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칸반도 9개국 탐방
날짜:2011년 9월 7일 수요일~18일 일요일 11박 12일
여행국: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 불가리아에서 세르비아 가는 국경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국경 지역에 도착했다. 지금 시각 오전 9시다. 여권을 준비해야 한다. 불가리아의 출국 도장을 받기 위해 내렸다. 사무소에서 각자 한 사람씩 줄을 서서 출국신고를 했다. 조금은 삼엄한 분위기다. 다시 조금 앞으로 진입하여 세르비아에 입국 신고를 받고 세르비아로 들어섰다.
* 세르비아 휴게소
시골의 한적한 휴게소다. 분수와 바퀴 전시가 아름답다. 한국과 유사한 산 풍경이어서 정겹다. 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다. 여기서 40분은 산길 국도다. 다음은 고속도로다.
* 세르비아 들녘
올리브 나무가 지천이다. 오늘 우리가 유숙할 호텔 주변에도 그렇단다. 성경의 감람나무다. 민가 주변에는 옥수수와 함께 양배추도 많이 재배한다. 비닐하우스도 있다. 올리브 나무, 사과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도 많다. 협곡 터널의 굴속을 여러 개 지난다. 가을빛 단풍 산, 바위산이 아름답다. 산길을 지나자 베오그라드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베오그라드까지 2/3 온 지점이다. 2시간 정도 가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린다. 이곳에서 버스 사용료는 1Km당 1.5유를 지불한다. 새 버스는 2유로를 지불한다. 1일로 계산하지 않고 보통 400~600Km 주행으로 계산한단다. 베오그라드와 스코프예 중간 도시인 니쉬를 지나간다. 오늘 저녁 유숙할 곳이다. 깊은 산자락 아래 푸른 나무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장관이다. 여기서 베오그라드까지는 200Km로 2시간 소요되어 오후 1시경 도착 예정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휴게소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다. 멀리 첩첩이 둘러싸인 산과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전개된다. 발칸의 상징처럼 다가오던 드넓은 옥수수밭이 광활하게 목전에 있다. 화장실이 무료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하얀 아기 고양이를 안고 자동차를 탄다. 휴게소 풍경이 아름답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도착
발칸 9개국 발칸, 슬로베니아에서 루마니아까지 14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사실은 그때가 자유와 평등으로 평화로웠다고도 한단다. 오스만을 남으로 밀어내고 세르비아가 지배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1차대전 후 통합했다. 최근까지 유고연방국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해체된 이후 1991년 슬로베니아부터 발칸국 각자 독립을 시작하며 유고슬라비아가 8개 나라로 분열 해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티토에 의해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그가 사망한 뒤, 유고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어 각 공화국에서 차례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1989년 공산 정권들의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발칸은 끈임 없는 분쟁과 분쟁이 이어져 왔다. 1999년 미국과 세르비아 교전이 있었다.
