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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한반도 정책 ‘숨은 손’, 보수기독주의 그룹 |
‘대북압박’ 로비하는 미국 최대 정치단체, 부시 넘어 브라운백으로 |
김윤재 미국변호사, 미국정치 컨설턴트 younjae.kim@cox.net |
최근 북한을 압박하는 미 의회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7월14일 대량살상무기(WMD)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을 북한과 거래하는 기업 제재 법안이 통과됐는가 하면, 닷새 뒤에는 동구권 붕괴에 일익을 담당했던 ‘헬싱키 프로세스’를 북한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4년 북한인권법 제정으로 상징되는 미 의회의 대북 강경자세에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보수기독주의 그룹의 강력한 로비가 있음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식으로 미국정치를 장악하게 됐나. |
2003년 여름, 미국 내 21개 단체가 모여 북한자유연합(North Korea Freedom Coalition·이하 자유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거나 제기해온 기존 단체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기독교단체와 풀뿌리 조직을 근간으로 하는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인권’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체제의 변동을 주장했다. 이들의 활동방향은 2003년 의회에 상정된 북한자유법(the North Korea Freedom Act of 2003)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법안은 북한의 인권은 물론 마약거래, 대량살상무기 문제 등 미국의 대북정책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법안 상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 박사 역시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이 법안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대량의 탈북자를 유도해 궁극적으로 북한의 체제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반면 주요 인권단체들은 이 법안이 북한의 인권 상황 개선에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견을 외교위원회에 전달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공화당 소속 짐 리치 하원의원은 이 법안에서 독소조항을 제거하고 인도적인 지원에 좀더 초점을 맞춘 북한인권법(the 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새로 내놓았다. 상원에서는 민주당 조 바이든 의원이 논란이 있는 부분을 손봤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법안이 미칠 실질적인 영향은 물론 상징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미국 내 외교 전문가들도 이 법안이 6자회담에서 북한과 협상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자유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법안 옹호자들은 더는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법안 반대자들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공화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원을 포기하더라도, 먼저 표결에 들어갈 상원에서 이 법안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인권법은 98대 0 전원 찬성으로 상원을 통과했다. 뒤이은 하원에서의 통과는 당연한 일이었다. 2004년 10월18일 부시 대통령은 이 법에 서명했다. 국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반대자를 물리치고 북한인권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권이라는 당위가 상원의원 모두의 공감을 얻은 때문일까. 아니면 워싱턴을 가득 메운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일까. 그러나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법안이 98%에 가까운 워싱턴의 현실에서 북한인권법의 일사천리 진행은 매우 강력한 힘이 움직였음을 방증한다. 바로 보수기독주의자들의 힘이다. 자유연합이 전면에서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활동했다면 그 뒤에는 복음주의자전국연합(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이하 전국연합)이 있었다. 이들에게 북한인권법은 종교인박해금지법, 수단평화법 등과 함께 핵심 법안으로 지목된 바 있다. 이 법안의 입법을 위해 이미 공화당 의회 대표단과 합의를 마쳤고 백악관과도 조율을 끝낸 상태였다.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민주당 상원에는 당시 대선후보이던 존 케리, 원내대표 톰 대쉴, 외교위원회 간사 조 바이든을 차례로 방문해 로비를 펼쳤다. 법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이들 의원에게 개별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경고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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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창립해 3000만명의 회원과 4만5000개의 소속교회, 50개의 회원교파를 자랑하는 전국연합의 정치적 파워는 워싱턴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법안을 반대하는 세력이 어떤 정치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이들과 대립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해에 선거를 치러야 했던 케리나 대쉴은 하루라도 빨리 이 법안의 통과를 원했다. 당의 대선후보와 원내대표가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어느 민주당 의원이 나서서 법안을 저지하겠는가. 더구나 공식적으로 이 법안은 ‘악의 축’인 북한의 인권 문제를 개선하자는 것 아닌가. 한반도 문제에 21세기 미국정치의 새로운 강자가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1960년대와 ‘남부전략’ 미합중국 헌법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미국 정치가 종교에 민감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해받던 청교도가 이민 와 세운 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암묵적으로 국교(國敎)와 같다. 