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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순종
창세기 22: 3~8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요19:17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요1:29, 36, 벧전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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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식을 죽여서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좋아하거나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도 고민하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을 받고 나서도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냉혈동물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단순한 인간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에 세뇌된 사람도, 냉혈동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다음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향해 떠납니다. 자식을 죽여야 하는데 아침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3절에서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믿음은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
순종은 ‘결단’입니다. 마음의 결정이 되지 않은 채 따라가다 보면 방황하게 됩니다. 상황이 좋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위기에 부딪히면 방황하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에 결정한 바가 있는 사람은 위기가 와도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이미 ‘결단’이 있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헌신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인간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고민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갑니다. 감당할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사건이지만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명령을 내리든지, 감당할 수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성숙한 믿음입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순종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감당할 수 없고, 손해가 올찌라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만사 형통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어도 모든 일이 다 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나, 실패나, 건강이나, 병든 것이 믿음의 관심이 아닙니다. 믿음은 ‘끝까지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믿음은 정신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 따르는 것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가지면 불가능이 가능해진다고 말합니다. 안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목표가 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아버지로서의 슬픔과 고통과 번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순종앞에서 승화되고 정화되고 새로운 차원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죽은자가 살아나고, 없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3절에서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환이 뒤따라 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환을 데리고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삭은 이미 성숙한 성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이삭이 반항을 한다면 노인인 아브라함쯤은 완력으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이 반항할 것을 대비해서 사환을 데리고 갔을까요?
아니면 삼일 길이 멀기 때문에 도울 수 있는 사환을 데리고 갔을 까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을 때 옆에 두 강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일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번제를 드릴 산으로 두 사환과 함께 걸어갑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드디어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지나서 하나님이 지시한 산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묵상하는 아브라함
삼일이란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이삭과 같이 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그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부인하고픈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1백세에 낳은 자기 아들, 독자이삭을 너무나도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자기 보다 더 사랑했던 자기 아들을 죽여야하는데 아브라함이 냉혈동물처럼 그렇게 비인간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긴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특별히 비행기를 타면 굉장히 지루합니다. 10시간이상 비행기를 타면 화장실을 왔다 갔다하고 밥을 먹어도 지루합니다. 그런데 삼십분 후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방송을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갑자기 피곤이 사라지고 내린다는 기쁨이 생깁니다. 그것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다릅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시간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당황하는 이유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은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삼일동안 아들과는 사랑스럽게 대화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내면에는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죽음의 시간,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1백세에 낳은 아들을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이 아들을 죽여야 한다면 어떻게 죽여야 할까?’등등 그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삼일은 예수님이 무덤에서의 삼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일동안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드디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기쁨도 슬픔도 아니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슬픔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
목적지에 도착해 나귀와 사환들은 거기에 머물렀고 이삭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산으로 가야만 합니다. 5절에서 특이한 사실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면 슬퍼하는 표현은 없고 ‘아이를 데리고 경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아들을 죽이러 가는데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죽이는 척만하고 그저 돌아오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이렇게 해석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으로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칭함받은 자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너는 복의 조상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10년 동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는데도 아이가 잉태하지 않자 아브라함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기까지 흔들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말씀은 좋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몸이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고 사라가 90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깨달은 것은 말씀은 지켜지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늙고 환경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아브라함은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흔들렸지만 이삭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방법, 지식, 이성, 환경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은 변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와 행복하게 살다가 아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삭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나님의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죽이라고 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순종을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이삭을 다시 살려줄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서는 ‘이삭은 다시 산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음이란 내 생각이나 환경, 이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내 정신력이나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지만 결국 약속은 지켜지고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역사의 마지막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겼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악한 권세와 죽음의 권세와, 질병과 절망과 좌절을 꺾으시고 영광가운데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의심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하자 마르다는 태도를 바꾸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만아니라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인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고난이나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승리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는 분이시다’ 라고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백세에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달라고 요구하실 때 아낌없이 줄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포기할 줄 압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크라이막스는 ‘포기’와 ‘순종’입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은 이삭을 데리고 번제하러 가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경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번제’는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배로 승화됩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죽음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건은 우리에게 예배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번제가 예배로 바꿀수 있는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는 내 아들 이삭을 죽이러 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번제는 예배로 바뀌었고 예배는 부활로 바뀐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번제 전에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아브라함은 함께 따라온 사환들과 나귀를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함께 약속의 장소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아들 어깨에 지워 줍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과 같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진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번제로 드려져야할 텐데 그 번제 할 나무를 이삭이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졌고, 이삭은 자기를 태울 나무를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자기 부인으로 가벼워지는 십자가
우리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질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쉬워질 수 있는 비결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거운 이유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고집하면 십자가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면 다른 사람이 살아납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와 가정과 민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져야할 나무를 어깨에 메고 하나님이 약속한 장소로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손에는 불을 지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무서운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아들을 무섭게 하거나 아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불을 가진 모습은 마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은 어떤 언어보다 무서운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을 직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동안 고통을 겪지만 하나님은 몇 천년동안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였지만 아들을 내어준 하나님은 고통하는 마음은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만 어떤 자식도 부모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모두 다 자기가 잘난 줄 압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그렇게 자란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우리가 성장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학교에 등록금을 내기 위해, 고생을 했고, 자존심 상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하며 기다렸는지 아브라함은 삼일동안 경험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깨달을 때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고 겸손해집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드디어 이삭이 입을 엽니다. 이삭은 이미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도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삶도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소원은 이삭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입을 열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아브라함의 대답에는 너무나 깊은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막힌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시간입니다. 이때 이미 아브라함의 눈에는 피눈물이 고였을 것이며 그의 심장은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꼭 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라고 예수님은 땀이 피처럼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은 침묵했지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하며 나아가는 일은 사람이 할 일이지만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십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이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번제할 어린양을 선물로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