발칸은 봄, 가을이 없다. 4월이면 30도다. 올리브 나무가 많이 보인다. 베오그라드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백색 도시란 뜻의 베오그라드가 곧 보이기 시작한다. 베오그라드에서 베오는 하얀, 그라드는 도시란 뜻이다. 창밖의 베오그라드 초입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다. 시차가 불가리아보다는 -1시간, 한국과는 -7시간이다. 현지시각 오후 1시, 한국시각으로는 오후 8시다. 베오그라드에는 교민이 15~20명 정도 산다. 소수 인원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은 구시가지, 다리 건너서는 신시가지다. 중국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도심의 나무 숲 공원이 장관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시가지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 수도이며, 구 유고연방의 수도였다. 발칸반도의 도시들은 내전으로 폐허를 연상하지만 고풍스러움과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환경이 남아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시가지는 보수해서 깨끗해졌지만 아직도 전쟁으로 망가지거나 탄흔 그대로인 건물도 있다. 국민들이 우울했는데 작년부터 좀 밝아졌단다. 6국가와 2개 자치구였던 유고연방이 현재는 서로 섞여서 나누어져 있다. 세르비아 인구는 750만 명이다. 코소보까지 합하면 950만 명이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지다. 2008년에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코소보는 대부분의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베오그라드는 200만명으로 유럽에서는 큰 도시다. 출퇴근시에는 교통이 복잡하다. 교통규칙을 안 지킨다.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베오그라드는 크로아티아어로 하얀 마을이라는 뜻이다. 동로마 제국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인들이 흰 벽돌로 성벽을 둘러쌓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있으며 문화의 중심지로도 발전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잔해가 남아있는 듯하지만, 도시는 조형예술을 고려한 건축물 등이 발전하는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베오그라드에는 중국인 5천명, 일본인 300명, 한국인 50명 정도가 산다. 그래서 이곳에서 동양인을 보면 묻는 순서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이렇다. 중국인을 싫어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좋아한다. 한국인이라 하면 남한? 북한? 이렇게 꼭 묻는단다. 세르비아 가이드는 이곳에서 부르는 이름이 세르비아 말로 좋은 날이란 뜻의 도비드단이란다. 인정 많고 다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는 전쟁의 상처 딛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토 공습 파괴현장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전쟁의 아픈 상처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아마 유럽에서 이 도시만큼 외세 침략과 내전으로 가슴 시린 상처를 많이 가진 곳도 드물다. 기원전 4세기 켈트족이 이곳에 작은 도시를 세운 뒤 로마인들이 베오그라드를 정복했다. 여기서부터 작은 강가의 도시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에 간섭을 받으며 서로 물고 물리는 혈전을 거듭해 왔다. 12세기경 주변의 국가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다투었을 정도로 교통과 군사적 요지인 베오그라드는 역사적 환경에 따라 지배권에 따라 늘 지배권이 바뀌면서 안정된 역사를 누려보지 못했다. 내전 말기에는 결국 나토가 개입하여 세르비아 폭격, 경제 제재 등을 동원하였고, 3년 반에 걸친 민족분쟁 내전은 그 막을 내렸다. 세르비아 내전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다움 지식창에서 도움을 받았다.
세르비아의 대통령이었던 밀로세비치는 1941년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가 젊었을 때 자살하였다. 우등생이었던 밀로세비치는 대학을 졸업 후 유고 공산당 조직원이다가 1986년 세르비아 공산당 당수가 됐다. 그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 코소보였다. 1988년 집회에서 세르비아는 코소보 탈환을 위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연설하며 세르비아계가 살고 있는 모든 옛 유고지역을 통합한 대 세르비아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유고연방은 소련에 맞서 독자적인 사회주의를 이끌던 지도자 티토가 80년에 사망한 후,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유고연방은 인종이 다른 6개의 연방이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종족분쟁을 막고 있던 위대한 티토는 자신이 죽은 후 유고연방이 갈라질 것을 우려해 민족문제를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그중 하나는 코소보에 상당한 자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밀로세비치는 바로 그런 취약점을 건드렸다. 당시 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이 다수였다. 세르비아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설움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밀로세비치는 바로 이러한 민족감정을 부추겼고 그 덕분으로 1989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밀로세비치로 인한 유고연방 안의 민족주의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영향을 줘서 얼마 후 유고연방은 민족별로 몇 개 나라로 분리 독립했다. 밀로세비치의 유고연방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코소보만 남았다.
