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의 수렴동 계곡을 오른다. 짧아서 더욱 애틋한 단풍과 마지막 사랑이 시작되는 구나...! 이때가 아니면 결코 다시 볼 수 없는 가을의 찬연한 아름다움 모두 잊고 날 보러 오라고 선홍빛 단풍이 우리를 손짓 한다, 호젓하게 오라고. 조금은 이른 이 길을 오기위해 우리 일행들은 서둘러 서울을 빠져 나왔고 백담사를 뒤로 한 채 수렴동 계곡으로 오른다.
계곡과 만났다 헤어지는 마음 도타운 오솔길이 일품이다. 사시사철 흐르는 물은 무심하지만 핏빛 단풍과 어우러진 청정옥수에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영혼까지 맑아지는 솔 향을 맡으며 '걷는 행복'이 무엇인지 실감 한다. 한 굽이 돌면 나타나는 계곡,두굽이 돌면 등장하는 설악의 연봉,이렇게 깊은 산중에 이렇게 널따란 계곡이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물감을 풀면 이런 색이 나올까, 에메랄드, 비취, 옥 같은 것을 다 대보아도 수렴동 물빛 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이 동동 떠가는 풍경을 상상 해보라니, 아무리 무심無心한 사람이라도 멍하니 서서 계곡물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잠시 배낭을 풀고 계곡에 주질러 앉아 버렸다. 우리의 이 소나무는 저렇게 말없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말없이 미소를 머금어 주는데 한용운님의 '님 만 님 이 아니고 기룬 것은 다 님이라' 님의 침묵 서문에 나온 글귀가 귓전을 아른 거린다. 오세영님의 '강물'이란 싯귀절을 되 새기며 잠시 오수午睡에 빠져든다.
[소나무]
지는 꽃이 슬퍼서 차라리 꽃피우지 않으련다 떨어지는 낙옆이 슬퍼서 화려하게 물들지 않으련다 둥글 둥글 사는 세상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데 하늘은 외로운 이들의 것 구름은 그리운 이들의 꿈 높이 높이 올라가도 발은 여전히 땅에 있다 겨울 오고 흰눈 덮여도 너는 하늘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