대통령이 취임식장에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이 그 상징이다. 개신교도가 아닌 천주교도가 미국의 대선후보가 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대통령이 된 비개신교도는 존 F. 케네디가 처음이다. 그는 선거과정에서 “나의 종교적 믿음은 국정운영에 전혀 개입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두 가지가 충돌할 경우 종교를 버리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개신교의 힘이 막강한 워싱턴의 환경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면적인 정치활동은 이들의 로비로 만들어진 금주법(Prohibition)이 실패한 1920년대부터 위축되기도 했다. 대공황에 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민주당의 새로운 선거연합을 만들었다. 대다수 복음주의자가 자신들의 내면의 가치관(value)보다는 경제적 이해나 계층적 이해에 따라 투표했다. 정치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들이 다시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은 40년이 지난 뒤였다. 반전, 저항문화, 민권. 남부의 백인 근로계층은 이러한 시대적 담론이 미국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법원의 결정과 연방정부의 정책으로 강행되는 인종융합이나 민권정책을 ‘수용할 수 없는 자치권 침해’로 간주했다. 공화당의 젊은 전략가 케빈 필립스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았다. 그는 사회·문화적인 이슈의 정치화가 30년 넘게 지속해온 남부지역의 ‘경제적’ 투표행태를 ‘가치관’에 따른 투표행태로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공화당이 그 가치를 실현할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보고서는 1968년 리처드 닉슨 진영에 의해 채택됐고, 닉슨은 대선에서 두 차례 승리하며 공화당이 앞으로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정치구도를 선사한다. 아직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른바 ‘남부전략(Southern Strategy)’이다. 이어 1973년 대법원이 여성에게 낙태를 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자, 공화당의 남부전략 속에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보수기독주의자들은 이를 저지할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결성된 단체들 가운데 주목을 받은 것이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다. 1979년 근본주의 목회자인 제리 팔웰과 보수세력의 전략가인 폴 웨이리치가 설립한 이 단체는 20세기 후반 기독우파가 중심이 된 최초의 정치단체로 기록된다. 이 무렵 근본주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은 공화당 내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68년 이후 여섯 번의 대선에서 이룬 다섯 번의 공화당 승리는 이들의 입지를 계속 강화해주었다. 그나마 한 번의 패배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였고, 당시 민주당 후보는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복음주의자라 할 수 있는 지미 카터였다. 조지아주 출신인 카터는 남북전쟁 후 ‘원조(元祖)’ 남부에서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종교관이 민주당 후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텃밭이 되어가던 남부 11개주 중 7개를 차지하는 원동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팻 로버트슨의 교훈 1980년 카터의 재선(再選) 실패를 복음주의자의 이탈 탓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제상황 악화와 지도력 한계는 전국민적인 실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 유권자의 눈에, 복음주의자인 카터가 세속적으로 행동한 것에 반해 세속주의자에 가까운 로널드 레이건이 복음주의자의 가치관을 대변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낙태와 동성애 반대는 물론 ‘악의 제국’ 소련과 치열한 냉전을 벌인 레이건은, 넓게는 보수주의자들의 대통령이자 좁게는 기독우파의 대통령이었다. 1984년 레이건은 재선에서 복음주의자의 70%가 넘는 지지를 받으면서 압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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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공화당은 누가 레이건의 보수적 가치관을 계승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부통령 조지 부시는 북동부 엘리트 성향으로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대변할 수 없다는 게 레이건 측근들의 판단이었다. 이 상황에서 텔레비전 복음설교로 일정한 영향력을 누리고 있던 기독근본주의자 팻 로버트슨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공화당 지도부로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바라지만 복음주의 목회자가 후보로 나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당내 경선의 지나친 우향우는 본선에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승리의 열쇠는 극단적인 특정 정치세력이 아니라 부동층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팻 로버트슨의 등장으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의심을 받던 부시의 처지는 더욱 곤혹스러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다수의 복음주의자는 승리를 원했다. 로버트슨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다 해도 본선에서 승리할 수는 없으리라는 걸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부시는 남부 백인 복음주의자들에게서 47%의 지지율을 확보하며 후보가 되었다. 부시 후보가 가장 세속적인 대선후보 중 한 명으로 불리던 마이클 듀카키스를 상대로 복음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부시는 초반 17%의 열세를 뒤집기 위해 듀카키스의 가치관을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철저하게 분리하는 전략을 취해 승리를 거머쥔다. 그러나 국정운영은 달랐다. 부시는 현실주의자였고 세계관은 북동부 엘리트적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불만을 표출했고 로버트슨은 독자적 정치세력을 위해 활동이 미비한 ‘도덕적 다수’를 대처할 단체를 결성한다. 바로 기독연합(Christian Coalition)의 태동이다.
