데도 17일을 5월 1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가 첨례표에 잘못 기록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뮈텔 주교 일기》 1915년 4월 30일).
22) “나의 부재중 첨례표를 작성한 두세 신부는 주로 유럽인들과 일본인 교우들 때문에라도 오늘 소재를 관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연하다”(《뮈텔 주교 일기》 1909년 1월 1일).
23) 《성무일력》과 더불어 중국에서 먼저 발행되었을 중국 교회의 큰 첨례표를 참조하여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천기도’ 등 중국식 용어들을 한국의 큰 첨례표에 그대로 사용한 것도 그 영향으로 생각된다.
24) 1935년 《매일 첨례표》, 39쪽. 당시 《천주교 요리문답》은 12전이었다(같은 책, 32쪽).
25) “첨례표(내 1954년) 값 5환. 송료 1장 7환, 송료 1백장 55환, 송료 2배장 백환”(《경향잡지》 1027호, 1953년 10월 1일, 81쪽) ; “《매일 첨례표》는 발행 후 얼마 안 되어 절판되었으므로 주문에 응하지 못함을 양해시라. 미구에 《예수의 일생 화첩》이 나올 것이다. 작년 가을에 나간 《성모의 일생 화첩》과 같이 오 주 예수의 일생을 191 상본으로 표시하면서 간단한 설명을 붙인 것이다”(《경향잡지》 1043호, 1955년 2월 1일, 94쪽).
26) 방상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첨례표를 작성하여 사용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2013년 8월 17일 한국교회사연구자 모임에서 김정환의 <1916-1970년 첨례표 연구> 발표 후 토론에서 밝힘).
27) 모리스 쿠랑, 이희재 역, 《한국서지》, 일조각, 1997, 699쪽.
28) “내일부터 시행될 새로운 연호를 알리는 또 다른 포고령도 실리다. 조선 왕조 개국 505년은 유럽의 달력 혹은 태양력(太陽曆)이 처음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태양을 세움, 즉 建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연호는 왕의 치세 각각에 대해서 단 한 번만 사용될 예정이다”(《뮈텔 주교 일기》 1895년 12월 31일).
29)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54~55쪽.
30) 조선 후기에 시헌력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기는 하였으나, 일반 서민들을 위한 달력의 형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큰 첨례표의 경우 순 한글로 되어 있고, 구매하여 쉽게 볼 수 있는 달력이어서 대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31) 하성래 감수,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97, 77쪽.
32) 1921년 큰 첨례표.
33) 《뮈텔 주교 일기》 1905년 6월 2일 ; 1923년 2월 2일.
34) 이창익,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창비, 2013, 89~90쪽.
35) 1967년 축일표.
36) 흔히 봉재 전 3주일은 ‘칠순 주일’, 봉재 전 2주일은 ‘육순 주일’이라 불렀다.
37) 조선 후기 박해를 받을 때의 순교자나 성덕을 갖춘 인물들의 전기를 보면 덕행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로 봉재 기간에 얼마나 극기를 실천하였는지를 제시하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이런 전통은 박해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일부 교구에서는 사순절 교서를 별도로 발표하여 극기와 보속의 기간을 보내도록 교구장이 독려한 것을 보면 현재 정기적으로 교서가 발표되는 부활절과 성탄절에 못지않은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김정환,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이해>, 《교우들에게 :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대전교구사연구소, 2007, 432~437쪽).
38) 부활과 성령 강림 후의 ‘일이부’ 첨례는 본래 8부(octave)인데 한국 교회의 사정을 고려하여 일이부로 간소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 이후의 첨례표에는 ‘일이부’로 표시되어 있으나 본래는 ‘팔일이부’라는 표현이었다(1866년 첨례표 참조). 《뮈텔 주교 일기》에도 성령 강림 후에 ‘8부’(octave)가 온다고 적혀 있으나 첨례표에는 ‘일이부’로 기록한 것도 그 증거라 할 수 있다(《뮈텔 주교 일기》 1898년 5월 28일 참조). 이 일기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저성 첨례 후에도 본래는 8부 축일(octave de la Toussaint)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발행된 첨례표에는 그 기록이 전혀 없다.
39) “성체 첨례. 용산에서는 대첨례이다. 9시 30분에 주교 대례 미사. 이어 신학교 구내에서 성체 거동이 있었다. 아침에는 비가 올 듯한 날씨였으나 미사 중에 개기 시작해서, 성체 거동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에서 거행된 최초의 성체 첨례날의 성체 거동인 것이다. 서울과 제물포의 신부 전원, 그리고 선박의 지도 신부가 참석했다”(《뮈텔 주교 일기》 1903년 6월 11일).