이것이 모두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1991년과 1995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 5년 동안 밀로세비치는 국내에서는 독재 강화, 국외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했다. 밀로세비치의 이런 행위는 1995년 보스니아 정부가 세르비아인을 청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이른바 세르비아 내전이다. 세르비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991년 미국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이때 밀로세비치는 자신의 '대 세르비아' 정책을 양보하는 듯 보이며, 경제재건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따내는 정치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1996년과 1997년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 국내에서 반대세력의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다. 그때 코소보에서 문제가 생겼다. 밀로세비치는 알바니아계가 다수인 코소보의 자치권을 1989년 박탈했었다. 그러나 170만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1998년부터 아예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했다. 독립을 요구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세르비아 경찰과 군의 잔인한 인종청소가 시작됐다. 1998년 2월, 코소보를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알바니아 민병대에 살해되면서 급기야 전쟁으로 치달았다. 1998년 3월 초 알바니아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사태발생 3개월 사이 세르비아는 코소보 무장반군 소탕작전을 전개해 200여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5월에는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들을 사살했다. 수십만의 알바니아인 피난민이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 자신의 땅으로 넘어올 것을 염려한 서유럽과 러시아는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 정부 간의 잠정 평화협정을 급히 주선했다. 평화회담은 1999년 2월 프랑에서 열렸는데 밀로세비치는 참석하지도 않았고, 발표된 합의문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유고에 대한 나토와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밀로세비치의 미국 등 서방에 대한 기만전술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나토를 교묘히 조롱하여 사태는 종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한국시간 1999년 3월 25일 오전 4시 나토는 전폭기를 동원하여 코소보 평화안을 거부한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였다. 78일간 계속된 이 공습으로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주로 떨어진 폭탄은 유고의 방송사, CNN의 위성방송 장비를 부수고, 오폭으로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도 부쉈다. 유고 공습에 대해서는 나토와 밀로세비치 둘 다 오판을 했었다는 평가가 있다. 자신의 집도 폭격 당한 밀로세비치는 나토의 공습은 나토 내부의 분열을 일으킬 것이고, 특히 러시아는 자신의 편에 설 것으로 예상했다. 나토와 미국은 또 나름대로 폭격을 시작하면, 밀로세비치가 꼬리를 내리고 항복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과는 둘 다 틀렸다. 78일 간의 폭격 후, 코소보에는 유엔 감시단과 나토의 평화유지군이 들어갔다. 폭격 기간 동안 피난을 갔던 85만의 알바니아인들은 돌아왔고, 보복을 두려워한 20만의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떠났다.
1999년 밀로세비치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르비아에서 시작됐다. 밀로세비치의 유고연방에 마지막 남은 지지자였던 몬테네그로도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름만 연방일 뿐 사실상 독립국가가 됐다. 2000년 10월 밀로세비치는 대통령선거에서 패했다. 밀로세비치는 유엔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특별히 마련한 전범재판소에 기소되었으며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밀로세비치가 구 유고연방에서 90년대 발생한 전쟁의 배후라고 했다.
베오그라드 도심 대로변에 나토 공습 파괴현장이 있다. 허물어진 건물이 그대로 서 있다. 나토 공습 때 오폭으로 파괴된 중국 대사관 건물이다. 버스가 지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보았다. 전쟁은 이런 것이라고, 아픈 상처를 교훈으로 전시해 둔 것 같다. 참으로 처참한 그날의 전흔이다. 시가지의 다른 건물들은 처연하다. 시청, 공화국 광장 주변의 아름다운 건물들, 유럽풍의 주상복합 상가, 붉은 전차 등이 도시를 곱게 이끌고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스카다리아 거리
베오그라드 시내 도보 관광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걸어서 오른 소로의 돌길 스카다리아 거리는 19세기 세르비아 예술인의 활동무대이자 보헤미안의 거리다. 온통 꽃과 나무로 장식되어 있는 돌변에는 낭만이 흐르는 카페가 즐비하다. ‘세 개의 모자 카페’라는 독특한 이름의 카페도 있다. 모자를 쓴 예술인 세 사람이 즐겨 찾던 카페로 그중 하나는 보헤미안 시인의 모자다. 모자를 쓴 시인의 동상과 시인의 집이 있다. 이곳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
