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포하이 6 무(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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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周恩來(저우포하이)](1898~1976)
1. 死不留灰(사불유회) : 사망 후 유골을 남기지 않는다.
2. 生而無後(생이무후) : 살아서 후손을 두지 않는다.
3. 官而無型(관이무형) : 관직에 있었지만 들어내지 않았다.
4 黨而無私(당이무사) : 당을 조직했어도 사 조직은 꾸리지 않았다.
5 勞而不怨(노이불원) : 고생은 했어도 원망하지 않았다.
6 死不留言(사불유언) : 죽어서 유언은 남기지 않아 정치 풍파를 막았다.
중국 정치가. 항일 전이 발발한 후에는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 정부의 국방 위원회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 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문화 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에서 출생하였다.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 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 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 지부(支部)를 창설하였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 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 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 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 구(區)에 들어가 군사부장· 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 공작과
국민당 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에는 국공(國共) 내전의
정지와 항일 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항일 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 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 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 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4월 공산 정권 수립 후 문화 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 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27세 때인 1925년 8월 8일 중국 광둥 성 광저우에서 덩잉차오(鄧穎超)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아내: 덩잉차오(鄧穎超, 1904년 2월 4일 출생 ~ 1992년 7월 11일 사망.
前 중국 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
[출처] 저우포하이의 6 무(1898~1976)|작성자 은하수
*'저우언라이' 가 '저우포하이'로 표기는 맞춤법 검사에서 확인 수정 되었음을 밝힙니다.
<검색창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