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75
4월29일[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부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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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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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lQlFWs38U8
(최남식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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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거룩함에 대한 갈증,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심을 굳게 믿고, 그들을 왕처럼 섬기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 경당에 가면, 십자가 아래, 다음의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목마르다.”(요한 복음 19장 28절)
십자가상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은 ‘이 사람이 탈수 현상으로 인해 목이 엄청 마른가 보다.’ 하며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예수님 입에 대어드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진의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느낀 갈증은 가련한 우리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얻고 구원하려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갈증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고 감미로운 사랑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나머지 예수님께서 내뱉으신 말씀이 “목마르다.”였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 복음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육적인 삶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특히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 그리고 당신의 몸과 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졌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이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단1도 없이 그저 육적으로만, 동물적으로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 말씀을 듣기가 정말 거북하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들, 그저 하루하루 육체에만,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에만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최후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고 꿰뚫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갈증,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것 그 너머의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파악한 사람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나 또 다른 세상에서나 주님으로 인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시몬 베드로의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6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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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깊은 우물 속의 차가운 물처럼 시원한 말씀이 될수도 있습니다.
마치 번개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정수리부터 발끝을 통과하며 우리를 전율케하고, 깨우치게 하며 새 삶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은 ‘듣기 너무 거북한 말씀’, ‘걸림돌이 되는 말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의혹하고 불신하며, 결국 꼬투리 잡고, 그 결과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놀랍게도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습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입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6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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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FnKWbPaN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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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특징>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북하여 그분을 다 떠나갑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도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분 곁에 머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유다인들은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도 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요? 또 사도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사람을 내적인 인간이라 하고 육적인 사람을 외적인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인간은 영혼을 살리려는 사람이고 육적인 인간은 육체를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관심사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살리려고 하면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그리고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이 나뉘게 되는 방식은 아버지의 이끄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 이사악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종을 보내십니다. 그 종들을 통해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된 이들을 아버지는 아드님과의 결합으로 초대하십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을 시켜 레베카를 이사악에게 인도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영적인 인간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되는 순간을 ‘회개’라고 합니다. 육적인 인간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합니다. 삼구는 우리 육체를 살리기 위한 생존 욕구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의 욕구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살리는 욕구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나의 육체가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구가 아닌 십자가 사랑이 행복임을 알게 된 이들의 특징은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맛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내적인 인간인 영혼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됩니다. 그러니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 구약에서는 에제키엘이 말씀을 받아먹는데 입에 꿀처럼 달다고 말합니다.(에제 3,3), 또한 요한 묵시록에서도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요한 10,10)라고 나옵니다. 두루마리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영적 인간은 그 말씀을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깁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며 자기 능력을 철저히 믿고 승리만 거듭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한 그의 평가는 잔인한 숙청자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하는 불법은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콜슨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서 증언해야 했으며,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1974년 콜슨은 방해 공작과 폭로된 정보를 이용한 국가 기밀 유출에 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굳세게 믿어왔던 그에게 이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한 친구가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책을 주며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만 믿던 그가 비로소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콜슨은 이 책을 읽고 신앙은 받아들였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딸이 증언하듯이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콜슨은 석방된 후, 복지와 교정 시스템에 대한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그의 가장 중요한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1976년 ‘프리즌 펠로우십’라는 이름의 기관을 만들어 수감자들의 교화에 힘을 썼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만나고 부시 대통령에게서 영예로운 상도 받는 등의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믿을 때는 보이지 않던 성경 말씀을 “들고 읽어라!”