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만난 사람들
전환기, 성인기 발달장애인의 자조모임을 지원하고 있고, 발달장애인이 자기결정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15세 발달장애인의 부모 성명진입니다.
사회적 모델과 자립생활에 근거한 지역사회서비스, 지역 사회 거주시설 서비스 등을 찾아보면서 조금씩 배워가고 궁금함이 더해지던 차에 지난 7월 한국장애인재단 연수교류사업인 “영국의 서비스 현금지급과 개인예산 제도* 탐방”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옹호와 지원을 통해 발달장애인 당사자 욕구에 기반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인 멘캡(MENCAP), 개인예산제도를 태동한 민간단체로 발달장애인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자기주도지원방식을 정책으로 구현해나가고 있는 인콘트롤(In Control), 발달장애인을 위한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연구와 출판, 교육 등을 진행하는 빌드(BILD) 등 발달장애인을 지원하고 있는 여러 기관과 단체들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 저는 단체나 기관에 대한 설명 대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개인예산제도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만큼의 예산이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지방정부가 개인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개인은 그 금액에 대해 얼마나 많은 통제권을 갖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제도
-출처: 『장애인중심 사회서비스 정책과 실천』(존 글래스비, 로즈마리 리틀차일드 엮음/김용득, 이동석 옮김/한국장애인재단·올벼 펴냄)
인콘트롤이 추구하는 메시지는 당사자의 욕구, 당사자의 목소리, 사람 중심의 지원체계입니다.
개인예산제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저희를 방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산보다 정보제공 등을 통하여 당사자가 동기화되어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 그 자체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돈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고 스스로 동기화함으로써 이해관계자들의 가치와 인식(inspiration)을 변화하기 위한 것을 목적에 둡니다. 삶의 이유나 동기가 없을 경우 다시 시설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산이 아니라 문화적 변화(사회적 인식 변화)입니다.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전문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역동이 변화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일상적인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경험하고자 하는 것을 누리며, 한명의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에게 수혜적으로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지원하는 것, 지역사회의 동등한 시민임을 강조하는 모델이 바로 개인예산제도입니다.
- 앤(Ann), 인컨트롤 담당자
△ 인콘트롤(In Control)의 CI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개인예산제도와 자원분배시스템(resource allocation system)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인콘트롤은 발달장애인의 인권에 기반한 삶을 꿈꾸며 전국적으로 서비스 전달체계와 방식을 바꾸어 왔습니다. 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콘트롤의 동력은 아마도 이러한 당사자 중심의 관점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빌드(BILD)에서는 개인예산제도를 이용하고 있는 발달장애인 당사자 케이트(Kate Brackley)와 제임스(James Cooper)의 어머니 발표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개인예산제도를 이용하기 전의 삶과 이용한 후의 삶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셨는데, 연수 일정 중에 가장 마음이 동하는 경험을 안겨준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임스의 어머니는 개인예산제도를 이용하기 전까지 25년간 직장도 다닐 수 없었고 세금도 낼 수 없었으며 그저 아들의 활동보조인으로 살아왔다고 밝혔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신체장애, 발달장애를 중복으로 갖고 있는 자녀의 자립이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대한 믿음, 사회에 대한 믿음, 국가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나의 자녀)에게도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제 아들이기 전에 제임스 쿠퍼입니다.
그리고 저는 활동보조인이 아니라 그냥 엄마로 살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은 어떤 공무원, 어떤 전문가의 말보다 마음이 동하는 울림을 주었고, 사람들의 뼛속 깊은 곳으로 무언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도, 가족도 일상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제임스 쿠퍼 씨의 어머니와 함께 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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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의 자기주도적인 삶을 위하여
사회에서 자기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조차 부정되는 취약한 계층인 발달장애인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옹호집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보호요인(protect factor)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는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이 함께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공감대를 의식하기 보다는 정말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기를 원합니다. 다만 서비스 총량의 확대가 우선이라고 요구한다면 정책이나 제도의 변화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예산 범위 안에서 발달장애인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제공하게 만들고, 경험이 선택과 통제의 변화를 발생시키고, 발달장애인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서비스 총량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개인예산제도에 관한 문헌을 읽어보면서 들었던 직관적 느낌은 현금을 지원해 주는 것이라 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수를 통하여 알게 된 개인예산제도는 ‘사람’에 대한 지원이었습니다. 신체장애인은 편의시설과 활동보조만으로도 자립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0인 100색의 발달장애인은 편의제공이나 활동보조와 같은 사회서비스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개인예산제도에서 현금은 발달장애인이 시민으로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이었을 뿐이고, 목적은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었습니다.
그저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온 저는 정책도, 법도 잘 모르지만 제도의 변화나 개혁은 절실함과 진솔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는 사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만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함께 이뤄가야 하기에 연수 후 두려움과 걱정이 더 앞서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엄마이자 옹호가로서 향후 발달장애인이 획일화된 서비스가 아니라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현금을 지급하는 형식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엄성을 가치로 여기며, 함께 연대하여 지원을 권리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권리가 꽃피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글은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장애인 삶과 노동'에 실린 글을 재구성 편집한 것입니다. (필자 주)
글 | 성명진
발달장애가 있는 14세 아들 씨의 엄마.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자기결정 프로그램, 자조모임을 지원하는 조력자'라는 자신의 프로필을 가장 좋아한다. 현재 국제아동인권센터(In CRC) 아동권리옹호가(Child Rights Advocate: CRA) 연구원 및 강사이자 서울장애인인권부모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출처http://www.broso.or.kr/eletter/view.jsp?brdNum=1277&readCnt=1&brdMenuSel=EM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