40) “나는 9시 반 미사를 드리고 나서, 폐지된 파공 첨례인 아름다운 성체 첨례가 완전히 간과되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성체를 내모셨다”(《뮈텔 주교 일기》 1902년 6월 1일).
41) 《경향잡지》 329호, 305쪽.
42) 성모 입속로회 : 13세기에 세워진 자비 수도회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자비의 성모 축일’(9월 24일)을 의미하는 듯하며 1696년부터 전례력에 삽입되었다(<마리아 축일>, 《한국가톨릭대사전》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411~2415쪽).
43) “존경하올 신부님, 만일 가능하시다면 성경과 영신수련을 위한 매일 묵상책과 보목, 상본, 특히 성모님의 무염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 그리고 깃털 펜을 깎는 칼도 함께 보내주시기를 청합니다”(《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68쪽).
44) “예수 수난. 의식이 9시에 나자렛에서 노래로 거행되었다. 오후 3시에 베다니아에서 성로 신공이 있었고, 6시 15분에는 보목(寶木) 경배가 있었다”(《뮈텔 주교 일기》 1921년 3월 25일).
45) 대전교구 합덕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에 보목이 보존되어 있다.
46)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의 증언.
47) “성당 축성 준비를 위해 대재를 지켰다. 성석(聖石)에 넣을 성유골과 증서(證書)를 준비했다. 성유골은 제농성인의 동료 순교자들의 것으로 그 유해는 로마 성밖 성 바오로 대성전 구역, 스칼라 캘리(Scala Caeli) 성당에 모셔져 있다. 저녁 6시 반, 순교자들 무덤의 문 앞 지하 성당에 모신 성유골 앞에서 부활 시기의 순교자들을 위한 조과(朝課)와 찬과(讚課)를 바쳤다. 나는 거기에 모인 공동체 앞에서 성당을 축성하는 주교에게 축성일이 아닌 다른 날에 축성 첨례를 정할 수 있는 주교 의식서의 규정에 의거하여 이렇게 선언했다. ‘가능한 한 파리 신학교의 우리 동료들과 성무일도와 축일을 함께 지내고, 또 성신 강림 대첨례와 그 8부(八部) 때문에 성당 축성 축일의 성무일도를 이 기간에 넣을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오는 성당 축성 첨례의 8부를 위해 매년 특별한 첨례표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저성 첨례 8부 다음 주일로, 즉 정교조약(政敎條約)에 의해 프랑스의 교회들이 그들의 성당 축성 축일을 지내는 날을, 서울의 성모무염시태 (준)대성당의 축성 기념일로 정한다’고 했다”(《뮈텔 주교 일기》 1898년 5월 28일).
48) 《뮈텔 주교 일기》 1899년 11월 12일 ; 1914년 11월 15일.
49) 《뮈텔 주교 일기》 1915년 5월 30일 ; 1916년 5월 29일 ; 1916년 첨례표.
50) 뮈텔 주교의 사망으로 라리보 주교가 서울대목구장을 승계한 이후에는 그의 성성일이 표시되었다.
51) “우리 복자 첨례. 아침 미사에서 영성체자들이 많았다. 10시에 주교석에서 나의 참례와 더불어 보좌 주교석에서 라리보 주교의 주교 대례 창미사. 용산에서 전원 참석. 주교의 성대한 입장. 복자 성화들이 전시되었는데, 79위 복자 찬양 그림은 대성당의 정면에, 다른 두 그림, 복녀 김 골롬바의 순교, 복자 유 베드로의 형벌 그림은 좌우의 두 제대 앞에 전시했다. 참례자들, 특히 여자들이 많았다. 두 학교의 참례 덕분에 대성당이 가득 차 보였다. 그저께 저녁에 돌아온 사우어 주교가 우리와 같이 점심 식사를 하러 왔다. 6시에 용산의 김 요셉(金善永) 신부에 의한 복자 찬양 연설, 이어 유해 친구, 끝으로 내가 주재한 장엄한 성체 강복. 유해를 친구하는 동안 특별석에서 조선말로 번역된 <순교자 찬가>를 불렀고, 모든 어린이들이 일제히 후렴을 되풀이했다.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파이프오르간은 후렴 반주를 하고 또 성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크게 연주했다”(《뮈텔 주교 일기》 1927년 9월 26일).
52) 지금은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로 되어 있다.
53) 《뮈텔 주교 일기》 1903년 6월 11일.
54) 보람 :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다른 물건과 구별하기 위하여 해두는 표적을 뜻하는 옛말.
55) 르 장드르, 이영춘 역주, 《회장직분》, 가톨릭출판사, 1999, 202~204쪽.
56)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의 증언.
57) 르 장드르, 《회장직분》, 67쪽.
58) 르 장드르, 《회장직분》, 77~78쪽.
59) 《경향잡지》 제387호(1917년 12월), 529~530쪽.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