새로운 지도자, 조지 W. 부시 워싱턴에서 기독근본주의 그룹은 물론 풀뿌리 이익단체가 벌이는 정치활동의 상징이 된 이 단체는, 랄프 리드라는 갓 서른을 넘긴 젊은 보수활동가를 사무총장으로 영입하면서 급성장한다. 리드는 풀뿌리 조직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유권자 교육, 선거안내서 배포, 투표율 증가운동, 유권자 결집 등을 통해 기독연합의 이슈를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고 반대하는 후보를 낙선시켰다. 처음부터 관심이 집중되는 연방선거에 개입하기보다는 교육위원 선거와 지방의회 선거 등에서 영향력을 축적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조용히 힘을 모으던 기독연합은 마침내 전국에 자신들을 알릴 거사 시점을 정한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중간선거였다. 뉴트 깅그리치가 이끄는 보수성향의 정치 신인들은 ‘미국과의 10대 약속’을 발표하고 선거를 치른다. 이들의 열성 후원그룹은 말할 것도 없이 기독연합으로 대표되는 보수기독주의자 정치단체였다. 이후 리드는 공화당 최고단위 전략가회의의 고정멤버가 되었다. 20만달러의 예산으로 시작한 기독연합은 6년 만에 2700만달러의 예산과 110명의 상근직원을 거느리는 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리드 개인의 역량으로 발전한 인물 중심의 조직인데다 타협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성장의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1996년 선거에서 밥 돌의 패배, 1998년 클린턴 대통령 탄핵 실패와 중간선거 패배 등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좌절을, 기독연합에는 후유증을 남겼다. 설상가상으로 리드는 정치 컨설팅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위해 사무총장직을 사임한다. 스타가 떠난 기독연합은 후임자들이 그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자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기독근본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01년 12월24일자 기사를 통해 ‘기독연합의 창립자이며 회장인 로버트슨 목사의 사임은 기독우파에게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새로운 지도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조지 W 부시였다. 독실한 신앙에서 기인하든 정치적 계산의 결과이든, 신앙을 중심에 놓은 그의 국정운영 실천은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 확연한 차별성을 보여준다.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선명성을 앞세우는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복음주의자들의 칭송은 괜한 말이 아니다. 부시는 알려진 바와 같이 할아버지 때부터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 영향력을 지닌 집안 출신이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북동부 엘리트 정서를 거부했다. 텍사스가 그의 고향이고 남부의 전통과 가치관에 더 익숙했다. 그러나 1975년 하원의원 선거에서의 낙선은 그가 모르던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아무리 텍사스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해도 지역 주민들에게 부시는 예일과 하버드대를 나온 북동부 엘리트이며 부유층 자제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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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해 술독에 빠졌던 그는, 하나님을 영접해 40세 생일을 끝으로 술을 끊었다고 선언한 뒤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성공회교회 대신 감리교로 자신의 교단을 바꾸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1986년, 아버지의 대선이 있기 2년 전이었다. 부시가 선거 캠페인마다 그때의 경험을 강조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복음주의자들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변화는 대선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정치가도에 나쁠 것이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버지 부시의 대선에서 아들 부시는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87년부터 2년 동안 보수기독주의자 그룹의 연락관으로 일했다. 부시 캠프와 보수기독주의자 간의 상호이해를 전달하고 보수기독주의자들의 네트워크를 넓히는 역할이었다. 이 경험은 그가 복음주의자들의 생각과 정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이탈로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는 순간도 경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레이건의 정치적 계승자가 되기를 원했다.
