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② ‘슐라이어마허 신학’ 싹튼 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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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② ‘슐라이어마허 신학’ 싹튼 할레
독일 계몽주의 한복판서 “종교는 직관과 감정” 현대신학 태동
한겨레신문 입력 2013-01-09 20:16
주정부 건물로 변한 자택은 굳게 잠겨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한 신학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다시 한 번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앞의 경우가 근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면 뒤의 경우는 현대 신학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의 주인공이 마르틴 루터라면 19세기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1768~1834)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할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할레는 비텐베르크에서 6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를 방문한 지 이틀 만에 할레에 들르니 마치 작은 시골 읍에서 대도시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텐베르크의 인구가 5만이 채 안 되는 데 비해 할레의 인구는 23만이 넘는다.
일단 걸어서 슐라이어마허가 살던 집을 찾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이름은커녕 할레를 대표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도 잘 몰랐다. 슐라이어마허는 1804년부터 1807년까지 이 거리의 22번지에 살았다. 1501~1506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그를 기념하는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다. 현재 이 건물은 문화재와 관련된 주정부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19세기까지 주로 지식인들이 살아서 ‘지식인의 거리’라고 불리던 그로세 메르커슈트라세는 이날따라 무척이나 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