라고 하는 목소리에 읽게 되었고 그렇게 삶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회개 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어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말씀들을 마치 입에 단 꿀처럼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흥미롭지 않은 이유는 아직 회개하지 않고 육적인 인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거북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성체를 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육적인 인간은 하느님이 살 영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회개했는지 아닌지는 주님께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을 맛있어하지 않는다면 당신께 회개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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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우리 문화와 유적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저도 즐겨 읽었습니다. 최근에 내 고향 서울 이야기라는 주제로 11번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세검정 성당에 있었기에 유홍준 선생님의 고향 이야기가 더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옥인동, 통의동, 자하문, 궁정동, 효자동은 저도 자주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저는 전라북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서울로 왔습니다. 저는 봉천동에서 살았습니다. 봉천동 주변에는 낙성대와 관악산이 있습니다. 관악산에는 서울대학교가 들어오면서 큰 길이 생겼습니다. 상도동을 넘어 동작동으로 가면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어릴 때 그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저는 7살에 봉천동에 와서 사제서품을 받았던 29살까지 살았으니 22년을 살았습니다. 제 삶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저는 봉천동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였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당친구들과 어울렸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995년 처음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8일에 시작해서 어제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유홍준 선생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썼다면 저는 ‘나의 성지순례 답사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자렛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나자렛 예수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에는 각 나라에서 보내온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서 아인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가 만났습니다. 성 요셉과 성모님은 베들레헴으로 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태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순례해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의 문에는 성지순례의 자세를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세례터에서 세례갱신 예식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영, 혼, 육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셨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순례 중에 ‘광야’를 체험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도시라는 광야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쁜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에서 혼인잔치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가 사는 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승천 경당, 주님의 기도 경당, 주님의 눈물 성당, 겟세마니 성당, 베드로의 눈물 성당, 성모님의 영면 성당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곳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조롱과 야유가 있었습니다. 모욕과 가시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걱정에서 기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처럼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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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60ㄴ-68: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힘들어한다. 결국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고 더는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투덜거리는 것을 아시고 구원을 주는 것은 성령이시라고 “영은 생명을 준다.” 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영은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가르침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육은 그들이 이해했던 살점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며, 그 육도 영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영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변덕스러운 쭉정이 같은 믿음은 유혹이라는 돌풍이 불 때마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 주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느낀 제자 일부는 그분께 등을 돌렸다. 그러나 많은 제자는 그 때문에 그분을 따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쉽게 신앙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67절) 이 말씀은 그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주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이라 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이 말은 떠나간 제자들처럼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끝없는 생명으로 데려다줄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앉아 그분을 유일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우리는 알기 위해 믿는다. 먼저 알고 난 다음 믿으려 했다면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알게 되었는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 분이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남겨주신 성체를 열심히 영하여야 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며, 우리 인간을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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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으로 생명의 빵에 관한 사건과 담화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빵에 관한 담화를 들은 제자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일부 제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생명의 빵’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군중이 수군거렸던 듯이(6,41 참조),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반면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곁에 머물고자 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는 이유를 밝힙니다. 먼저, 예수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말씀’은 ‘영’과 함께 생명을 주는 요소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이는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맺는 유일무이한 결속 관계(3,2; 5,19; 10,30 참조) 또는 하느님께 속한 예수님의 신적 신분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원천이시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부류의 제자들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를 거부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들을 구분 짓는 요소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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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많은 유다인이 생명의 빵과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거북하고, 따를 수 없다며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유다인들뿐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따라나선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환호하던 이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하시자 그만 돌아서고 맙니다.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영과 육의 대비를 보면서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사람의 마음 안에는 흙으로 빚어진 육에서 나온, 더 받고 싶은 마음, 곧 탐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숨에서 나온 하느님의 마음, 더 내어 주고 싶은 마음, 곧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탐욕으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 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옵니다. 이 고통과 죽음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십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아드님께서는 아파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어 아버지께 건너가시게 되자 그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더 받고 싶은 마음, 탐욕이 고통과 죽음을 들여왔다면, 목숨까지 내어주는 그 마음, 사랑이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살게 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내어주는 사랑 앞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고단한 사랑의 길이다. 나와 함께 이 고통의 길을 걷겠느냐? 아니면 떠나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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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과 하나 되어 기적을 행하는 베드로>
