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2일 차 / 금오름, 협제바다, 군산 오름
아침에 일어나서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잡혀있습니다.
“자기야! 나 몸 상태가 영 별로인데…….”
아내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그래? 그럼 산행 말고 오름 투어나 할까?”
여행을 떠나서는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합니다. 쿨하게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솔선수범 하는 게 서로 좋습니다. ‘기분 좋게 떠난 여행은 끝날 때까지 기분 좋게 마무리 짓자!’ 가 내 생각입니다.
숙소에서 너구리라면에 밥을 말아먹습니다. 편의점 김치와 소시지, 마른 김이 반찬의 전부입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집에서 가져온 것은 쌀밖에 없었거든요.
아침 일찍 찾은 곳은 가수 이효리가 뮤직 비디오를 찍었던 금오름입니다. 차량 진입을 불허한다는 안내판을 보고 우리는 걸어서 오릅니다. 입구에 생이못이 있습니다. 생이못이란 새들이 물을 먹는 작은 연못이란 뜻입니다. 물은 말라있습니다. 오름을 향하는 길은 아기자기 합니다. 길 밖으로 덤불이 무성합니다. 곶자왈입니다. ‘자왈’은 덤불이란 뜻입니다. 30여분을 오르자 드디어 시원스레 오름이 펼쳐집니다. 중간에 커다란 분화구가 있고 둘레길이 이어져있습니다. 억새와 작은 풀만 있고 큰 나무가 없어서 멀리 바다까지 보입니다. 가슴이 뻥 뚫립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제주도의 들판과 비닐하우스, 목장과 다른 오름이 아스라이 펼쳐집니다. 멀리 한라산이 흰 눈을 이고 있습니다. 구름은 오밀조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을 했다가 지웁니다. 지운 자리 다시 다른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상상력보다 구름의 상상력이 한 수 위입니다.
어쩐 일일까요? 오늘 오름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마른 초지만 펼쳐있고 오름을 뛰는 학생들의 거친 호흡소리만 들립니다. 수십 명의 중학생들이 단체로 구보를 하는데 그들의 뜀박질 소리가 잠잠하던 금오름을 살아숨쉬게 합니다. 예전 어느 전쟁 때 수백 명의 군인들이 발맞춰 다리를 건너는데 수백 명이 대 딛는 발박자에 진동이 곱해져 결국 다리가 진동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갑자기 겁이 덜컹 납니다. 저들의 뜀박질 진동에 괴물이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아직도 내 마음은 어린아이인가 봅니다.
‘금오름이 기대보다 별로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촬영장비가 올라올 수 있는 찻길이 있어서 금오름에서 뮤직 비디오를 찍었나 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 바다는 언제 봐요?”
“지금 가자.”
우리는 협제 해변으로 달립니다.
초록빛 바닷물과 썰물, 비양도와 흐린 하늘, 바다위로 드러난 작은 개펄까지 앙상블을 이루어 언제 보아도 협제 바다는 가슴을 쿵쿵 울립니다.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며 마른감성에 휴식이라는 선물을 한 아름 담습니다. 물이 들어오면서 해변을 에워싸고 물이 차오릅니다. 백사장의 모래가 날려 해마다 모래의 양이 줄어들자 백사장 위에 천막을 덮어놓는데 그조차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이번엔 곶자왈 환상 숲에 갑니다. 제주도판 밀림지대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곶자왈은 길이 아니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가시덤불과 숲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생명수가 이 숲의 땅속으로 스며든다고 합니다. 코스가 짧아서 잠깐 보고 나옵니다. 곶자왈 트레킹을 제대로 하려면 이곳 보다 교래자연 휴양림이 코스가 길고 산행을 제대로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우리는 이어서 까멜리아힐에 갑니다. 동백 숲이죠.
겨울엔 특별히 볼 곳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드는 듯싶습니다. 제주 관광객은 모두 이곳에 집결시켰나 싶을 정도로 차도 많고 사람도 많습니다. 조용히 사색하며 바라볼 동백은 이미 물 건너간 듯 싶습니다. 동백은 벌써 화려한 자태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시든 꽃이 많습니다.
동산 안에 있는 유리카페에 갑니다. 유리온실 안에 작은 꽃과 화단이 앙증맞습니다.
온실 양옆으로 테이블이 놓여있고 다른 곳으로 개울물도 만들어 놓습니다. 라떼커피에 쿠키 하나를 깨물며 지친 다리를 쉽니다.
‘이 카페 너무 좋은데? 경기도에 하나 만들어볼까? 관리는 누가 하고?’
빗방울이 흩날리는 제주 산방산 인근을 우리는 다시 달립니다.
차 안에서 아들에게 묻습니다.
“넌 금 오름 좋던?”
“처음 보는 곳이라서 좋은데요?”
그랬습니다. 무엇이든 처음 보는 곳은 대부분 아름답고 신기하다는 것을, 하물며 음식도…….
우리는 다시 군산 오름에 오릅니다. 군산 오름은 차가 정상까지 갈 수 있어서 우리는 비가와도 아랑곳없이 달립니다. 정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걸어서 백여 미터를 오릅니다.
유채꽃도 간간히 보입니다. 멀리 대평바다가 울먹거립니다. 수많은 비닐하우스가 모자이크처럼 빛납니다. 정상에 오르니 진지동굴이 보입니다. 해방 전, 일본군들이 군수물자를 숨기고자 인공으로 만든 동굴인데 제주 전역에 수백 개의 진지동굴이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군산오름에서 내려다본 길은 세상 어느 길 보다 아름답습니다.
왜 나는 길을 탐할까요? 길이 아름다우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느 시처럼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나는 걸었네, 군산 오름은 길이 만들어주는 분화구 없는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라 감히 생각해봅니다.
들어가는 길에 서귀포 횟집에 들립니다. 이곳 역시 번호표를 받아 기다립니다. 이번엔 현지인들이 찾는 곳이라기보다는 관광객들이 찾는 횟집입니다.
산삼 실뿌리, 도넛, 전복죽, 전복물회, 다금바리 사촌, 우럭, 광어, 꽁치대신 고등어, 매운탕, 후식으로 팥빙수까지……. 솔직히 어느 한 가지 맛이 없는 게 없습니다.
제주 올 때면 매번 빠지지 않고 오는 곳인데 올 때마다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좋습니다. 물론 가격도 업그레이드 된 것은 아쉽지만요.
식사를 하고 서귀포 시내를 구경합니다. 매일시장도 구경합니다. 김밥 집에 젊은이들이 줄을 서 있네요. 내가 한때 이곳에서 장사를 했었기에 더 친근감이 있는 서귀포여서 돌아보는 내내 기분이 좋습니다.
내일은 내 생에 최고의 오름을 오르게 됩니다.
“따라비 오름을 가지 않고는 제주 오름을 올랐다고 하지 마라!”
368개의 오름중 오름의 여왕이라 부르는 따라비 오름을 오르고자 나는 제주에 왔습니다. 그러나 오르기 전 까진 따라비 오름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