‘투자’와 ‘보상’ 2000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부시의 계획은 순조로웠고, 그의 정치 브레인 칼 로브의 3년여에 걸친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존 매케인이라는 복병을 만나 오픈 프라이머리(예비선거)의 상징인 뉴햄프셔에서 무참하게 박살이 난다. 공화당 주류는 당황했고, 부시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승부를 판가름내야 했다. 그러나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재향군인 세력이 만만치 않은 지역이었다. 병역복무기록이 확실치 않은 부시에 비해 매케인은 월남에서 7년간 포로로 지냈고 해군 제독의 아들이었다. 이때 부시와 로브가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 곳이 바로 기독근본주의자들이었다. 부시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다른 인종과의 데이트를 금지하는 정책 때문에 연방정부의 예산지원을 박탈당한 백인 중심의 기독근본주의자 학교 밥 존스 대학에서 연설할 기회를 갖는다. 당시 부시 선거 진영의 남부지역 책임자는 다름 아닌 랄프 리드였다. 주류언론의 비난과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독근본주의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독우파 목사들이 언론에 나와 “매케인은 기독교적 가치관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밑바닥에서는 매케인에 대한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거둔 승리로 부시는 사실상 후보자리를 확정짓는다. 대선 과정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을 향한 그의 ‘신호’는 계속 됐다.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둔 예비후보 간 텔레비전 토론에서 그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의 이름을 대달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 이러한 구애는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선거 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복음주의자의 84%가 부시에게 투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부시와 고어의 대결은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이 때문에 로브는 대선 승리 이후에도 정치적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인 복음주의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부시는 이들 그룹의 요구대로 존 애쉬크로프트를 법무장관으로 지명하고 생명과학위원회 위원장으로는 리온 카스를 임명했다. 대통령 측근이 아닌 애쉬크로프트의 지명은 내부에서조차 논란을 일으켰지만,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의지는 완강했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2004년 재선 후 부시가 각료임명에 이념적 성향보다는 본인의 측근을 임명하기 시작하자 기독근본주의 그룹들은 우려를 표했다. 급기야 부시가 낙태 등에 대해 견해가 불분명한 백악관 법률보좌관 해리엇 마이어스를 지명하자 분노는 폭발했다. 이들은 마이어스의 지명을 철회하지 않으면 백악관과 결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부시는 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새뮤얼 앨리토라는 ‘타협적인’ 인물로 후보를 대체해야 했다. 이후에도 부시의 구애는 이어지고 있다. 재선할 경우 동성애자간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헌법수정조항에 포함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나, 최근 의회를 통과한 줄기세포연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한 사례들이다. 로브는 60여 명의 개인과 단체대표들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수기독주의자들이다.