베오그라드 구시가지의 도심, 공화국 광장 중앙에는 코네즈 미하일로 왕의 기마상이 우람하게 서 있다. 코네즈 미하일로 왕은 1867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키고, 수도를 베오그라드로 옮긴 세르비아의 영웅이다. 광장 주변에는 아름다운 건물들도 많다. 기마상 왼편에는 한국인도 활동하는 베오그라드 국립 오페라 극장, 오른편에는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듯한 중세풍 세르비아 박물관이 있다. 1945년 유고연방 공화국제를 선포하면서 그 기념으로 붙여진 이름의 이 광장은 시민들 만남의 장소다. 꽃 화단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코네즈 미하일로 왕의 거리
베오그라드의 중심지로 가장 큰 번화가다. 미하일로 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보행자 전용 거리다. 공화국 광장에서부터 칼레메그단 요새까지 이어지는 미하일로 왕의 거리에는 노천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하다. 21세기 세르비아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거리다. 한국의 명동 거리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많이 파괴됐던 거리를 복원하여 동유럽 특유의 낭만이 서린 거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는 그래도 처참했던 전쟁을 딛고 행복한 표정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서라도 여행을 간다. 시원한 분수도 솟구친다. 이 거리만 화려할 뿐 도시를 벗어나 외곽에 나가면 달구지도 있다. 각종 행사가 열리는 거리로, 우리가 갔을 때는 소 동상을 곱게 장식하여 거리 중앙에 세워 두어 더욱 아름다웠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사보르나 정교회
미하일로 거리가 끝나고 조금 걸어가니 하늘 높이 솟은 십자가 첨탑의 교회가 보인다.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가까이 다가가니 정원에서는 결혼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슬라반 행사로 음료를 나누어주는 행사가 있다. 섬기는 성인이 같은 자들의 모임이다. 1841년에 지어진 세르비아의 민족종교와 접목된 독창적 정교회다. 성당 내부에는 성화로 가득 차 있다. 정교회는 서서 예배 본다. 미하일로 정교회라고도 부른다. 카톨릭교와 이슬람교의 합성 건물이다. 정원에 미하일 왕 무덤과 세르비아어 창시자 무덤, 교육자의 무덤이 있다. 세르비아 왕가의 교회여서 교주의 집이며 박물관으로 왕가와 교회 수장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교회 앞에 독특한 상호의 카페가 있다. 원래 이름은 ‘사보르나 정교회 앞 카페’였는데 교회에서 이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아직까지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어떻게 이름을 지으면 좋겠냐고 했는데 교회로부터 답변이 없자 임시로 ‘?’표만 걸어 두었다 그런데 그 특이한 이름으로 더 유명해져서 현재까지도 의문부호 ‘?’만상호로 걸려 있다. 교회와 마주 선 고풍스런 카페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 공원
사보르나 정교회에서 칼레메그단 요새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 갔다. 가을빛 거리 정취가 참으로 아름답다. 숲과 가로수 나무들이 길을 이끈다. 한참을 걸어서 칼레메그단 요새에 거의 다달았을 때 그 주변은 완전히 울창한 숲의 공원 있다.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인 이곳 칼레메그단 공원은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합류하는 곳의 제방 위에 있는 공원이다. 산책로 주변에 유명한 정치가, 운동가, 전쟁관련 등의 조각상을 많이 세워 놓았다. 동물원, 전쟁기념관, 승리의 탑 등이 있으며 시민들이 즐겨 찾는 훌륭한 휴식처이다. 길가에는 상인들이 기념 물건들을 판다. 예술적 낭만의 거리이며 베오그라드 역사의 흔적을 전시한 공원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전투의 언덕
생각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다뉴브강과 만나는 곳으로 베오그라드의 모태인 곳이다. 공원 입구 흉상을 보며 조금 걸어가니 꽃과 나무의 고운 화단에 가슴은 앞으로, 두 손은 뒤로 뻗은 우람한 여인의 조각상이 돌탑 위에 높이 세워져 있다.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비석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시 오스트리아, 독일과 전쟁에서 이 나라에 군사와 물자의 큰 도움을 준 나라다. 1차대전 후 프랑스 여인들이 세르비아 전쟁고아들을 돌봐 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건립되었다. 뒷부분에는 '1914~1918년 사이 프랑스가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프랑스를 사랑합니다'라는 글과 여인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꽃과 나무단장이 우아하고 예술적이다. 예전에는 요새였으나 지금은 요새 주변이 모두 시민들의 휴식공간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투의 언덕은 베오그라드 시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산책 코스인 칼레메그단 공원에 있는 오롯한 한 부분이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 요새
전쟁의 언덕에서 성문을 따라 들어가니 성벽으로 견고하게 쌓여진 성채가 있다. 사바강과 도나우강의 합류지점인 높이 125.5m 지대의 바위산 위에 세워진 성채다. 칼레메그단 요새는 4세기경 세운 고대 요새다.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요지로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전투 준비하던 장소였다. 칼레메그단의 의미는 언덕이란 뜻의 칼레kale와 전쟁이란 뜻의 메그단megdan의 터키어다. 동로마 시절에 축성된 로마의 요새였으나, 현재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공원으로 사용한다. 19세기 초 두 차례 대오스만 항전(1804~1813년, 1815~1818년)에서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비극의 현장이어서 세르비아의 민족적 자존심이 서린 성지로 여긴다.
