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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수정봉을 산행하고 법주사에 내려섰다. <☞ 속리산 수정봉>
법주사는 신라 성덕왕 때 중수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석물도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중수했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법주사(法住寺)라는 이름은 ‘부처님의 법(法, 불경, 불법)이 머무는(住) 절’이란 뜻.
경내에는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등이 있고, 다수의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으며, 주위에 크고 작은 암자가 있다.
☞ 지난 문장대-경업대-태봉(순조태실)을 산행하고 찾은 법주사
법주사<네이버 지도>.
법주사 사찰 안내 팜플렛. 1)대웅보전, 2)삼존대불, 3)신법천문도병풍, 4)금동미륵대불, 5)미륵반가사유상, 6)팔상전(국보 제55호).
1)원통보전, 2)목조관음보살좌상, 3)석연지(국보제64호), 4)사천왕문. 5)마애여래의상, 6)철확, 7)괘불탱화. 8)보은 법주사 동종,
9)세존사리탑, 10) 희견보살상, 11)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12)사천왕석등.
약 4km(2시간 40분)의 수정봉을 산행하고 내려서는 곳.
'금동미륵대불' 뒷편이다.
그곳에 '미륵불상조성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39년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됐다.
절마당으로 내려서니 전각(능인전) 뒷편에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세존사리탑'이다.
전각안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992년에 조성된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있다.
뒤쪽에 세존사리탑이 자리하고 있어 건물 뒷면의 가운데 부분은 건물 안에서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유리창으로 만들었다.
적멸보궁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인데, 다만 16나한상을 봉안하였으므로, 나한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익공 형식의 장식은 2개의 앙서(仰舌) 중앙에 서로 다른 모습의 연꽃 장식을 위아래로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대체로 조선 후기에서 나타난다. 지금의 건물은 여러 시기에 걸친 모습을 담고 있다.<자료>
‘보은 법주사 능인전(報恩法住寺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능인(能仁)’은 석가모니불의 별칭으로,‘능히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연히 조선시대 이전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로 조성되었고,
앞면 3칸·옆면 2칸(약 9평 규모)의 전형적인 부불전(副佛殿)으로, 받침돌과 주춧돌 등은 제법 오래되어 보인다.
특히 앞면 모서리 기둥 아래의 주춧돌은 연꽃 조각과 함께 8각의 주좌(柱座) 조각을 새겨 매우 화려한 장식을 나타내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받침은 장대석을 2층으로 쌓았는데, 가운데에 계단을 놓았다.
기둥은 둥근 기둥이고, 기둥 위의 공포는 앞면과 뒷면에 2익공(翼工)의 익공계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공포 사이에는 장식성이 강한 화반(花盤)을 두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며, 안팎에도 금단청을 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법주사를 중건할 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9)이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내판.
병풍을 친 듯한 암벽을 따랐더니...
이름을 새긴 듯 각자가 빼곡하다.
그 아래 동굴을 이룬 곳 정면으로 선명한 윤곽의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고, 그 좌측 측면 이끼낀 암벽에도 희미한 윤곽의 마애불이 보인다.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은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불상이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안내판.
암벽에 새겨진 3佛.
마애불을 지나 수정암 입구에 있는 별도의 부도밭에는 부도 2기와 비석 4기가 있다.
부도는 금오(1896~1968) 스님과 석상 스님의 부도.
좌측에 '대종사석상지탑(大宗師石霜之塔)'과 우측에 '금오당태전지탑(金烏堂太田之塔)'.
비석의 맨 우측에 '금오대종사부도비'가 있다.
절마당 한복판 비각안에 '보은 법주사 석련지'가 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 法住寺 石蓮池, 국보 제64호)’는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연못.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용화보전(법당)이 있을 때 정면에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 세계 연화지를 상징하며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다. 석조물 여기저기에 꽃·구름·덩굴 등의 무늬를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높이는 1.95m.
보은 법주사 석련지 안내판.
석련지 옆에 우뚝하게 세워져 있는 철기둥은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법주사에는 원래 진표율사가 세운 철제 당간이 있었지만 1866년께 당백전을 만들 때 조정에서 뜯어가는 통에 사라졌던 것을 후세에 복원해 놓은 것.
당간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교유적으로 깃발을 의미한다.
원래는 절밖에 세워 부처가 있는 신성한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였으나 법주사가 확장하면서 경내로 들어오게 됐다.
당간은 종파를 구분하는 깃발을 걸거나 절에서 열리는 행사를 알리는 게양대 역할을 하던 시설로 철당간 외에 나무당간·돌당간 등이 있는데 철당간은 안성 칠장사, 갑사 등 전국에 4개만 남아 있다.
안내판
천왕문.
'보은 법주사 팔상전(報恩 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 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전은 1968년 해체보수 때 부처의 사리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리함이 나오면서 이 건물이 탑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그때 나온 사리함은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건물에는 심주의 4면에 각 2폭씩 8폭의 팔상도가 있고 그 앞으로 4면에 열반상을 포함한 삼존불상을 각각 배치했으며 이어서 3열로 천불상을 봉안했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 안내판.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통일신라 시대의 쌍사자석등이 있다. 높이가 3.3m가량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8각 석등인데 국보로 지정됐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구보 제5호)'은 일반형 석등의 간석 부분을 8각기둥 대신 쌍사자로 변화를 준 이형석등이며, 쌍사자석등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하대석과 간석을 대신한 쌍사자와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얹힌 8각의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 화창이 있고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자료>
안내판.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報恩法住寺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은 단면이 8각인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며, 화사석(火舍石)에 균열이 조금 나 있지만,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안내판.