‘새로운 국제주의자’의 탄생 9·11테러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부시의 대통령직이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복음주의자전국연합에서 대정부 관계를 맡고 있는 리처드 시직은 “무오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 절대선과 절대도덕이 존재하고, 그 반대편에 절대악 역시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9·11은 바로 그 절대악의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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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이 연설에서 ‘선과 악’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연설문 책임자인 마이크 거슨은 아프리카 수단 문제에 깊숙히 관여했던 기독근본주의 활동가 출신이다. 신학도 출신인 거슨은 성경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하는 백악관 연설담당자로 평가받는다. 이들 보수기독주의자들의 관심사는 낙태 금지, 동성애 결혼 금지, 학교 내 기도 허용, 인간복제 금지, 줄기세포 연구 반대, 반종교적 대중문화의 규제 등 국내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슈는 그들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데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기독교의 중요한 정신 중에 하나가 나눔과 관용이라면 최소한 미국정치에 참여한 복음주의자들의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서두에 언급한 북한인권법 통과과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근래 들어 복음주의자들이 국제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단순히 ‘악을 응징하는’ 차원을 넘어 가히 ‘새로운 국제주의자들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전국연합이 종교를 박해하는 국가들에 불이익을 주는 법안을 만들기 위해 로비를 시작한 것은 1996년이 처음이었다. 법안은 종교인들, 특히 개신교 선교사를 박해하는 국가에 정치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북한 쿠바 수단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알제리가 리스트에 올랐다. 클린턴 행정부는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반대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로비는 결국 ‘국제종교자유법(the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Act of 1998)’을 탄생시켰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2000년에는 자신들의 대변인 격인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과 민주당 내에서도 대표적인 진보성향 인물로 꼽히는 에드워드 케네디, 폴 웰스턴의 지지를 받아 ‘국제 성매매 근절을 위한 인신매매 금지법(the Freedom from Trafficking Act of 2000)’을 통과시킨다. 리처드 시직은 언론 인터뷰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은 ‘복음’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복음주의적 국제관(觀)인 셈이다. 각종 법안 통과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이후 수단 내전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이는 종전의 다른 국제 문제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제까지의 활동이 종교인 보호나 인도적 지원 등이었다면, 수단 내전에 대한 개입은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첫 사례였다. 당시 의회나 행정부는 모두 수단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20년 가까이 진행돼온 이슬람 정부와 기독 반군의 내전으로 200만명의 사망자를 낸 사태에 개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행사했고, 수단평화법(The Sudan Peace Act of 2000)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이 법안에 서명해야 했다. 주목할 것은 수단 평화법이 내전 종식을 위한 특사 임명과 정부 차원의 각종 지원 및 제재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법안의 통과과정이나 목표, 방법 등이 그 다음 국가로 지목된 북한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그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嫡子,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 워싱턴에서 북한인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북한에서 생활하다 추방당했다는 독일 의사 노르베르트 플러첸과 그의 주장을 경청한 미국 내 한인 교인들의 활동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러첸은 2002년 상원 법사위원회 증언에서 “북한 난민의 양산은 결국 북한 정권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뒤이어 브라운백 의원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를 주는 탈북자에게는 특별비자를 제공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북한인권법이 단순한 인권개선뿐 아니라 북한 체제 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분석을 낳는다. 특히 워싱턴 내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세력이 디펜스포럼의 수전 솔티 대표나 마이클 호로위츠 연구원처럼 공공연히 북한 정권의 교체를 주장하는 강경파임을 감안할 때, 인권 문제는 지속적으로 대북압박의 지렛대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인권법에 의해 임명된 제이 레프코위츠 인권특사는 미 행정부 내에서 한국을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아니라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에게 직접 보고한다. 행정부의 공식적인 대북정책 방향과 상반된 움직임을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그는 지난해 8월 “개성공단의 임금이 현재 북한정권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발언과 “인도적 지원과 인권 문제를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국무부 담당자들이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서야 했다. 북한인권 문제는 분명 북한체제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접근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워싱턴의 주류 인권단체가 ‘접근법’을 장기간 고민하는 동안 북한의 체제 붕괴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인권 이슈를 선점하고 복음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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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움직임은 어떠한 형태로든 2008년 대선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인이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의 한반도 정책 또한 명시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황에서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적자(嫡子)는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다. 1994년 깅그리치 군단의 일원으로 의회에 진입한 그는 상원진출 과정에서 보수기독주의 그룹의 지지를 받은 대표적 수혜자다. 