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습관 / 안지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공원의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이 있어 보이는데 흐르는 시간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는 채로 기다린다 아픈 줄도 모르면서 앓는 병처럼 병과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으니 나의 오늘은 언제나 미완이고 미완의 아름다움은 사건에 있지 가령 누군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데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서로를 발견한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오다 내 앞에 선다 손에는 상자가 들려있고 그는 상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닫혀있는 상자 나는 상자 속이 궁금하지만 열린 상자를 꿈꿀 수 없다 내게 꿈이라는 단어는 죽었거든 나는 평생토록 두 눈을 뜨고 있으니까 괴롭습니까? 이 상자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가 내게 상자를 건네고 이것은 두 번째 사건 나는 상자를 받지 않는다 그는 상자를 내 곁에 두고 유유히 사라진다 덩그러니 놓인 상자는 외로워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가로등 빛이 작은 빛인 것처럼 나는 상자를 건드리지 않는다 오늘의 사건은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미완을 더는 미궁으로 빠뜨리고 싶지 않다 벤치를 벗어난다 상자와 내가 멀어진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저 상자는 영영 나의 외로움이 되고 감정이라는 건 습관이거든 나는 다신 보지 못할 상자를 내내 기다릴 것이고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줄 모르는 내가 상자를 떠올리는 습관을 앓으면 완성되는 상자 아름다운 미완의 ㅡ 계간 《시산맥》 2024년 가을호 -------------------------
* 안지은 시인 1992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앙팡 테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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