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에 대하여
중국 본래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하기 위해 근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청말(淸末)에 근대교육 수립에 공헌이 큰 장지동(張之洞)이 그의 저서인 《권학편》(勸學篇)에서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中學爲體西學爲用]. 이러한 교육사조는 중국의 근대학교 설립에 깊은 영향을 미치어 경사대학장정(京師大學章程)·진정학당장정(秦定學堂章程) 등에 반영되었다.
청(淸)나라 때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이후 일어난 양무(洋務) 운동의 기본사상.
청왕조 말기 외국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의 기본사상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성과를 도입, 강화해 가는 것으로서 ‘중국의 학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문을 용(用)으로 한다’는 것이 ‘중체서용론’이다.
청일전쟁이 그 빛을 잃은 이후에도 장지동(張之洞)은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당시의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비판한 《권학편(勸學篇)》을 써서 ‘중체서용론’을 내세워 국민에게 강한 이념을 심어주었다.
이 논리를 한국에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으로 표현했다.
"중국 것을 모체로 하되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사용하자는 것."
동도서기(東道西器)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1880년에 들어와 동도서기론은 한층 체계화되고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88년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어 감에 따라 당대 지식인들은 양왜를 배격하는 일파(위정척사파)와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일파(온건개화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항로,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양왜배격론이 우세하였으나 점차로 서양의 기술만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두 유파는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온건개화파가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은 대체적으로 청국에 갔다 온 인사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1872년에 입연(入燕)했던 박규수의 보고, 1873년의 민영목의 "자뢰(資賴)하여 이(利)가 되는 것은 곧 공사기교(기술)이다"라는 결론,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기록된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의 외교정책, 1881년의 일본 시찰단의 구성, 1882년 박기종, 변옥금, 윤선학의 "기(器)는 이로운"것인 즉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등이 모두 동도서기론으로 발전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도서기론은 북학파의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과 맥락이 닿는 논의인데, 근 일백여년 만에 제도적 개혁의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도서기적 사고는 비단 조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서양과학과 기술이 물밀 듯이 밀려오던 17~18세기에 중국인들은 서양 과학이 본래 중국 것이었는데 잠시 서양에 건너갔다가 다시 들어온다는 서학중원(西學中源)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후 서양의 기술(用)을 가지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면서 중국의 가치와 문화(體)를 발전시킨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철학이 나왔다. 이러한 '중체서용'의 일본판이 '화혼양재'(和魂洋才)이고 한국판이 '동도서기'(東道西器)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치, 문화, 세계관을 보존하고 이것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결합시킨다는 생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의 철학은 모두 서양의 과학기술을 기(器), 용(用), 재(才)로 보고 부국강병과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동도서기론은 사상사적 측면에서는 성리학의 이기론적 우위관을 고수함으로써 동양의 정신적 우월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존왕양이를 표방하는 소중화사상인 화이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결국 동도서기론은 전통적 지배질서와 이해관계를 온존시키면서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했던 보수적 개량주의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도서기적 개화논리도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위정척사론자들과 민중의 거센 반반을 일으켰다. 1882년까지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를 주장하던 이들은 대체로 이같은 동도서기론의 논리 위에 서 있다.(진선영)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과 중국이 구미문명과 만났을 때의 기본 입장을 나타내는 말로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에는 그것과 비슷한 말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것이 있다.
먼저 일본의 ‘화혼양재’에 관해서 검토보보자. 일본에서는 이 말에 앞서서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말은 동양과 서양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쿠메의 경우도 동양의 공통점으로서 도덕을 운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동양도덕 서양예술’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이 말이 널리 화자되지 않고 대신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첫째, ‘동양도덕’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동양의 공통점으로 도덕을 지목한다는 것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과거시험을 통해 유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 정치를 담당하는, 그런 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느 사회에서도 나름의 도덕이 존재할 터인데 그런 도덕을 동양의 전매품과 같이 말하는 ‘동양도덕’이라는 구호나 쿠메의 담론 자체가 특수한 일본적 현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은 동양과도 다른 일본의 고유성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동양’을 대신해서 ‘화(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일본의 고유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본에서 ‘화혼양재’가 등장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쿠메는 일본의 고유성으로 기술적 우월성을 강조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서양 예술’이라고 할 때의 예술, 즉 기술과 통하는 것으로, 일본과 구미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쿠메의 입장은 메이지유신 초기에 있어서는 천황의 존재가 아직 뚜렷하지 않았다는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일본의 고유성을 천황의 존재에서 찾는, 1880년대에 와서 분명해지는 상황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國敎’를 일본의 고유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다만 그 국교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덕이가 지적한 그대로 ‘망탄(忘嘆)’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애매한 것이었다. 쿠메처럼 일본과 구미의 공통성을 보려고 하지 않고, 구미, 중국, 한국과도 다른 일본의 고유성을 찾으려면 이런 국교 혼은 국교를 체현한 천황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도덕’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말을 대신해 ‘혼(魂)’이란 실체가 없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구호는 일본의 일국적 정체성 강조함과 동시에 그 정체성의 근거를 애매모호한 데 두게 된 결과였다. 그리고 정체성의 내실이 그렇게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보다 훨씬 쉽게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말은 중국과 구미를 대비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으로, 동양 혹은 동아시아라는 인식의 부재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중체서용(中體西用)’은 ‘중체(中體)’에 대한 깊은 확신도 말해주는데, 그 핵심에는 유교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에 대한 깊은 신뢰는 일본과 달리 충분히 역사적 근거를 가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19세기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연구에서는 장덕이의 이러한 입장은 이른바 양무운동가들의 공통된 입장으로서, 그 한계성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리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변법파와 혁명파가 거론되어 왔는데, 그렇다면 변법파나 혁명파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대신해서 ‘서체서용(西體西用)’을 추구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중역 이후의 중국에서는 ‘중체(中體)’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구호도 ‘화혼쟝재(和魂洋才)’와 마찬가지로 일국적인 입장에서 구미문명에 맞서려고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국 중국에게서 아시아나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세기후반 일본과 중국이 구미문명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관한 이상과 같은 고찰을 전제로 한다면, 21세기 현시점에서 그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의 함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東)’은 동양의 동일 수도 있고 동국 혹은 오동(吾東)이라고 할 때와 같이 조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가령 후자의 경우라도 동양의 ‘도’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조선이라는 뜻이므로 거기에는 당연히 동양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도(道)’가 쿠메처럼 단순히 더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19세기 후반 한국에서 어째서 ‘중(中)’이나 ‘화(和)’가 아닌 ‘동(東)’을 내세우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었는가다. 그것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도(道)’에 대한 깊은 확신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한국을 고유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동양에 속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공동연구의 핵심개념인 ‘유연한 주체성’이라는 것이 19세기 후반에는 일국적인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표어는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표어로서는 약한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필요한 ‘유연한 주체성’은 일국적 정체성을 넘어설 수 있는 ‘매개’적인 정체성이어야 된다. 따라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구호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19세기 후반에 왜 한국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란 태도가 제창되었는지, 그리고 그 태도에 이후 어떤 의미가 부여되면서 전개되었는지, 이런 문제를 구명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