낙태 문제에 대한 경쟁자의 생각을 쟁점화해 보수기독주의 세력을 결집한 것이었다. 1998년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된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의회의 가장 확실한 우군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그가 실제로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전문가들은 복음주의자 그룹이 목회자 출신이면서도 더 대중적인 아칸소주 지사 마이크 허커비를 대표로 내세우든지, 혹은 지지율에서 선두를 달리는 주자와의 협상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1988년 로버트슨이 아닌 부시를 택한 이들의 전략적 선택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브라운백 의원이 더욱 열성적으로 북한 문제에 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백 의원은 지난 7월14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물품을 거래하는 기업과 개인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비확산법안’에 북한을 적용 대상으로 추가하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7월19일에는 상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련이 도덕적 부당성 때문에 붕괴했던 것처럼 피폐해진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을 탈출할 기회와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내부로부터 북한 체제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 행정부가 1970년대 동유럽에 적용됐던 헬싱키협약처럼 포괄적이고도 다면적인 새로운 안보의 틀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방세계가 소련과 동유럽의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거론해 공산권 붕괴를 촉진한 헬싱키 프로세스 전략을 북한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운백 의원의 이날 회견에는 북한인권법에 따라 지난 5월 처음으로 ‘비정치적 망명’이 허용돼 3개월째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자 여섯 명이 동석해 북한에서 겪은 처참한 일들을 증언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중도단체들은 종교단체가 예산 배정에서부터 외교 문제에까지 개입하는 현재의 상황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의 과도한 개입이 반동을 불러올 것이라는 경고다. 절정에 다다른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지속될지 점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위험의 가능성은 여러 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전국연합이 다양한 그룹과 펼치고 있는 연대관계가 근본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국제주의자적 행동이 세속주의자들과의 타협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전국연합이 지구촌 온난화 문제를 위해 친(親)민주당 성향의 환경단체와 손을 잡거나, 성매매 근절을 위해 여성권익단체와 협력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법 제정 통한 독재국가와의 대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의회와 행정부 사이의 주도권 문제도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의회에 상정되는 각종 법안이 행정부의 외교적 협상력을 제한할 때, 행정부가 이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단순히 이념이 같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다툼이다. 수단이나 북한 관련 법안은 시작에 불과하다. 궤도에 오른 근본주의자들은 국제 문제 개입에 있어 속도를 조절할 의사가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부시 행정부라고 해서 이들에 의해 의회를 통과한 국제정책 관련법안에 언제까지나 무조건 서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법 제정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단체는, 북한인권 문제의 이슈화를 주도하는 자유연합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종교자유와 인권을 위한 전국연합(The National Coalition for Religious Freedom and Human Rights)’이다. 그러나 이 단체는 그 성격이 상당부분 공개되지 않았다. 홈페이지도 없다. 보수기독주의자들의 활동단체로 의회의 법 제정을 통해 전세계 독재국가들과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전부다. 무엇보다 큰 위험은 공화당의 도덕성에 있다. 어느 때보다 도덕적인 워싱턴을 기대했던 평범한 복음주의자들에게 최근 터져나오는 각종 스캔들은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소다. 기독연합의 스타 랄프 리드가 올해 조지아주 부지사 선거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것은 보수기독주의자들의 상층부와 일반 신자들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11월로 예정된 중간선거는 이들 보수기독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물론 풀뿌리 조직으로 투표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복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수그러들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북한 문제를 포함한 국제 문제에 대한 개입 또한 상당기간 탄력을 받고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역사의 교훈이다.
인권을 포함해 포괄적인 사안을 다루는 헬싱키협약 같은 방식이 효과를 발휘할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자국의 이익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고 이를 관철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외교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정이나 이념이 개입할 경우 상대에게 무엇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협상에 성공할 수 없다. 8월2일자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미국은 대북정책의 이중적 태도를 끝내고 진지한 협상을 통해 북한의 의지를 시험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지속되는 한 부시 행정부의 이중적 태도는 쉽게 변하지 못할 듯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