베오그라드 이름도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쌓을 때 돌의 색깔이 흰색beli이어서 멀리서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도시를 의미하는 grad를 합해 '흰색도시Belgrad'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베오그라드는 하얀 성채란 뜻의 도시로 이 요새 내에서 마을이 형성되고 이 요새를 중심으로 발전된 곳이기 때문에 이 칼레메그단은 베오그라드의 모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재건축을 하면서 복원한 성은 붉은 벽돌색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얀 도시라는 이름이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성채 안 전쟁기념관에는 고대와 중세, 근세, 현대에 이르는 전쟁에 관한, 로마시대부터 터키, 오스트리아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전시되어 있다. 초등학생들이 입장하려고 길게 줄 서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 요새 군사 박물관
칼레메그단 요새로 들어가는 성벽 문 쪽으로 갔다. 시계탑을 지나가면 두 번째 문이 나오며, 그 문을 빠져나오면 성벽과 성벽 사이에 제1,2차 세계대전 때 쓰였던 대포를 비롯해서 4만여 점의 각종 무기와 총기들을 전시하고 있는 야외 군사박물관이 있다. 제1,2차 대전에 사용한 무기다. 야외 군사박물관은 성 주위에 탱크와 대포 등 많은 전쟁무기와 감옥을 전시하여 숱한 전쟁을 치른 민족의 전쟁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다뉴브강과 사바강의 합류점
군사 박물관을 보고 또 하나의 성문을 나서자 강변에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비둘기를 든 남자의 동상이 높이 솟아 있다.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자의 탑이다. 전쟁을 의미하는 칼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들고 있는 이 승리자의 탑은 베오그라드의 상징이다. 앞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서 있는 나신의 이 동상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는데 벌거벗은 남자의 심벌이 너무 적나라하여 보수층의 반대로 이곳에 옮겨져 사람이 잘 볼 수 없는 강 쪽을 바라보도록 세우게 되었단다.
주변은 아름다운 두 개의 강과 드넓은 평원의 비경이 전개된다. 숲으로 둘러싸인 두 강 줄기가 합류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도나우강, 왼쪽으로 흐르는 강이 사바강인데 두 강이 이곳에서 하나로 합해져 흐르고 있다. 아래로는 강변 산책로 있고, 강 건너에는 숲 물결 사이로 베오그라드 신시가지가 보인다. 그 시가지 중심에 우뚝 솟은 유리 건물이 구공산당 본부였었는데 나토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던 것을 수리하여 현재는 상사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유구한 역사의 볼거리들이 다 파괴되었지만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높이 솟아 있는 베오그라드 성채가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버티고 서 있다. 연구소 건물과 칼레메그단 요새 축소판상도 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사바 정교회
성인 사바를 기리기 위해, 사바의 뼈로 지은 초대 정교회다. 사바는 13세기 초 세르비아 왕국의 성직자다. 벨리코투르노보에서 사망하여 그곳 수도원에 묻혔다가 터키가 정복하자 그의 유해를 파 내버렸다. 네만야Nemanya 왕조의 왕자였는데 종교 관심이 커서 성직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개종한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베오그라드 어디에서나 다 보인다. 193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공산당 시절에는 중단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건설 중이다. 의자가 없는 정교회의 내부는 건설 중으로 철조물이 얽혀 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계속 짓고 있다. 완공되면 12000명 동시수용 가능한 세계 최대 정교회가 될 거란다. 동서 90m, 남북m로 외형으로도 큰 교회다. 초록색 돔 지붕과 금빛 십자가, 하얀 교회 건물이 넓은 폭으로 베오그라드의 어머니처럼 앉아있다. 교회 앞에서는 분수가 솟구친다.
