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8]‘페스탈로찌’는 어디에든 있거늘...
저와 20여년 동안 인연이 깊은 대학 교수님이 정년퇴직 직후인 2년 전 모교(중동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모교의 홍복”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화제의 메이커’라고 하면 실례의 말일 터이나, 여기의 ‘화제’는 ‘좋은 일good thing(event)’이라는 뜻임을 알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근 반세기만에 모교의 교육책임자로 오셔 학부모들에게 진심으로 우러난 편지를 해마다 썼다는군요. 오죽했으면 지난해에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을까요?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3/26/FRIHAX7I6VEHTDZDNTKKOE3QWY/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성적은 행복순’이라며 자녀들에게 공부, 공부, 공부만 하라고 채근하지 마시라는 말과 함께 “힘은 긍정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학부모의 아이이니 긍정적으로 바라보라고, 남들이 뭐라해도 학부모의 아이이니 믿어보시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제발 적선하고) 서울대, 서울대, 그 ‘망할 놈의 S대’ 타령을 하며 학교의 존재의미가 마치 거기에만 있는 것처럼 자녀교육의 우선순위를 두지 말라는 것이 줄거리이더군요. 누구나 다 아는 아주 ‘쉬운’ 이야기인데, 왜 화제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사회가, 특히 교육이 온통 비정상적으로 수십년간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아무튼, 그분이 어제 따끈따근한 신간을 보내왔습니다. 『부모, 쉼표』(이명학 지음, 2023년 8월 책폴 펴냄, 211쪽, 17000원)가 그것입니다. 출판사 이름도 재밌습니다. ‘너와 나, 작고 큰 꿈을 안고 책으로 폴짝 빠져드는 순간’을 줄였답니다. 고전古典 고사故事와 성어成語 그리고 수많은 예화例話들을 바탕으로 어느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과 지인들에게 부담없이 편하게 쓴 글들을 모았답니다. “역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새벽 2시반부터 지금껏 통독을 했습니다. 아주 평이한 이야기를, 말하자면 아주 겸손하게 ‘요점만 간단히’ 짚어낸 ‘교육칼럼집’이었습니다. 제가 ‘학부모로서 이 글들을 30-40대 읽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편 한 편 분량이래야 200자 원고지 5-6장, ‘천자칼럼’이라고 해도 되겠더군요. 그분의 다른 저서 두세 권도 그랬지만(『어른이 되어 처음 만나는 한자』, 『한문의 세계』, 『옛 문헌 속의 고구려 사람들』 등), 실감實感이 온몸으로 배어드는 글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한 ‘모교애母校愛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들어보면 한껏 긍지를 가질만한 학교였더군요. 그 모교의 교육책임자 3년 동안, 그분으로선 한국의 중등교육 현주소를 알게 되면서 실망과 애정이 수없이 교차했겠지요. 애증이라고 할까요? 무엇이 문제인지 적확히 파악하고, 진단도 분석도 하면서도 해결방법은 워낙 고질적이어서 난감한 느낌을 편편이 토로하더군요. 자녀를 사랑하는 학부모들도 거개가 100프로 공감할 이야기들입니다. 마음을 새로 하는 실천이 안되는 것이 문제이지요.
글은 심각하면서도 재밌기까지 합니다. 붓글씨에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그분에게 ‘문여기인文如其人’(글이 딱 그사람이다)이라는 조어를 돌려드리고 싶더군요.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사靑史이지 않겠습니까? 언행일치言行一致처럼 중요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노랫말처럼 ‘속 다르고 겉 다른 당신’을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분의 글이 바로 그분의 진면목입니다. 54편의 칼럼을 줄줄줄 읽으면서, 학교 운동장의 유리조각을 환경관리원 복장으로 줍던 ‘교육의 아버지’ 페스탈로찌(1746-1827. 스위스의 교육자, 사상가)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하여, 이 졸문의 제목은 비단 이 교장선생님 뿐만이 아니고 “페스탈로찌는 어디에든 있거늘...”이라고 정했습니다. 어찌 ‘한국의 페스탈로찌’가 이 교장샘뿐만이겠습니까? 참 교육자들은 많고도 많을 것입니다. 이 교장샘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페스탈로찌는 “가정이여, 그대는 도덕의 학교이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 그 다음의 기쁨은 어린이(자녀)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인데, 이 두 가지의 기쁨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는 말씀도 남겼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부모는 아이를 바라보는 즐거움, 이것 말고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는 이보다 더 즐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정이 바로서야 학교도, 나라도 바라설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자녀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자녀들일 것이므로 믿고, 이해하고, 끝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가정이 바로서려면 학부모님들의 ‘교육철학’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침대 머리맡에 놓고, 하루 한 편씩이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전 명구’로 마음수업을 해야 할 소이연所以然이 바로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고전을 왜 ‘내일을 여는 옛길’이라고 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고전은 삶의 진리를 끊임없이 꺼낼 수 있는 보물창고요,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인생의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으로부터 위로도 받고 힘도 내야 합니다. 학교는 학교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선생님은 선생님답게, 학부모는 학부모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우리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방송인 황수경님이 쓴 뒷표지 멘트도 인상적입니다. “한 아이의 엄마로 이 책을 읽으며 후회와 반성을 많이 했다”면서 “지금 부모로서의 고민이 많은 모든 분들게 꼭 권해드리고 싶다”고 하는군요. 왜냐하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야 이제 화석化石이 되었지만, 학부모와 학생들은 언제나 숨고르기와 휴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구절마다 지혜와 위로, 응원의 울림이 크다는 것을 금세 느끼실 것입니다. 책 읽는 내내 하나 밖에 없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덟 살 손자를 생각했습니다. 하하. 강추!
후기: 이 선생님은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2012년 'SBS 100대 좋은 대학 강의상'을 받았으며, 대학교수로서 유일하게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을 수상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제 큰아들의 주례를 서주시기도 했지요. 그 인연으로 북리뷰를 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교육자의 길을 걷는 진짜 참교육자이기 때문입니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