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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5일 화요일 [(백) 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오늘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조상을 기억하며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와 같음을 잊지 말고,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당신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3-15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부르는 설입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는 이미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설을 맞이하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세월에 마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떠오른 해가 어제 떠오른 해와 다르지 않지만, 출발선에 선다는 것은 늘 새로운 활력과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합니다.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여러 가지 다짐을 하며 설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서로 찾아보고, 돌아가신 조상들과 가족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가족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확인하는 명절인 오늘, 그동안 바쁘게 살던 것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몇 시에 오든지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면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이 조금 어색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어야 그 깨어 있음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오심을 기쁘게 기다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해를 나누고, 한 달을 나누고, 한 주를 나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영원의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변함없는 사랑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손을 맞잡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이 설에 서로에게 빌어 주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우리 모두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오늘 두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 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 하셨던 분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않되겠습니다. 찰라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 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 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 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 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위해 그런 노력을 지속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가정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기 6장 24~26절)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형제 사랑이 곧 부모님 사랑
요즘 명절이 돌아오면 이전보다 더 애절한 마음이 듭니다. 아버지의 빈 공간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살인미소로 반겨주시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그나마 제가 유학에서 돌아와서 한 5년은 아버지와 함께 할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그때 여름휴가도 제주도에서 함께 보냈고 처음으로 해외여행도 하셨습니다.
그렇더라도 후회스러운 일이 없지 않습니다. 농담조이긴 했지만 강론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예로 들며 아버지가 죽어야 자녀의 창의력이 발휘된다고 여러 번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들으셨을 리도 없겠고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기에 들으셨어도 뭐라 하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말이 씨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것이 후회됩니다. 그때는 아버지께서 항상 건강하셨기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아버지께서 입원하셨을 때 췌장암이 온 몸에 퍼졌다는 것과 그래서 길어야 삼 개월이라는 말을 해야만 했을 때입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보다는 사제인 제가 말씀드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부모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암 말기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그것이 후회됩니다. 저는 의사가 해 준 말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병원 침상에서 식사를 하시다가 수저를 놓으시고 그냥 누우셨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도 항상 함께 계실 것처럼 생각하며 마구 말하고 다녔던 것이 후회되고, 또 마치 죽을 시간을 의사가 정하는 것처럼 저까지 그것을 믿어버리고 희망 없이 말씀드린 것이 후회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처럼 항상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당신께서 오히려 그들을 위해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항상 깨어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항상 함께 있다고 믿고 사는 삶입니다.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고 믿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도 이런 마음으로 모신다면 돌아가셔도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혼자 사시는 집이 비록 좁고 허술해도 저희 형제들이 다 그 곳으로 모이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사셨던 체취가 배여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셨다고 완전히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아버지께서 저희 가족과 함께 머무시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음 같습니다.
명절 때 저희 집에서는 항상 술잔치가 벌어집니다. 어제도, 그제도 가족끼리 술잔을 기울였고, 오늘은 가족과 함께 아버지 산소에 가서 미사도 하고 성묘도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떠난 분을 위한 예식 같지만 실제로는 그분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계심을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우리 형제들이 우애 있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하는 술자리에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지만 여전히 함께 계신 것처럼 우리 형제들은 즐겁게 술잔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앞에서 깨어있는 자녀들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인으로서는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부모가 가장 바라는 것이 자녀들이 건강하고 우애 있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라면 예수님도 그렇게 바라실 것입니다. 언제 오시더라도 우리 형제들이 주님의 식탁에서 서로 사랑하며 즐거운 모습을 보시면 그분께도 가장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이 명절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처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며 주님 식탁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잔치를 준비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오늘 그분께서 함께 계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즐거울 수 있을 때 그분을 맞을 가장 완전한 준비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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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아가타(Agath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카타니아(Catania)
활동연도 : +249/251년?
같은이름 : 아가다, 아가따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성녀 아가타
‘아가타’라는 이름은 ‘착하고 어질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에 따르면, 아가타는 시칠리아섬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한 아가타는 남자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였다. 권시아누스라는 집정관도 아가타에게 거절당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데치우스 황제가 일으킨 교회박해 때 아가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아가타를 체포하여 끌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아가타는 권시아누스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님, 모든 이의 주님이신 분!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당신은 저의 간절한 열망을 아십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가지소서.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제가 악을 이기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를 바쳤다. 이에 분노한 권시아누스는 아가타의 굳은 신심과 의지를 꺾으려고 ‘아프로디사’라는 여자 포주가 운영하는 사창가로 보냈다. 그러나 아가타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려던 이러한 시도마저 그녀의 굳건한 신앙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아가타는 권시아누스에게 다시 불려가 심문을 당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의 확고한 뜻을 굽히지 않아 감옥에 보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타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자, 권시아누스는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권시아누스는 이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어 내는 아가타를 보고 크게 격분하여 그녀의 젖가슴을 잘라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아가타는 “잔인한 군주여, 내 몸을 이렇게 고문하고도 당신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인인 어머니의 젖을 빨지 않았던가요?” 하고 질책하였다.
권시아누스 집정관은 그녀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면서 어떠한 치료약이나 음식물도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아가타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이 보낸 사도 베드로로부터 가슴의 상처를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
나흘 뒤에 아가타가 다 나은 것을 보고도 권시아누스는 또다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타는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바친 뒤 숨을 거두었다.
아가타가 순교한 뒤에 팔레르모와 카타나 지역에서 그녀를 성녀로 공경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그 관습이 확산되었다. 53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미사 경본에 아가타의 이름이 삽입되었으며, 5세기와 6세기의 [예로니모 순교록]과 고대 [카르타고 순교록]에는 2월 5일에 아가타가 순교한 것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 로마 미사 경본에도 수록되어 전체 교회에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