교회는 유대인과의 마찰이 어느 정도 해소됨으로써 안정을 찾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리따에서 8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있던 에네아를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시킨다. 또한 요빠에서 죽었던 여신도 다비타를 소생시킨다. 베드로가 보인 치유와 죽은 이를 소생시킨 기적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징표이며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을 믿는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났던 것이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을 보면, 에네아의 중풍을 고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를 치유한다. 그런데 다비타를 소생시킬 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여 소생시킨다.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실 때처럼(마르 5,40) 사람들을 방에서 다 내보낸 후, 예수님께서 “소녀야, 어서 일어나라.”(마르 5,41)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한다. 베드로가 깨어난 다비타를 일으키는 모습 역시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킬 때와 비슷하다.(마르 5,41) 이를 통하여 우리는 베드로가 시간이 흐를수록 주님과 더욱더 하나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을 때까지는 악령 하나도 제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마르 9,18)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지 않고 믿음이 부족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다.(마르 9,29; 마태 17,20)
예수님의 으뜸 제자이며,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주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는 겁 많고 나약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예수님과 멀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온전히 변하였다. 자기들을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물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사도 5,41)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치유한다. 베드로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베드로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베드로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함으로써 다비타를 소생시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할 수 있을 만큼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라는 말씀대로 베드로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안에서 사시고,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안에서 행하시는 삶을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주님과 하나가 된 천국의 삶을 지상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락방에서부터 함께 기도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며, 주님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도와 믿음은 이처럼 사람을 겁 많고 나약하며 비겁한 사람을 용기 있는 사람으로, 능력 없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주님과 먼 사람을 주님과 하나 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기도와 믿음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의 능력을 행하며, 주님을 선포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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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는 표징을 통하여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상한 기적을 베푸는 표징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표징의 뜻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다가 떠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서 주님의 ‘빵에 대한 가르침’은 큰 분수령을 이룹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연결해서 ‘살과 피’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고 떠납니다.
성경본문은 이런 정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복음 6장 60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 그들에게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요한 복음 6장 65절)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변함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을 때 사도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6장 68절-69절)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을 직접 뵙고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떠난다면 당연히 오늘을 사는 우리도 신앙의 갈등이 있지 않을까요?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소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은혜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스승과 관련된 무덤, 시체, 못 자국에 묶여 부활을 뛰어넘는 데에는 실망과 함께 시간이 걸렸지만 성령강림을 통하여 스승의 부활을 깨닫고 믿음이 견고해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리따>에 내려가서 팔 년 동안 중풍에 걸려 누워있는 <애네아스>라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또한 <야포>에서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하던 <토르카스라고 불리는 타비타>가 죽었는데 베드로는 그녀를 말씀 한 마디로 또한 죽음으로부터 살립니다.
스승과 일치하는 제자들은 스승처럼 복음선포 뿐 아니라 병자치유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사도들은 열심히 복음선포와 함께 치유 활동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신자의 숫자가 늘어납니다.(사도행전 9장 31절)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항상 복음 정신으로 한결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이 주님의 말씀에 불평을 하듯, 우리도 주님의 뜻에 거역할 때도 있고 주님께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질문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우리의 남은 여정을 주님의 자비와 함께 올바로 걸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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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복음은 기적이라는 말 대신 ‘표징(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이라는 용어를 쓴다. 다른 말로 ‘상징’이라도 할 수 있다. 상징은 어떤 것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신호등에서 파아란 불은 ‘진행해도 좋다’, ‘붉은 불은 멈추어야 한다’는 ‘공동약속’이 있다. 서로 약속이 틀리면 교통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나타낼 때 심장형상을 표지로 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볼 때 보이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압니다.
요한복음에서는 7가지의 ‘표징’이 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2,1-12), 왕실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신 기적.(4,43-54) 베자타 못가의 병자를 고쳐주신 기적(5,1-18),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1-15),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6,16-21), 태생 소경을 고쳐주신 기적(9,1-12), 그리고 나자로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기적(11,38-44)이다.
이 기적을 요한복음은 표징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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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렵다고 포기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누구든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순간은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더 많은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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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몸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생각하는 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뇌가 그리 똑똑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복잡한 것 같지만 너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뇌를 속이기가 쉽답니다.