이 주변은 항상 교통이 붐비는 곳이다. 세르비아의 교육제도는 8.4학제로 고교까지 무상이다. 대학제도는 1학기 등록금이 1천 유로, 150만원 정도다. 진학은 수능과 내신이 없이 수월하다.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목만 2~4과목 시험 치른다. 진학은 쉽지만 졸업은 어렵다. 4년에 졸업하면 수재다. 보통 5~9년만에 졸업하다. 논문이 어려워서 정신과 진료자 많단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 못한다. 취직해도 초급이 250유로다. 시내 근무자 평균 월급이 350유로다. 취업 후 결혼해도 집 못 구하여 3대가 함께 거주하기도 한다. 집세가 월150유로다. 젊은이들은 서유럽 진출이 꿈이다. 하지만 임산부 의료가 무상이다. 집세도 안 드는 사람도 있다. 공산시절 받은 집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떠날 시간이다. 발칸의 역사와 현실을 참 많이 배우고 간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출발
오후 5시 고운 도시를 떠난다. GNP 8천불인 세르비아다. 2010년엔 7500불이었다. 가난하지만 거리 표정은 밝은 편이다. 도심을 벗어나 구시가지 붉은 기와지붕 물결을 보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를 작별한다.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로 가는 길인데 오늘은 가는 도중에 있는 세르비아의 도시 니쉬에서 유숙한다. 해바라기 밭, 옥수수밭, 사과나무 과수원 등 평화로운 정경이 광활한 들녘을 채우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발칸의 청명한 하늘이 여정을 축복하고 있다.
* 세르비아 휴게소
푸른 하늘에 석양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파란 잔디밭이 아름다운 휴게소다. 민들레꽃 홀씨가 우리나라와 동일하여 정겹다. 휴게소 주변에는 나무와 옥수수밭이 많다. 여기서 니쉬NIS 호텔까지는 1시간 30분 소요된다.
* 세르비아 니쉬 도착
휴게소를 떠나 니쉬로 달리는 들녘에는 여문 옥수수밭의 노란 잎이 황금물결이다. 먹기도 하고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하는 발칸의 큰 농작물이다. 산길로 접어들자 하늘에는 낮달이 곱게 떠 있다. 해는 져서 점점 어두워지고 산줄기와 평원에 발칸의 일몰이 장관이다. 니쉬는 인구 30만명의 세르비아 도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나고 자란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담배산업이 발달된 도시다. 내일은 모닝콜 5시, 조식 6시30분, 출발 7시 30분이다. 세르비아 니쉬에서 마케도니아 국경선 통과까지 3시간 소요된다. 그래서 내일 아침은 좀 서둘러야 한다. 내일은 또 오늘의 2배 도보여행이다. 발칸은 관광개발시설이 아직 미비해서 그렇다. 하지만 좁은 도로를 따라 걸으며 발칸을 가슴에 심는 일은 발칸 여정의 큰 매력이다.
2011년 9월 11일 일요일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 세르비아 니쉬 호텔 출발
고운 언덕 마을의 호텔이다. 참으로 예쁜 마을이다.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비경이다. 호텔 위에 정교회를 장식해 두었다. 호텔 밖으로 나가 마을을 산책하는데 집 앞에 난로용 장작을 쌓아 놓았다. 새벽 고양이가 그 곁을 지나간다. 영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런 낭만의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가는 길
이곳 세르비아 니쉬에서 3시간을 가면 마케도나아 국경선이다. 30분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마케도니아 스코프예에서 오전 11시 30분에 마케드니아 교민 가이드를 미팅한다. 그때까지 테레사 수녀 수도원 기념관을 관람할 것이다. 여전히 들녘은 옥수수밭이 장관이다. 올리브 나무도 많다. 더러는 채소 농사도 짓는다. 발칸의 들녘은 나라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옥수수밭과 같은 아주 비슷한 풍경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