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이중섭
신옥진
들녘의 황소가 이중섭 소가 아닌 듯
이중섭 소는 시골 소가 아니다.
이중섭 소는 그림 속에 있다.
아니 그림 밖에 있다.
평생 기러기아빠였던 이중섭,
쇠불알 흔들며 뒤돌아보는
슬픈 눈동자의 황소
외로운 손 심연에 묻은 채
성큼성큼 별빛 눈 굴리며 걸어간다
----신옥진 시집, {화가를 그리다}에서
어느 두 사람의 현실주의(사실주의) 화가가 내기를 했다. 한 사람은 캔버스에 나무를 그렸고, 한 사람은 캔버스에 베일(장막)을 그렸다. 첫 번째 화가가 그의 캔버스의 베일을 벗기자 새가 날아와 앉으려고 하다가 그 캔버스에 부딪쳐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를 띠며, “자, 이제는 그대의 베일을 벗겨 보시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나 그 친구의 그림은 베일 그 자체였던 것이고, 따라서 그 베일을 그린 친구가 너무나도 완벽한 ‘한판 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면, 그 그림 속에는 “온통 새소리/ 시냇물소리/ 셀 수 없는 온갖/ 들꽃들의 향내가 범벅된/ 설악산”을 모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 현실주의는 곧바로 김종학이 그 의미를 부여한 설악산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모방하는 동물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오스카 와일드는 ‘자연은 모방하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의 선구자이며, 오스카 와일드는 상징주의자, 즉, 헤겔학파의 후예라고 할 수가 있다. 예술은 자연 그대로의 예술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모든 예술은 인간의 정신(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떤 예술가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 않고, 그 사실을 토대로 하여, 그의 정신(의식)을 드러내게 된다. 신옥진 시인이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보고, “자연 속에/ 또다른/ 자연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나 이중섭의 소 그림을 보고, “들녘의 황소가 이중섭 소가 아닌 듯/ 이중섭 소는 시골 소가 아니다/ 이중섭 소는 그림 속에 있다/ 아니 그림 밖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소는 들녘의 황소도 아니고, 시골의 황소도 아니다. 이중섭의 소는 그림 속의 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소는 그림 밖의 소이기도 하다. 소는 이중섭이 되고, 이중섭은 소가 된다. “평생 기러기아빠였던 이중섭/ 쇠불알 흔들며 뒤돌아보는/ 슬픈 눈동자의 황소/ 외로운 손 심연에 묻은 채/ 성큼성큼 별빛 눈 굴리며 걸어간다.” 소는 영낙없는 이중섭의 자화상인 동시에, 이 소가 우리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대표적 동물임을 상기할 때, 그 소는 우리 한국인들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덩치도 크고 뿔도 있지만, 그러나 그 공격성을 잃어버리고 묵묵히 일만 하는 소, 그토록 어렵고 힘든 고통을 낙으로 알고 그 고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일만 하는 소----, 이 황소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경환 사상의 꽃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