우선 뇌는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가짜로 웃고 있는데도 뇌는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짜로 울고 있거나 자주 화를 내고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면, ‘지금 불행하구나’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행복과 불행의 느낌은 평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뇌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든 웃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말을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뇌가 ‘지금 행복 중’이라고 표시합니다. 이렇게 웃음 짓는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하고 있을까요?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함께하게 됩니다.
‘죽고 싶다. 환장하겠다. 미치겠다. 화가 너무 나.’
이런 말로 가장 힘들어지는 것은 결국 ‘나’뿐입니다. 뇌는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 ‘불행’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까요? 진짜로 손해 보는 것 같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곧 사랑의 삶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무조건 내게 도움이 되는 삶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을 보고 있기에 신앙 자체를 포기할 뿐입니다. 결국 손해는 온전히 자기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육적인 말씀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을 본성으로 하고, 육적인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본성으로 합니다.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거북한 말씀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준 낮음은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완고함을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 손해가 온전히 돌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그 모든 것은 철저히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믿음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행복의 마음이 진짜 행복을 내게 전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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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남은 이와 떠나는 이>
요한 6,60-69 (영원한 생명의 말씀)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남은 이와 떠나는 이>
당신에게
차고 넘치게 받아
조금씩
당신처럼 되어
당신 그러하듯
기꺼이 주려는 이는
당신 곁에
끝까지 남겠지요
당신에게
차고 넘치게 받음에도
조금도
당신처럼 되지 않고
당신과 다르게
오직 받으려는 이는
당신 곁을
언젠가 떠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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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조언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대한 긴 얘기의 끝부분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에 반응이 갈립니다.
사람들은 듣기 너무 거북하다며 주님을 떠나고,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어딜 가냐고 합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서로 딴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그대로 갈립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북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말이 되고 심지어 영원한 생명의 말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심성이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심성이 좋고 착해도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습니까? 분명코 믿음에서 갈리고, 그리스도교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이고,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요 생명이라고 믿고, 우리 인생 전부를 이 생명의 주님께 거는 우리지요.
이는 마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의 믿음과 같습니다.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저 길로 갈 수도 있는데 누구 말을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길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작 이 세상 갈림길이 아니라 영원과 생명을 가르는 정말로 고민이 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요즘 주식 투자와 관련하여 작전꾼들의 말을 믿었다가
자기와 아는 이의 전 재산을 날리게 되는 일이 허다한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식에서 대박과 쪽박이 갈리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지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황천길이 될 수도 천당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 역사를 보니 주님을 믿게 된 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주님 말씀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언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주님 말씀이 점차 조언이 아니라 영원의 갈림길에서 듣는 구원의 말씀이 되어가고 그만큼 절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찬가지로 어떤 길을 선택할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절실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래서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베드로 사도처럼 대답할 수 있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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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현역>
-그리스도가 전부인 사람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116,12-13)
“영원한 현역”은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우선 살아 있는 분으로 영원한 현역이라 할 수 있는 분을 소개합니다. 지금 41차(2023.4.28.-30) 항가리를 사목방문하고 계신 1936년생 우리나이로 고령의 88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영원한 현역입니다. 방문 모토인 ‘그리스도 우리의 미래’ 라는 말마디도 공감했습니다.
바로 영원한 현역이라 칭할 수 있는 분들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저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저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제 서품 25주년 은경축 상본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성구는 제 평생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방금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항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나라 지도자들에 대한 연설이 실시간으로 중개되고 있었고 내용도 멋졌습니다. “국경을 넘어 바라보며 평화를 추구하라”는 요지의 강론에 “역사의 도시, 가교의 도시, 성인들의 도시”라며 부다페스를 찬양하며 항가리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시의적절한 명연설이었습니다. 항가리 주재 교황대사의 “항가리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쁨(joy)과 성실(sincerity)을 사랑합니다."라는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우리나이로 82세, 저보다 7세 연상의 역대 최고령의 미합중국 제46대 대통령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역시 영원한 현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 바이든은 놀랍게도 지난 25일,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미국의 영혼을 위해 싸우겠다”며 내년 치러지는 재선 도전을 공식선언하며 기염을 토했습니다. 만일 재선에 성공하여 임기를 채운다면 미역대 최고령 대통령으로 우리나이 88세입니다.