‘법주사 진영각(法住寺眞影閣)’.
진영각(眞影閣)은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곳으로 조사각(祖師閣)이라고도 한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호영 스님의 법주사 전경도에 당시 영자전(影子殿)이라 불렀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진영각은 1991년에 새로 지었으며, 정면 7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명부전·삼성각과 나란히 서 있다.
진영각 안에는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 조사와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
옆문에서 무릅을 꿇은 뒤 합장.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안내판.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이다.
정면·측면 각 3칸 맞배지붕의 법주사 명부전(法住寺冥府殿).
조선 중기까지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이 있었으나 18세기와 20세기 초에 사라졌으며, 현재의 명부전은 2003년에 건립된 것이다.
법주사는 지장보살과 관련 깊은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법주사를 중창한 진표 율사가 지장보살에게서 정계(淨戒)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무독귀왕이 있고, 좌우에 각각 5구의 시왕상이 있다.
법주사 범종각(法住寺梵鐘閣)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76년 종무소를 허문 자리에 지었다.
범종각안에는 ‘불전사물(佛前四物)’이 있다.
불전사물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한 범종(梵鍾), 날개 달린 짐승을 위한 운판(雲板), 네 발 달린 짐승을 위한 법고(法鼓), 물 속에 사는 생명을 위한 목어(木魚)를 말한다.
낙관엔 雲浦(운포).
운포 정병철(丁炳哲) 선생은 전남 순천 출신의 서예가로 운포서예연구원원장이며 수필가.
법주사를 돌아 나오며 금동미륵대불 뒤로 수정봉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살짝 당겨보며 거북바위가 있는 너럭바위를 짚어도 본다.
네모난 돌구시인 '보은 법주사 석조(石槽)'는 유형문화재 제 70호.
안내판.
금강문을 나서며 돌아보니 주련은...
擁護聖衆滿虛空옹호성중만허공
都在毫光一道中도재호광일도중
信受佛語當擁護신수불어당옹호
奉行經典永流通봉행경전영유통
현판을 올려다 보았더니 낙관엔 만당(晩堂). 이규환(李圭桓 1858~?)선생으로 자는 공집(公執), 호는 만당(晩堂)이다.
금강문 안으로 보는 천왕문.
수정암은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법주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1914년에 비구니 태수(泰守)가 이곳에 머물면서 그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산신각·칠성각·독성각(獨聖閣)과 대선방(大禪房) 수십 칸을 신축하였으며, 1973년에는 극락전(極樂殿)과 진영각(眞影閣)·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수정암 입구에는 1925년 태수의 유골을 모아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비각이 있어 현판을 보았더니...
'속리실기비각(俗離事實記碑閣)'이다.
'보은속리산사실기비(報恩俗離山事實記碑)'는 조선후기 속리산의 내력 등을 기록한 기적비다.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건립시기 1665년(현종 6).
비신 높이 163㎝, 너비 65㎝. 속리산의 내력과 관련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법주사수정교 앞의 보호각 안에 있다.
1665년(현종 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의 내력과 수정봉(水晶峰) 위의 거북바위에 대한 속설(俗說)을 소개하면서 미신의 타파를 주장한 것이다.
당태종이 우리 땅의 정기를 끊기 위해 거북목을 쳤다는 전설이 서린 거북바위.
1653년 효종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천군수 이두양이 거북 머리를 찾아 붙이도록 했고, 1655년 병마절도사 민진익은 거북 등에 놓여 있던 석탑마저 허물어 버렸다.
우암 송시열은 이 이야기를 ‘속리산사실기비’에 상세히 적었다.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안내판.
그 앞에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승려 벽암대사 각성의 탑비인 '보은법주사벽암대사비(報恩法住寺碧岩大師碑 시도유형문화재)가 있다.
벽암대사비 안내판.
속리산 법주사 일원이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세조와 깊은 관련을 맺은 법주사 일원에 세조길이 있다.
문장대 안내판.
속리산 세조길.
화소(火巢).
사전을 찾아보니 산불을 막기 위하여 능(陵)•원(園)•묘(墓)의 해자(垓子) 밖의 초목(草木)을 불살라 버린 곳을 일컫는다.
<例: 금표와 화소 안에 있는 수목을 베어간 사람과 여기에다 묘지를 쓰는 자는 모두 도원릉수목률에 의거하여 처벌한다.>
뒷면엔 하마비.
부도전(浮屠殿).
일주문을 벗어나며...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현판을 올려다 본다.
‘호서(湖西)’는 ‘금강(錦江)’의 서쪽에 위치한 ‘충청남북도’를 일컬을 것.
‘가람(伽藍)’은 승려가 사는 사찰이니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란 충청남북도를 통틀어 가장 큰 사찰이라는 말.
낙관엔 '계묘 춘 벽하(癸卯 春 碧下)'.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3년(계묘년)에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이 쓴 것.
일주문 안쪽에 걸린 또다른 편액은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大'자를 두 개 붙여 놓은 듯.
맨 좌측 '광무6년 임인 4월(光武六年壬寅四月)'과 '중술(重述, 다시 씀)'이라 쓰여져 있어 광무6년(1902년)에 다시 썼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쓴 조주승의 글씨보다 1년이 앞선다.
세조길 게이트를 빠져나와...
매표소를 빠져 나온다. 무료입장이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이 명승61호.
안내판.
처음 올라갔던 산자락 끄트머리에 소형주차장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시설지구를 벗어나 천천히 30여분 만에 속리산터미널에 닿았다.
대형버스는 터미널 안쪽 주차장.
바쁜 일정으로 이제사 때늦은 산행기를 올린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