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랑의 철학자들 Ⅲ
-창조적 영감으로서의 몽상과 사랑/가스동 바슐라르
가스동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자로 세상을 시인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다. 시인의 눈에는 세상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그런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갇혀 산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영감으로 굳어진 것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다. 바이러스가 코로나처럼 몸을 아프게 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를 틀 속에 집어넣고 꼼작 못하게 하는 것도 바이러스이다. 그는 이런 바이러스에게 백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몽상과 사랑의 철학자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유는 그들이 필요로 하고 지향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전례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변화 없이 답습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그냥 미사 드리는 게 전부다.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 중에 유명한 철학자, 문학자, 과학자, 정치가가 있나?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들 이름만 가톨릭 신자지 가톨릭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때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한 예를 들며 초등학생 꼬마들의 세례식에서 신부님은 죄를 끊어버립니까 하고 물을 때 그 꼬마들은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예, 끊어버립니다.” 하고 답한다. 어린이는 아직 양심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이다. 양심에 위배 되는 게 죄인데 꼬마들은 뭔지도 몰라 아직 죄가 형성되기 전이다. 죄가 없는데 무슨 죄를 끊어버리는가. 차라리 예수님을 사랑하겠어요? 성당에 열심히 나오겠어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겠어요? 라고 묻는 게 더 합당하다.
상징적 관례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랑은 현실에 절실한 것을 요청에 답하는 게 사랑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정치가든, 교육자든, 과학자든, 의사든 그 기저에는 사랑이 본질인데 그 사랑과 동떨어진 게 현실의 삶이다. 가스동 바슐라르는 자수성가의 독특한 사람으로 몽상의 철학자다. 그는 인식론의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의 독창적인 과학적 사유는 인식론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몽상과 상상력의 개념을 통해서 시적 창조성에 심오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했다.
시인은 동일한 사물을 보지만 상상력을 통해서 재현해낸다. 시인이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도 느낀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할 때 보통 사람과 다르다.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상상력에 있다. 존재론적 의미를 붙이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어 끄집어내는 것이다. 상상력도 이미 있는 것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과학에서 물을 표현할 때 기호로 H2O로 나타낸다. 그러나 이게 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게 없다. 그런데 물에 대한 시인의 표현은 ‘물은 생명의 근원’, ‘물은 순수성’, ‘자유로움’으로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란 현실태와 가능태의 합성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가능성을 갖고 있다. 가능성이 없는 존재는 신이다. 시인은 현실에 있는 걸 보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본다. 과학자는 현재 있는 것을 보며 고정시켜 활용하게 만든다. 인식의 변화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게 진짜 인식이며 가스동 바슐라르의 발상으로 그 능력을 몽상이라 한다.
몽상 즉 꿈은 자다가 꾸는 꿈과 희망을 바라는 꿈이 있다. 후자의 꿈은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일 수도 있다. 유럽인들은 상대에게 사랑의 말을 표현 할 때 ‘네 꿈을 이루어줄게’라고 한다. 주어진 대상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 역동적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을 바슐라르는 몽상이라 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뭔가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 그 반대가 매너리즘이다.
현대사회에서 철밥통은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으니 발전이 없다. 그저 살아남으라고 한다. 생존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생존 목적이 없으면 꿈이 없다는 것이다. 그 꿈은 가능성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고 한다. 목적 달성을 말하지만, 실은 재미있게 멋있게 가면 되지 꼭 서울에 가는 게 다가 아니다.
현대 세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승리하라고 한다. 그게 병폐이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켜버리는 잘못된 것이다. 목적은 일종의 동기이며 꼭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는 과정이 중요하지, 목적 달성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부부가 함께 이혼하지 않고 오래 같이 사는 게 중요하지 않고 일 년을 살아도 정말 부부답게 사랑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
무슨 일이든 문제는 해결책에 있다. 그 원인을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시몬 베유는 진짜 사랑은 고통을 직면하는 능력, 아무리 힘들어도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고 했다. 몽상가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수백 개의 이름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알려주어 꿈을 가지게 하는 게 원동력이며 사랑이다.
몽상가의 정신에서 어떤 것에도 갇혀 있지 않은 인간의 본질에 다원주의적인 특성이다. 인간은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이유가 있다. 옥상에 핀 민들레꽃을 보고 자살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지 않은가. 하찮은 꽃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역동성이 있다.
몽상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재를 끊임없이 꿈꾼다. 진짜 과학자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어 기호로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볼 때 무한한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세상 삶의 지옥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독점하고 사람들과 단절하게 되는 것이다. 몽상은 현재의 상태에서 새로운 무엇, 현재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순고한 목적을 가졌다. 몽상적 시인, 과학자, 철학자는 닫힌 사회를 넘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순고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다.
정말 내가 자유로우면서 꿈을 꿀 때 예술적 영감이 나타난다. 신앙도 세속적 모든 것을 비우고 어둠 속에서 명상할 때 마주하는 게 하느님이다. 세상의 많은 것이 들어가 있으면 하느님이 들어갈 틈이 없다. 몽상의 출발점에서 지향점은 사랑이다. 몽상은 음과 양의 일치 곧 사랑이다. 몽상은 비상이고 비상은 곧 사랑이다. 하느님 은총의 불꽃은 우리가 비상하는데 장애물을 태워주며 인간의 마음속에 쓰레기를 태워준다. 사랑하는 사람은 꿈을 가지며 꿈을 꾸는 자는 몽상을 통해서 비상한다.
2024. 07. 22 앞산밑북카페. 제주대학교 철학과 이명곤 교수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