지난 삼척에서의 수도 공동체 봄소풍시, 시종여일 열정적으로 안내를 맡았던 분, 김일동 루가 형제도 영원한 현역이었습니다. 저보다 11세 연상의 86세의 고령인데 정말 저보다 젊어 보여 놀랐습니다. 저와 악수시 좋아하며 “예수님과 악수하는 것” 같다며 신앙고백적 유머도 멋졌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제13대 국회의원에 3선 삼척시장을 역임한 명실공히 삼척시의 유지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봄소풍을 함께 했던 아랫집 87세 고령의 서 마리레몽 수녀님 역시 노인티가 전혀 안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젊은이 같은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날마다의 아침미사때도 수녀님들중 신자석에 1등으로 들어오는 참으로 부지런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답습니다.
묵상해 보니 생몰연대에 관계없이 영원히 살아 계신 성인들이야 말로 영원한 현역들이라는 생각이듭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33세 단명한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 역시 놀라운 영원한 현역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25자녀들중 23번째가 바로 성녀 가타리나입니다. 성녀의 업적은 정말 불가사의로 100% 연소시킨 불꽃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성녀는 1380년 33세로 선종한후 1461년 시성되었고, 1866년부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이 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학자로 선언했으며,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녀를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 스웨덴의 비르짓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와 함께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지정했습니다.
교회의 영원한 현역의 성인들에게는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방금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들의 미래이자 현재이자 과거인 분들로 그리스도가 그들의 전부가 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미래, 현재, 과거, 모두가 되었듯이, 성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미래, 현재, 과거, 모두가 된 분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빛나는, 영원한 전사들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생애가 전부가 된 분이기에,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삶이기에 그가 행하는 오늘 복음의 기적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를 통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애네아스의 치유 기적 장면도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이어 야포에 타비타라는, 그리스말로 하면 ‘도르카스’라하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한 자매였는데 병이들어 죽었고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지체없이 달려와 자매를 살려냅니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장면이라 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다.-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나, 일어나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애네아스와 타비타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 신록의 삶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이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단하나의 삶은 언제나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영적 탄력좋은,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파스카의 삶뿐이겠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가, 미래와 현재와 과거된 분임이 이미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일편단심, 시종여일, 한결같이 주님을 따랐던 영원한 현역의 빛나는 모범 베드로 수제자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란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알았던 베드로였고, 바로 다음 장면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께 실망한 제자들이 하나 둘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시몬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의 응답입니다. 우리의 대답도 이와 같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명답이 예수님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깊이 깨달아 안 베드로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이자 과거가 되는 분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미래,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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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 60절에서 69절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긴 말씀'(6,2)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거북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60)
생명을 가져다주는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육의 빵이 아닌 영의 빵(성체)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63)
육 안에만, 보여지는 것 안에만 갇혀있었던 사람들은 영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68-69)
예수님께서 열세 번째 제자들인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우리도 떠나간 제자들처럼 육 안에만, 보이는 것 안에만 갇혀 있으면 쉽게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면 육적인 바람들, 썩어 없어질 바람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누가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신부님 또는 수녀님 또는 신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예수님과 성당과 등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고,
제대로 희망하고,
제대로 사랑하면서,
기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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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UoRG-uNw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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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 68)
살과 피가
되시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도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영원한 고백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과
함께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수 많은 기도와
수 많은 묵상이
오늘의
우리입니다.
믿음의 길은
지도에도 없는
길이기에
믿음으로
말씀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믿음도
우리의 마음을
열듯 마음을
주님께
내어주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믿음의 거리입니다.
가장 맑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다시 배우고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세속적인 기도가
삶의 출구를 찾는
진실한 기도로
바뀝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언제나
거룩한 삶은
단순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떼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른 척하시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음은
일생에 걸쳐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며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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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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